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16:59:00

유해발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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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병

1. 개요2. 대한민국 국군
2.1.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2.1.1. 발굴팀2.1.2. 감식팀2.1.3. 공반기
2.2. 군단 유해발굴팀
3. 업무4. 깡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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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슬로건
말 그대로 전사자의 유해 발굴이 임무인 군대 보직. 모든 군대는 여건이 좋다면 전사자의 시체를 후송해서 장례를 치르려고 노력하지만, 변수와 극한상황이 시시각각 벌어지는 전쟁에서는 전사자의 수습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전사자 상당수가 전장에 그대로 버려지거나 아니면 후일을 기약하고 그냥 이름도 모른 채로 매장하기만 하고 물러나는 사례가 많아서, 최소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유해라도 발굴해서 유족에게 돌려주는 게 주 임무이다.

미군에는 전쟁 중 실종된 미군의 유해 탐색과 수습을 전문적으로 하는 미국 합동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 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가 있으며, 한국에 방문해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합동 발굴을 한 적도 있다.

2.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국군에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라는 부대가 2007년[1] 창설되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서 세계 두 번째로 전사자 유해발굴 전문 부대를 창설한 국가다. 대한민국 국군의 유해발굴 부대는 주로 6.25 전쟁 당시 전사자 유해의 발굴과 신원파악을 담당한다. 6.25 전쟁은 워낙 단기간에 전선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많은 전투에서 미처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군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병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고고학과, 사학과, 역사교육과 학생들의 희망. 실제로 이 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을 특기병 모집에서 우선으로 데리고 간다.

원래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은 2000년도에 6.25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다부동 지역 전사자 발굴사업에서 시작했다. 원래는 육군본부 내에 있던 일개부서에 불과했으나,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내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정식 부대로 승격되었다.

땡보직이라고 오해받기 쉽지만, 애초에 유해발굴병의 주 목적이 뭐냐면 등산해서 발굴이다. 농담이 아니다. 그냥 산에 올라가서 땅 파는 게 일의 전부다.[2] 산을 타는 것 역시 지금까지 살면서 했던 등산했던 것 그 이상은 물론이요, 평생 해볼 등산을 여기서 겪어볼 수 있을 정도이며, 등산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1시간은 올라가야 한다. 다른 보직이 삽질하는 것 서너 배는 한다. 뿐만 아니라 한여름, 기온이 4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삽질을 해야하며,[3] 한 해의 발굴이 끝날 즈음에는 영하의 날씨에 하루 종일 밖에서 발굴을 해야한다.[4] 게다가 모든 일과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만큼 생리현상을 산에서 모두 해결해야 한다. 이걸 두고 땡보직이라 하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위 사진도 죄다 유해발굴병 중에서도 짬 안 되는 병이 파낸 것이다. 십자인대 파열로 전역하는 사람이 1~2년에 한 번씩 간간이 나온다.

또한, 발굴 이후 감식을 하는 감식팀이 따로 있다. 이쪽은 감식병이 별도로 존재하며 TO는 12명.[5] 인원이 적은 대신 생활관은 하나뿐이라 낑겨서 생활한다. 파견기가 되어 파견을 나간다면 생활관이 비워지니 널널하게 생활할 수 있다.[6] 모집 때부터 따로 모집하니 착오가 없도록 확인을 하길 바란다. 발굴병에 지원할 수 있으면 감식병으로도 지원할 수 있으며 추가적으로 감식병은 생물학과와 같은 의무 관련 계열이면 지원이 가능하다. 단, 지원요건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편이므로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좋다.[7]

감식병은 기본적으로 감식연구소와 파견지의 임시감식소에서 일을 하며 간부[8]랑 하루종일 같이 있는다.

파견 나간 임시감식소에는 간부1, 병사1이 상주하며 병사 혼자서 모든 업무와 행정을 처리한다.[9]

임시감식소 하나에 3~4개의 발굴팀이 연결된다.[10]

발굴병의 병과분류는 일반보병, 특기번호는 111101.275
감식병의 병과분류는 의무병, 특기번호는 411275이다.

특이사항으로 부대창설 후 2007년 국방부 이관까지 활동한 유해발굴병들은 유해발굴 병과가 아닌 일반병과인 경우가 있다. 병과 신설이 부대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이루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11]

2009년에는 유해발굴사업의 효율성을 늘리기 위해서 각 군단별로 자체 유해발굴팀을 편성,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을 지원하고 있다.

2012년 6월 26일 MBC에서 이들을 다룬 2부 구성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

2015년 6월 14일 MBC 예능 진짜사나이에서 한국전쟁 65주기 및 호국의 달 특집으로 유해발굴감식단 편이 방영되었다. 가급적 유해가 나오지 않게 촬영을 했지만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방영되었으므로 시청 시 유의할 것.[12]

문의전화는 1577-5625(오! 6.25)이고 전사자유전자검사를 신청할 수 있으니 친척 중 6.25 참전 실종자가 있다면 홈페이지를 참고해 볼 것.

2.1.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국방부에서 시작한 사업으로 초기에는 각 부대에서 관련 전공자들을 차출해 파견식으로 운영하던 방식이었으나 사업이 번창(?)할 기미가 보이자 2004년 정식으로 부대가 만들어졌다. 부대를 처음 창단하면서 각 부대마다 전공자들을 영구차출받아 2개 분대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기세좋게 만들고보니 국방부나 육본에 편제가 나질 않아 아래에 나올 09년 국방부 신막사로 이사가기 전까지 대전의 모 부대에 셋방살이를 하게 된다.[13]

아래에도 설명하겠지만 맘은 편하지만 몸은 죽어나는 군생활을 하고 09년에 국방부에 소속될 때까지 상당히 고생한다. 사실 셋방살이 하는 부대가 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자대는 동작구 현충원 내에 위치. 2009년에 새로 지어진 신막사이다! 그래봤자 발굴병들은 1년에 4달 빼고 파견이다. 막사 내에는 생활관과 전사자 감식과 유해 안치를 위한 시설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현업무를 담당하는 영현소대와 행정지원병, 운전병들이 같이 살고 있다. 현충원에는 국방부 의장대와 국방부 군악대와 PX를 공유한다. 또한 국방부 직할부대다 보니 해병대, 해군, 공군도 같이 생활하는 게 재미라면 재미. 단, 직접 실무에 나가는 발굴병들은 전부 육군 만 뽑는다. 해공군 인원은 감식단 본부의 조리병이나 행정병, 운전병 등만 뽑는다.

