최근 수정 시각 : 2023-12-15 02:19:45

이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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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대 해병대사령관
이동용
李東用 | Lee Dong-yong
파일:이동용 장군.jpg
<colbgcolor=#cc101f><colcolor=#ffcc00> 출생 1927년 4월 27일
충청북도 보은군
사망 1987년 6월 26일 (향년 60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천호대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1묘역-144호
재임기간 제11대 해병대사령관
1975년 7월 10일 ~ 1977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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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101f><colcolor=#ffcc00> 배우자 김순애
학력 청주상업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육군대학 (수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경력 울산석유화학 대표이사
수산업협동조합 중앙회 회장
청주개발 대표이사
군사 경력
임관 해병학교 (2기)
복무 대한민국 해병대[1]
1950년 ~ 1977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해병대)
주요 보직 해병대 1연대 2대대 5중대장
해병대 제1여단 2연대 1대대장
해병대 제1여단 1연대장
해병대 제1사단 부사단장
해병대 제1사단장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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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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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제2대 해군 제2참모차장(제11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하였다.

2. 생애

1927년 4월 27일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출생하였다.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다.

평소 해병대를 동경해 1950년 해병학교 2기로 입대해 같은 해 7월 27일 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정전 후 2차례 도미유학을 했고 귀국 후 해병대사령부 특무대장, 해군본부 헌병감, 해병대 제1여단 1연대장을 거쳐 해병대사령부 인사국장 재임 중인 1969년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인 1970년 청룡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1971년 8월 5일 허홍 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할 때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73년 해병대 제1사단장에 임명됐다. 사단장 재임 시절 장교로서 솔선수범을 위해 직접 공수훈련에 참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75년 해군 제2참모차장에 임명되었다.

1977년 중장으로 예편 후 울산석유화학 대표이사, 수협 중앙회 회장 등을 지내고 고향인 충청북도 유지들이 출자한 청주개발의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다.

1987년에 어릴 때부터 정신분열증간질병을 앓아오던 장남[2]을 살해해 운전기사와[3] 대청호에 암매장했다가 사체가 발견되자 운전기사가 자백을 하여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결국 수사망이 좁혀오자 6월 26일 천호대교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해는 1987년 6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1묘역에 안장되었다.[4]

[1] 군번 80799[2] 10살 때부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한다. 치료를 위해 중학생 때 미국에 1년 동안 보낸 적도 있으나 발작이 심해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이동용은 대학 진학, 입대, 결혼, 사업 등을 하게 했으나 정신병 때문에 모두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 장남의 정신병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 큰 고통에 빠졌다.[3] 평소 장남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진정시켜왔다고 한다.[4] 이미 사망하였기에 형사소추대상에서 제외되어 유죄증명을 할 수 없어 국립묘지 안장에 법적 시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