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1년 3월 6일 |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경릉리[1] (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 | |
사망 | 1935년 7월 19일 |
만주국 봉천성 무순현 무순감옥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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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1년 3월 6일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경릉리(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흥경현(興京縣)[2]에 거주했다.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0년 유돈상 등과 함께 봉천성 동변도 집안현(輯安縣)[3]에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하고 서기(書記)를 맡았다. 이후 대위사하(大葦沙河) 이도외자(二道崴子)[4]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6월 19일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진 것은 나라를 위한 진정성 있는 교육이 없기 때문이라며 인재 양성이 참으로 급하다고 여겨 유돈상·음성진(陰聖進) 등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뒤 국민부(國民府)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이와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2년 국민부의 영릉(永陵)[5] 지역 총관(總管)을 맡아 국민부 지방조직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총사령이 순국한 후에는 박대호(朴大浩) 등과 함께 붕괴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의 재건에도 힘썼다. 그는 겉으로는 영릉가(永陵街) 지역의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을 역임하면서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고, 비밀리에 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은 곧 일본 밀정에 의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일본영사관을 거쳐 봉천성 무순현 무순감옥에 수감되었고 1935년 7월 19일 이곳에서 피살되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