카투사 등과 같은 개별모집병으로 모집한다. 특기번호는 111101.275. 모집 자격은 사학과나 역사교육과, 고고학과, 인류학과 등 관련학과 1년 재학[14][15] 지원서를 내면 유해발굴감식단에서 평가를 보게 된다. 평가 내용은 구두면접과 체력테스트[16] 체력은 급 간 기준이 거의 20개 단위로 듬성듬성 해서 별로 중요하진 않다. 특급은 거의 없고, 대부분 최하점 언저리다. 그러나 체력테스트의 비중은 매우 적으며, 구두면접이 결정적이다.[17] 구두면접은 기본적인 안보관부터 지원동기 같은 간단한 것부터 의외로 전문적인 발굴 관련 지식까지 물어본다. 게다가 유해발굴감식단을 목적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온[18]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어중간하게 준비했다가는 그냥 불합격한다는 건 다 옛날 얘기다. 근래에 들어서는 지원율이 급감하고 있으며 어정쩡한 마인드를 탑재한 신병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곧 전역할 병장을 제외한 일병~상병들의 고민이 많아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원율이 또 폭등하고 있다. 2018년 1-2월 입대는 7:1이었고, 2018년 3-4월 입대는 6.6:1로 매우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 지원해놓고 지원율에 기겁해서 안 오는 경우도 있지만 연초 입대의 경우 어느 부대나 그렇듯이 지원율이 상당히 높은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최종 합격자는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해서 일반 육군 병들과 똑같이 기초군사교육을 이수한 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으로 배치된다. 참고로 후반기교육은 없다. 전부 자대에서 배우는 것.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서빙고역에서 인사담당관을 만나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오게 된다. 1~2주일 정도를 유해의 구조와 발굴 절차 등을 교육받고[19] 자신이 배속될 팀을 지정받게 된다. 또한 유해발굴병에 대해 학교 선배를 통해 알음알음 알아 지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모종의 이유로 같은 학교 출신을 같은 팀에 배정하지 않는다.[20] 그리고 이상하게 특정 몇몇 학교 출신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21]

신병의 삶은 발굴기에 전입을 오냐, 공반기에 전입을 오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발굴기에 전입을 오게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발굴 출동을 했다가 오후에 복귀를 해서 씻고 저녁먹고 유해공부[22]를 해야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삶을 보내야 한다. 과거에는 선임들이 유해에 대해 물어봐서 대답을 못 하면 털리는 일이 있었으나 현재는 해당 행위는 부조리로 간주되어 일어나지 않고 다만 신병이 알아서 공부를 하되 팀장 이라고 쓰고 분대장이 봐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반면 공반기에 전입을 오면 일과시간 동안 유해에 대해서만 공부하면 되기 때문에 부담이 적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굴병에겐 다른 병사들과 꿀인 군번이 다른데, 123월 군번 같은 경우[23] 전반기 두 번에 후반기 두 번의 발굴을 뛰어야 하기에 여타 군번들에 비해 발굴 일수가 많은 편이나 6,7월 군번의 경우 전반기 한 번에 후반기 두 번의 발굴만 하면 되는 편이라 여타 군번에 비해 발굴 일수가 적은 편이다. 군 복무가 18개월로 단축되는 시점에서의 11월 군번은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의 발굴만 뛰면 전역이다!

가끔 앞에 '국방부'라는 말에 현혹해서 행정작업만 하는 줄 알고 왔다가 발굴기 때 겪는 상황(발굴도구를 잔뜩 들고, 오르는 산이 1000고지가 넘고, 산 타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린다...)에 혼란을 겪는 병들이 많은 편이다.[24]

자대가 국립서울현충원이라는 것 때문에 서울에서 군생활을 보내게 될 줄 알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발굴병의 경우 대부분 파견을 나가기에 공반기가 아니라면 행정담당이 되는 것이 아닌 한 서울에 있을 일이 없다. 발굴병은 갓 들어온 신병이라도 파견을 나가지만 감식병의 경우 갓 들어온 신병은 파견을 나가지 않고 중앙에서 교육을 받고 다음 발굴기에 선임과 함께 나가게 된다. 단, 발굴팀에서 유해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경우 임시감식소에 추가적으로 보내 줄 인원이 없기에 신병이라도 보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발굴기간 동안에는 휴가를 통제하는 경우가 있어 휴가를 공반기에 몰아서 나가거나 혹은 전역하기 전 말출 때 휴가를 한꺼번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겸사겸사 발굴도 째고

2015년 현재는 2014년 말에 완성된 신막사에서 현충원 의장대 및 군악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건물이 전형적인 부대 건물 st라는 건 안 자랑 진짜 야전부대 부대 건물하고 똑같이 생겼다

2.1.1. 발굴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발굴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식편제로는 8명이지만 여러 변수를 고려할 때[25] 평균적으로 6~7명으로 구성되며 인원난에 허덕이는 팀은 5명이기도 한다. 전국의 부대를 1개월 2개월 단위로 파견나가고 파견나간 곳에서도 아저씨로 불리기 때문에 다른 부대원들과 상호작용도 어렵다. 그리고 국방부에서 보급되는 물품과 일반 보병부대에서 보급되는 보급품이나 복장 등에서 병들 간 괴리감을 불러오는 경우도 많아 업무적인 일이 아니면 지원부대와는 대개 친해지기가 힘들다.

