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해남 윤씨[2] |
출생 | 1922년 3월 9일[3]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68번지[4] | |
사망 | 1944년 5월 25일[5] (향년 22세) |
전라남도 광주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39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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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孤山) 윤선도의 12대손이다.[6]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은 6촌 재종제(再從弟)이며, 광주고등법원장 윤준은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2. 생애
1922년 3월 9일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68번지에서 아버지 윤재술(尹在述, 1908. 6. 20 ~ ?)과 어머니 연주 현씨(1898. 4. 14 ~ 1939. 11. 10)[7]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광주서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3월 2일, 졸업을 앞두고 기환도(奇桓度)·기태룡(奇泰龍)·신균우(申均雨) 등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부 금정(現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서 모임을 갖고 1938년에 조직된 광주서중학교 독서회를 무등회(無等會)로 개칭하고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무등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 5월부터 6월까지 학병 지원 반대·창씨개명 반대·일본어 상용 반대·징병제도 반대 등의 표어를 내걸고 전라북도 전주부·순창군·고창군 등에 거주하는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동맹휴학으로 대표되는 광주서중학교 제2차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거사 계획이 드러나 만주국 봉천성 봉천시로 피신했다가 결국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광주형무소에 투옥된 그는 취조과정에서 잔학한 고문을 받았고, 병으로 인해 가석방되었으나 석방된지 10일만인 1944년 5월 25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별세, 순국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