발굴기간에 발굴병은 발굴복이라는 특수 피복을 이용한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등산바지
  • 등산복 상의
  • 춘계 동계 바람막이
  • 발굴조끼
  • 발굴모
  • 정글모(원형 챙)19년 기준 현재 정글모의 보급은 없으며, 16년~18년 군번 한정으로 패딩이 보급되었다.
이 모든 피복은 사제이다.[26] 옷은 하계 상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색이다. 전사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발굴복 이외에도 발굴장비를 지급받게 되는데 1개 팀의 장비는 아래와 같다.
  • 트롤
  • 전지가위 (일자/반달)
  • 호미 (소형/대형)
  • 대칼
  • 유해도
  • 금삽
발굴상자라고 하는 큰 상자에 담아서 각 인원에 맞게 배분한다.

유해도는 발굴한 유해를 부위에 맞춰 배열하기 위해 쓰며 발굴시 바닥에 펼쳐놓는다. 퍼즐 맞출 때 쓰는 가이드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트롤은 문화재발굴현장에서 흔히 쓰는 그 트롤이지만 트로를 쓰다보면 유해가 쉽세 상해버리기 때문에 정말 딱딱한 땅에서 수습하는 것이 아니면 대칼을 사용한다. 전지가위와 톱은 뿌리를 자르기 위해서 사용하며 뿌리가 클 경우 금삽을 써서 자르는 경우가 있다. 금삽은 일체형 삽인데 워낙 단단해서 일반삽으로 하면 부러지는 정도도 끄덕없이 작업이 가능하다.

대칼이 수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비인데 대나무라는 식생이 남쪽에만 자라다보니 파견 가는 지역에 따라 대칼이 부족한 팀도 있다. 플라스틱 대칼이 보급나온 적이 있지만 성능은 그닥... 대칼은 그때그때 필요한 인원이 각자 알아서 만드는 자급자족 방식이여 장인(?)이 있을 경우 장인이 날을 잡아서 만들기도 한다.(국방부 마크를 음각으로 새기거나 여러 가지 커스텀 가능) 예전에는 생활관 내에 대나무를 키우며 깎아서 만들기도 했으나 현재는 나무칼이 보급되어 그걸 그대로 사용하든,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깎아서 개량해서 사용한다.

발굴 기간 중에는 일주일에 7천 원에 해당되는 부식비가 따로 나온다.[27] 매주 주말에는 분대장이 팀원 한명과 같이 장을 보듯이 PX 내의 먹을 것을 싹쓸이 해온다.[28]

덕분에 팀내 구성원끼리의 상호작용이 다른 부대보다 특히 많으며 물일병만 되어도 상병장급과 농담 따먹으면서 놀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진다.[29]물론 선임이 개차반인 경우 성립할 수 없다또한 팀원간 분위기가 좋다고 해도 팀장을 잘못 만난다면 군생활이 정말 피곤하다. 서로간 친밀도가 높은 대신에 업무는 많다. 평일에는 발굴을 바치고 복귀해서 저녁먹고 씻고 행정업무를 마치면 취침해야 할 시간이 된다. 정말 바쁠 때는 PX 가기도 버거울 때가 있다.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잉여인원이라는 개념이 없다. 말년병장이라고 해도 부대로 귀대하기 전까지는 혼자 산에 안 올라가고 그런 거 없다. 여타 부대처럼 짬이 찰수록 개인 시간이 늘어나고 그러지 않는다. 이등병도 일병도 상병도 병장도 모두 평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발굴병의 질은 절대적으로 경험에 비례한다. 아무리 고문관인 병장[30]이라도 발굴능력에 한해서는 절대 늦게 들어온 병장이 이길 수 없다.[31] 덕분에 발굴기나 공반기 때 각종 고급 작업에 끌려나가는 병장이 많다. 그리고 발굴병들은 유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발굴 부대 병력들은 유해가 유해인지 모르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은 유해와 비슷한 것이라도 나오면 바로 뒤에 발굴병들에게 물어보라고 지시한다. 따라서 발굴병들은 발굴 부대 병력들이 유해를 나무인줄 알고 버리기 전에 먼저 유해임을 확인해야 하기도 하며, 유해를 나무 또는 동물뼈[32]라고 판단하여 버리게 된다면? 미숙한 발굴병이 버린 유해를 팀장진짜 야단난다 이나 다른 팀원에 의해 식별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유해는 발견되었음에도 미숙한 발굴병 때문에 영영 찾을 수 없게 된다.[33] 때문에 발굴병들은 책임감을 갖고 유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멀리서봐도 나무인지 뼈인지 구분이 가능하다.[34]

그리고 팀은 부상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일반 병사처럼 쨔쟌!하고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있는 간단한 개념도 아니며 한 명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이 맡고 있던 일들은 모조리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서 업무 지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35] 그러나 산을 오르내리고 해야하는 보직의 특성상 공반기가 되면 손목, 무릎, 발목 부상을 달고 살 수밖에 없으며 공반기가 되면 국유단 외진 인원의 대다수는 병든 발굴병들이다. 뿐만 아니라 발굴이 힘들 정도로 아프더라도 팀의 사정상 참고 발굴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36] 발굴병들에게 연골연화증은 친숙한 친구이다.

기본적으로 발굴병이 발굴기간동안 해야하는 행정업무는 국유단으로 보내는 그날의 발굴 현황[37]을 기록하는 일일보고와 그날 수습한 유해와 유품을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것, 그리고 증식 납품조서[38], 사진정리가 있으며 일일보고와 발굴 기록 입력은 매일 발굴을 마치고 돌아와서 해야하므로 해당 업무를 맡고 있는 인원은 씻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그 외에도 발굴 부대 측에서 그날의 발굴 결과[39]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기록을 넘겨줘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발굴지를 마치면 다음 발굴지로 부대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게 또 일이다. 부대이동을 할 때에는 갖고 왔던 것들을 다 갖고 가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물자함부터 각종 장비, 물자들과 소관, 팀원 수 만큼의 개인 의류대 및 침구류, 세면도구를 모두 챙겨야 한다. 이게 양이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테트리스를 잘 하지 않으면 다 안들어가거나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게다가 발굴지를 이동할 때마다 짐을 싸고 푸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매우 귀찮다. 물론 상병쯤 된다면 그 밑 계급들에 비해 짐을 싸고 푸는 속도가 차원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 귀찮은 부대이동 중에서도 모든 발굴병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전, 후반기를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또 발굴병의 장점으로 전국 각지물론 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지만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평소 가보지 못했을 전국 각지를 둘러볼 수 있으며, 또한 전국의 유적들도 돌아볼 수 있다. 일부 발굴병들은 발굴지 근처의 유적지를 찾는 경우도 있다. 역시 역덕후들 또한 통상적인 병사들이 자대배치를 받으면 그 부대에만 머무르는데 비해 발굴병들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씩 부대를 옮겨다녀 군생활에 변화가 많기 때문에 혹자는 군생활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기도 한다.그래봤자 우리 모두 평등한 18개월 우천시에는 작전이 제한되기 때문에 원칙상으론 발굴을 나가지 않고, 발굴 도중에 비가 많이 쏟아진다면 철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날은 밀린 행정업무를 하면서 부대에서 쉬는 편이다. 물론 비가 가랑비 수준이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간혹 발굴하다가 눈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전날 눈이 많이 와서 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대체로 발굴을 하는 편이다.[40]

2.1.2. 감식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감식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식소대, 감식팀 등 소속과 명칭은 자꾸 바뀌는 편이다.

TO는 12명이지만 전역병과 신병 때문에 13~4명 정도로 유지된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따로 모집하기에 착오없길 바란다.

발굴기가 되면 2~3개의 임시감식소가 세워지며 각 임시감식소에 감식관1 감식병1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유해발굴 상황에 따라 감식병이 추가되기도 한다.

발굴병에 비하면 육체적으로 편하다. 함께 파견을 나갈 경우 발굴병들이 6시부터[41] 일어나 누구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42] 등산준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슴푸레한 새벽에 검은 발굴복을 입고 관이나 기타 장비들을 넣은 더블백을 매고 곡괭이와 삽을 든 채 줄서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43]
유해가 썩거나 얼지 않게 하기 위해 온도 습도를 맞춰줘야 하는데, 그 덕분에 여름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고 겨울에는 히터가 빵빵하다. 히터가 제대로 안되어 있는 부대도 있지만 그 경우는 전기전열기를 잘 내어주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혼자 파견을 나가게 되며, 파견부대에서 파견부대의 병사들과 지내게 되면 외롭지 않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파견부대 쪽에서 별일 없는 한 터치를 하지 않기에 비교적 자유롭다.

파견 시 업무는 유해 및 유품의 이물질 제거와 감식, 감식 현황 행정처리다.

중앙에서의 업무는 행정처리와 유해 자료 정리인데 유해 자료 정리 중 사진촬영이 가장 시간이 걸리면서 귀찮은 일이다.

촬영대 위에 새까만 암막을 얹고 유해를 올려두고 부위별로 얹고 암막에는 먼지 한톨 없게 붓질을 하고 사진촬영을 한 뒤에 뒤집어서 촬영을 하게 된다. 이때 사용되는 카메라는 DSLR.

촬영 시 진동이 있어서는 안 되고 앞뒷면은 거리와 초점이 동일해야 되며 먼지가 있을 경우 재촬영을 하기 때문에[44] 신병의 경우 한 컷을 찍는데 5분이 걸리며 숙달된 병장이 찍어도 1분 정도가 걸린다. 제대로 찍은 사진의 경우 별 하나 없는 우주공간 안에 유해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촬영 업무는 힘들긴 하지만 실수해도 다시하면 되기에 리스크가 제일 낮은 편이라 신병에게 촬영대 하나를 맡기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비는 손이 없기에 맡기는 업무인지라 속도가 느려도 도와 주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유해가 많으면 공반기가 끝날 때까지 사진촬영이 완료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는 숙련된 상병 병장들이 나서서 촬영대를 추가로 만들어낸 다음 촬영을 한다.

공반기에는 발굴기에 진행중이던 중앙의 업무를 다음 발굴기가 되기 전에 끝마치도록 하는 것이기에 업무에 큰 차이가 없다.

2.1.3. 공반기

유해발굴감식단이 일년 내내 발굴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혹서기와 혹한기가장 덥고 추울 때에는 현충원으로 돌아와서 전체적인 정비를 한다. 파견 나간 팀의 신병들의 경우는 선임이 7명에서 대략 120명으로 뻥튀기되기 때문에 매우 멍멍이 같은 기간이 된다.그리고 모든 발굴병들이 비오는 날과 함께 바라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전반기를 마치고 복귀할 때는 5개월에 달하는 발굴 기간을 마치고 복귀하기 때문에 다른 발굴 팀원들과 만났을 때 거의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이 된다. 반대로 전반기 출동하는 날에는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작별인사를 한다.[45]

발굴팀의 경우 돌아와서는 보고서 작성과 다음 발굴기를 준비하는데 폐급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A급 정도로 정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가 적은 병들만 죽어나갈 정도이다. 팀마다 장비가 매우 많기 때문에 결국 모든 병들이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군단 발굴팀 장비도 유해발굴 감식단원이 정비한다.

또한 다음 발굴지에 대한 사전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인이 발굴병인지 행정병인지 헷갈릴 정도의 행정작업을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발굴지에 해당하는 군사 지도를 분류도 안 되어 있는 지도 창고에서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와 행정병의 전유물이라고 알려진 아스텔지를 붙히고 지역에 해당하는 전사와 요도를 그리는 작업을 하게 된다. 별거 아닌듯 해도 지도 하나를 완성하기 까지 팀장(중~원사급)에게 몇십 번이고 검사를 받고 퇴고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요하는 작업이다.

사실 발굴 장비는 1년치 발굴을 마치고 나면 대다수가 폐기처분을 해야 할 정도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저런 것들은 다 버리고 버린 것들을 필요한 장비를 새로 보급받으며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장비들 위주로 정비하기 때문에 길어야 3일이면 끝난다. 또한 군단 발굴 장비의 손질 또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반기의 행정 작업은 팀의 모든 인원이 한다기보다는 팀당 한 명~두 명의 노예가 전담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인원들은 일과시간이 되면 책상에 앉아 개인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모든 군대의 특징인 쓸데없는 귀찮은 일에 차출되는 경우도 간혹 있으며 평상시 발굴기 때는 없던 근무도 생기게 된다. 사실 발굴병들은 발굴기동안 평균적인 병사보다 못한 환경에서 지내지만 공반기가 되면 정말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본인이 빡쎄게 일하고 한동안 한가하게 쉬고 싶다면 발굴병을 지원해도 좋을 것이다.

감식팀의 경우 발굴팀이 철수를 하게 되면 같이 철수를 하기에 막판에 쏟아져 나온 유해를 감식을 할 시간이 없어 흙 묻은 상태로 들어오게 되는데 모든 팀에서 들어온 유해들이 한 곳에 몰려 절망을 안겨준다. 게다가 유해는 1주일에 1회씩 보내기 때문에 정말 안나오는 경우가 아닌 전부 모으면 어마어마한 수가 된다. 그렇게 그동안 임시감식 후에 보냈지만 중앙에 사람이 적어 밀리던 유해 + 막판 유해가 되어 공반기에도 발굴기와 마찬가지로 바쁘게 일하며 공반기에만 하는 유해관련 업무도 있기에 야근을 종종 하게 되기도 한다. 다만 발굴팀에 비하면 파견장비랄 것이 100L 캐리어 2개 분량 x 임시감식소 수 이기 때문에 장비관련 스트레스는 물품관리 담당병사 한 명에게 몰려있다.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신 혹한기 유격 등 모든 종류의 훈련이 없다.

사격은 1년에 한 번 12월에 실시하지만 13년도부터 중공군 유해 송환 때문에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총기수입은 공반기에 한 번씩 하는데 자기 총기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말년병장이 되어도 모른다. 총을 잡을 일이 총기수입 할 때뿐이기 때문.

2.2. 군단 유해발굴팀

2009년부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지원을 위해 육군 군단별 예하에 만들어진 유해발굴팀[46]. 이쪽은 국방부 직할과는 달리 일반 병들 중에 차출해서 파견형식으로 만들어지는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똑같이 사학과, 고고학과 등 관련 학과 출신으로 뽑아야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음악목회과, 통계학과 등 굉장히 관련없어보이는 학과에서 오는 경우도 많다.[47]

반년, 혹은 1년 단위로 운용하며, 1년 단위로 뽑는 경우는 그 전 해 11월부터 군단 내의 부대에서 지원자를 받아서 모집하는 게 원칙이나, 수가 모자라거나 하면 차출한다. 보통 군단 유해발굴팀은 발굴통제장교가 지휘하며, 병 20명 정도를 두 팀으로 나눠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각 팀의 지휘는 중~원사급의 부사관이 맡게 되는데, 이 부사관들도 당연히 차출된 인원들이다.
  • 대한민국 국방부 통제 군단 유해발굴 집체교육
    전반기 유해발굴이 시작되기 전에 야전군 단위로 유해발굴팀을 모아서 국방부에서 약 2주간 집체교육을 실시한다.[48] 당연히 교관들은 유해발굴감식단 병들과 간부, 그리고 감식관들이다.
각 군단별로 자존심 싸움에다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포상을 미끼[49]로 유혹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 오면 군대에서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지옥인가를 느낄 수 있다. 2주간 거의 매일 새벽 1시까지 책 붙들고 연등하는 일이 다반사다.[50]
현재는 야전군 단위로 모으는 게 아닌 전 군단의 팀이 함께 모여 같이 집체교육을 받는다. 물론 교관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팀장들과 감식관들, 상병장 이상 병사들이다. 2017, 8년에는 52사단 211연대에 위치한 동원훈련막사에서 진행되었고 시설은 아주 만족스럽지만 TV가 없다. 그 점 유의하여 가면 될듯. PX나 전화는 아래 211연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데 이용할 때 마다 연대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부역을 지게된다. 2주간 거의 매일 연등을 실시하는 군단은 1군단, 3군단, 5군단 정도가 유일하다. 때문에 집체교육 퇴소식 때 포상을 할때면 우수 팀장, 우수 발굴병은 거의 1, 3군단에서 휩쓸어 간다.
주로 배우는 내용은 인체 뼈대학, 장비, 발굴, 유품구분(피아식별) 등인데, 특히 인체 뼈 공부가 사람을 아주 환장하게 만든다. 농담이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옆사람이 뼈로 보일 지경이다. 특히 유해도[51][52] 직접 보면 아는데, 아직도 조잡해 그리기가 평가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서, 가면 인체 골격도만 수십 장을 그려댈 수 있다. 2012년 집체교육부터는 유해도를 그리는 평가가 없어졌다. 그나마 다행 중 다행.(2020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각자 군단에서 실시함)

3. 업무

발굴 및 수습단계 이후부터는 주로 국방부 유해발굴병이 주로 업무를 수행하며, 군단 유해발굴병은 발굴 전 탐사 단계와 주로 발굴 과정에서 유해가 발견될 시 즉각 작업을 중지하여 유해가 손상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역할만 맡는다.

군단 유해발굴병 같은 경우 문화재 발굴기법과 유해도 등 발굴 이후 과정에 필요한 기능을 습득할 수 있는 시간이 단 2주간의 집체교육 뿐이어서 국방부 유해발굴병에 비해 발굴기법 및 수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편이나 소집된 병사들의 군 입대 전 역사적 지식, 해부학적 지식, 학습력에 따라 개인편차가 심한 편이다.

군단 유해발굴병 중 최전방 공병 출신이어서 국방부 인원 3명이 할 삽질을 혼자서 하는 역량을 가진 병사나 유해도를 거의 예술 수준으로 그려낸다거나[53] 심지어 국방부 소속 발굴병도 처음보는 아리사카 소총탄을 정확하게 맞혀내는 밀덕후 군단발굴병도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병도 발굴을 하면 호탐사가 주 업무를 이루며 유해가 출토되면 해당 개인호를 인수 받고 1~2일 내에 유해의 발굴을 완료한다. 유해가 출토되고 오랫동안 공기, 태양에 노출되면 백화되기 때문에 서두른다. 물론 원칙이라서 상황이 나쁜 경우 더 시간이 걸린다.[54]

이후 군단 발굴병은 행정담당인원과 국방부발굴병은 이후 차트를 작성하고 주마다 각 소속 부대에 주간보고를 올려야 한다.

군단 유해발굴병의 경우는 1년 중 탐사기와 발굴기로 나뉘는데, 탐사기는 주로 봄~여름에 수행하며 군단 발굴 팀장 및 통제장교의 판단 하에 6.25 당시 교전 지역으로 유력한 곳을 분석하게 되며 당시 교전지역 주민 및 참전용사 인터뷰를 통해 증언을 확보하는 과정을 거친다.

분석 발굴 시작 전 발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산의 개인호[55]의 위치와 수량을 파악하고, 마을을 탐문하며 당시 그 지역에서 벌어졌던 전투나 유해매장에 관해 제보를 수집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굴지역 탐사를 위한 준비물로는 금속탐지기, 등산 로드, 등산복, 발굴조끼, 탐사모, 정글도, 식수, 점심식량 등이 있으며 탐사기의 일과는 탐사 지역에 따라 등산/하산/탐사시간을 고려하여 유동적으로 조정이 되며 대개 06:30 기상, 08:00 탐사출발, 점심시간 1시간, 18:30 탐사 후 복귀로 이루어지게 되며, 휴식시간은 중간중간 있으나 오침 및 체단시간 등은 보장받기 힘든 편이다.사실 등산만 해도 체중이 쑥쑥 빠지게된다.....

봄~여름에 탐사를 하다보니 초목이 우거지며 벌레가 우글거리는 길도 없는 산을 타고다니는 체력과 무더위와 우거진 풀들과 거미줄, 그리고 땅벌들을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을 요구하게 되며, 점심 식사를 추진할 수도 없으므로 전투식량이나 아침식사[56]를 도시락에 싸와서 아침, 점심으로 2번 먹어야 하니 상당한 곤욕을 치루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이를 상급부대에서도 인지하고 있어서 1주일 단위로 넉넉하진 않지만 군것질 할 수는 있을 정도의 특식비가 지급된다.

발굴 같은 경우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함께 발굴부대[57]를 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흔히 유해발굴병에 대해 갖고 있는 많은 선입견 중 하나가 삽질만 하는 거 아니냐는 선입견인데, 사실 삽질은 발굴부대 병들이 다 알아서 하고, 발굴병들은 그냥 여기파라 저기파라 통제만 하면 된다(…). [58][59] 단 유해가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본격적으로 발굴병들 임무의 시작이다.

문화재 발굴기법을 적용하여 일부만 노출된 유해를 정밀하게 노출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최초 식별 유해를 기준으로 약 1미터 정도는 호미, 대칼, 붓을 이용하여 정밀하게 노출을 하며 그 이외의 유해가 없다고 판단되는 지역은 삽으로 사각형으로 파면서 확장한다.

이후 식별이 완전히 끝난 후 사진기록을 남긴 후에 유해를 전부 수습하여 관에 넣어서 관을 태극기로 싸는 것까지 전부 발굴병이 하는 임무다. "아저씨 뼈 나왔어요!" 포상휴가는 내 거야 라는 소리가 동시에 한 세네 곳에서 들리면 발굴병만 죽어나간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4개의 발굴팀에게 동시에 받게되는 감식병 또한 죽어나간다.[60] 국방부팀과 군단팀이 발굴지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발굴 부대 병력 통제이며 유해가 식별되어 수습하는 것은 국방부팀만 한다.

과거에는 유해가 국방부 인원으로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식별되어 군단팀도 같이 투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현재는 국방부 팀장과 팀원 모두 군단 팀의 실력에 대해서 신뢰가 없기 때문에 군단팀이 수습에 관여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유해가 식별되어 경시라인이 쳐지면 부대 간부 및 병사의 출입이 통제되는데 부대 인원 뿐만 아니라 군단팀장, 팀원의 출입도 통제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은 산악지형이라는 걸 새삼느끼게 되는 보직이기도 한데, 특히 고지가 엄청나게 많은 경기도 동부~강원도 지역에서 하는 유해발굴은 매일매일 6~700고지를 찍고 올라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발굴병 생활을 하며 1000고지가 넘는 산도 심심치 않게 올라간다.

그러나 요즘은 길이 잘되어있어서 몇 백 고지의 산을 올라가야 하더라도 일정부분 차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경우가 많아 평균적으로 30분~1시간 이내만 등산을 하면 된다그걸 매일 매일, 군생활 내내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물론 간혹 한 시간 이상 올라가야 하는 산도 있으며 심지어 설악산 같은, 저런 데서도 발굴을 하라고? 싶은 곳도 올라가기도 한다.

심지어 강원도 모 군단 유해발굴단 같은 경우는 GOP 지역에서 항상 발굴지역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매년마다 1개 중대와 발굴병들이 GOP 초소 운동장에서 텐트를 치고 8주 정도를 먹고 자면서 산다.[61]

요약하자면 어느 지역인지에 따라 일과의 업무 난이도 편차가 심한 편이다.

4. 깡패

통제장교들을 짬은 높은데 진급을 못한 사람으로 뽑기 때문에 웬만한 대대장들은 데꿀멍시킬 수 있는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발굴부대에 끼여서 생활하는 군단 유해발굴병들은 거의 생활에 해당부대의 터치를 받지 않는다. 점호? 10시 취침? 그게 뭐임? 거의 이 정도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으로 가면 이게 더 심해져서, 발굴과장인 중령이 사단장의 경례를 앉아서 받는 일도 허다하다.[62] 모 군단 발굴과정에서 있었던 실화로 발굴부대 대위와 유해발굴감식단 이등병이 발굴과정을 놓고 언쟁이 있었는데언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부터 기적이다, 대위가 이등병한테 이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고 그런 건데, 내가 당신 일을 망쳐!?라고 말한 사례도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위가 이등병한테 한 말이다.[63]
그리고 기본적으로 군단 발굴팀들은 이등병이나 일병선으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친개 상병들에게서 해방이다!"라는 마인드가 서서히 자리잡히기 때문에 매우 망나니로 돌변한다. 거의 다 차출된 아저씨들뿐이고 자신을 크게 터치할 수 있는 건 솔직히 말해서 간부들뿐인데 간부들은 정작 "자대에서 힘들게 생활하던 낮은 계급 녀석들이니까 웬만하면 터치는 하지 말자."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래에 있을수록 망나니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부대 저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타 부대의 간부들도 이래저래 원래 부대와는 다른 시선으로 겪어보기 때문에 상당히 만만하게 느껴버린다.[64]

다만 이 간부와의 관계가 정말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10명 정도 되는 작은 팀이고, 무엇보다도 파견나온 상황이라 선후임 관계가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간부와의 접촉이 정말 많다. 간부가 노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산을 탐사하러 간다 해놓고 실제로는 아제로스(!)를 탐사하는 경우도 왕왕있지만, 간부가 정말 성격이 더럽거나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엄청나게 마음고생 몸고생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거는 그저 운이 따르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문제는 그 인원들 중에서도 선임급 인원들이 잘 조율을 해준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어차피 아저씨이고, 지내던 부대의 풍습도 다르고, 어차피 계급도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크게 소용은 없다. 이럴땐 그냥 왕따 되지 않게 서로 잘 친하게 지내는 게 장땡이다.

또 여기에서 짬을 먹어 계급이 높아진 이등병들은 그냥 말 그대로 깡패가 된다. 타 부대 간부가 뭐라 하든 "배째라" 식으로 행동하는 게 다반사이다. 그야말로 군대 깡패가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예.

물론 그 낮은 계급에 있던 군단 발굴팀 장병들은 지정 발굴 기간이 끝나면 원래 부대로 복귀한다. 지옥의 시작. 그래서 웬만하면 전역 날짜 잘 맞춰서 가는 편이 좋다. 그렇게 전역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지만 그게 힘들다는 게 문제이다.

간혹가다 발굴이 1년 단위로 진행되는 경우는 이병, 일병선보다는 일말~물상병 위주로 뽑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병, 일병을 뽑아봤자 어차피 장기 파견 후 자대로 돌아가서 적응도 못 할 텐데,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일에 노하우가 쌓인 일말~물상병 라인을 뽑아서 발굴병으로 쓰고 바로 제대시켜버리겠다는 의도이다.[65] 문제는 이 경우에 하반기 발굴이 마무리되는 10월쯤이면 군단발굴팀 10여 명 중 막내가 꺾상이고 나머지는 다 병장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쯤이면 국방부 감식단원, 현지 발굴부대병들은 물론이고 현지 간부들도 어떻게 손 쓰기 뭐한 군대 깡패를 넘어서 군대 파천황이 탄생하는 현장을 볼 수 있다. [66]


[1] 2000년 육군본부 예하로 창설되었지만, 국방부 직할부대로 공식 창설된건 2007년이다.[2] 삽으로 사람 키만큼(생토층:토층의 밑부분)산을 "깎아"간다. 농담이 아니다. 물론, 이 일은 해당 부대의 지원 인력과 같이한다.[3] 여름 발굴 때는 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소변이 안 나온다. 다 땀으로 배출돼서.[4] 이 때문에 패딩이 보급되긴 했으나 발굴이 끝나고 보급이 되었다.[5] 15년 기준이지만 전역병과 신병으로 인한 업무차질 때문에 추가로 3~4명 더 뽑긴 한다.[6] 갓 들어온 신병을 포함해 5~6명인데 반드시 있어야 할 행정 업무(일반행정, 대외행정, 유해관리, 유품관리) 때문에 최소 4명이 필요하다.[7] 사진 관련 특기자는 11년도부터 감식병 지원이 불가능 하게 되었다.[8] 인류학, 사학, 유물보전 생물학 등의 전문인력, 대한민국 군무원이다.[9] 흙투성이 유해의 이물질 제거, 유품 감식, 감식 현황 관리 등이 있다. 발굴팀과 따로 파견을 나가기에 발굴지가 가까우면 같이 지내지만, 대게 임시감식소는 움직이지 않고, 발굴팀은 1개월 단위로 부대를 옮기기에 혼자서만 지내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파견된 부대에 있는 간부의 참견을 많이 받는다. 간혹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명령 체계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에 연락하면 친절하고 빠르게 간부 짬으로 눌러 해결해 주니 곧바로 연락하면 된다.[10] 1개의 발굴팀은 8~10명의 발굴병과 1명의 운전병이 소속되어있다. 14년부터 감식 운전병은 감식차량을 놓고 다시 서울로 가게되었다.더 외로워졌다.[11] 발굴병과 감식병은 다른 병과다. 누가 감식병 문서를 신설할 것이라면 참고할 것.[12] 감식소 촬영 당시 촬영된 감식대 위에 있던 1천 점이 넘는 수많은 유해는 금강에서 수중발굴 한 유해들인데, 감식병 한 명이 홀로 5개월에 걸쳐 3D 발굴 지도를 만들고 유해 조각 하나하나마다 감식해서 표찰을 붙였고, 간부들이 촬영 당시 자기들이 한 것 마냥 생색을 내었다. 참고로 그 병사는 진짜사나이 촬영 3일 전에 전역했다.[13] 셋방살이만 한 게 아니라 실제 그 부대로 편제가 들어갔기 때문에 소속은 그 부대고, 일 자체는 육본 휘하에서 하는 이중적인 부분이 많았다. 웃기지도 않은 예를 들자면 실제 사는 부대 마크와 육본 마크를 양쪽에 하나씩 두 개 달고 다녔다. 솔직히 지나가던 헌병도 신기해서 물어보더라.[14] 원래는 수료였지만 2017년 8월 1일부터 재학으로 바뀌었다.[15] 원래 2년 재학이었지만 2020년 이후부터는 1년 재학으로 하향 조정되었다.[16] 팔굽혀펴기, 윗몸 일으키기만 본다.[17] 다만 몸을 써야하는 발굴병인 만큼 신체등위에 이상이 있을 정도로 정형외과적인 질환이 있으면 지원을 자제할 필요가 있으며 설령 지원한다 하더라도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설령 붙더라도 몸이 상해서 나올 것이다. 이는 과거 서울에 위치한 부대의 특성상 발굴을 나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려는 목적으로 발굴이 어려운 질병을 숨기고 입대하여 발굴을 못하겠다고 드러누운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18] 평가에서 발굴 경력이 있으면 가산점을 받는다. 이것만 바라보고 반년간 발굴 경력 쌓고 온 사람들도 존재한다. 물론 이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게 어떤 달에는 발굴 경력이 있는 인원들을 떨어트린 경우도 있다![19] 사실 말이 교육이지 발굴기에 국유단 내에는 발굴병들을 교육시켜줄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발굴과 계원이 뽑아주는 뼈에 대한 자료를 받아혼자서 아둥바둥 외우다가 팀에 배속된 이후에나 되어서 제대로 교육을 받게 된다.[20] 이는 같은 학교 다른 과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고려대 안암 한국사학과와 고려대 안암 역사교육과는 같은 팀에 배속되지 않는다. 또한 본교와 분교조차도 같은 팀에 배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고려대 안암 한국사학과와 고려대 세종 고고미술사학과는 같은 팀에 배속되지 않는다.[21] 18년 기준 모 학교 출신이 대여섯 개 팀에 속해 있는 경우도.[22] 유해의 명칭, 갯수, 형태, 좌우구분까지 싹 외워야 한다.[23] 과거 21개월 기준[24] 감식병은 산을 오르지 않는다. 100여 명이 매일 같이 수습한 유해를 매일같이 혼자서 처리할 뿐.[25] 말년병장 휴가, 신병의 전입 등[26] 그렇다고 집에 가져가는 건 아니다. 나중에 다 반납하거나 후임한테 물려준다.[27]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국방부에서 따로 나오는 부식비를 받아 씀에도 불구하고 지원부대에서 나오는 부식도 남김없이 챙겨간다. 얄밉게 보일 만도 하다.[28] PX병 입장에서는 골아픈 것이, 똑같은 물건을 8+1개(운전병)씩 사가기 때문에 순식간에 PX 한 군데가 구멍이 뚫린다. 주말이면 PX에 사람이 붐비는 시점임을 감안하면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29]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병 때 선임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면 그 선임 전역하기 전까지는 편하게 지내기 힘들다.[30] 사실 아무리 병장이라도 수습 경험이 없으면 경험 많은 일병보다도 못하다. 애초에 수습 경험이 많으면 고문관이 아니겠지.[31] 평균적으로 발굴병 1명이 유해 하나를 발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반나절 정도, 병장급은 하루에 3~4구도 발굴하며 부분유해만 발굴할 경우 그보다 더 많이 발굴한다.[32] 실제로 발굴 현장에 가보면 사람 뼈 못지 않게 멧돼지의 뼈도 많이 나온다.[33] 한 번 전면발굴을 마친 지역은 다시 발굴하지 않으므로.[34] 극단적이긴 하지만 나무와 뼈를 구분하는 방법은 꺾어보는 것이다! 나무의 단면과 유해의 단면, 갈라지는 결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다. 유해를 손상시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그래도 나무로 착각하고 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진짜 못알아보겠으면 차악의 선택으로 유효하다. 복무중 유해를 나무라고 우기는 후임을 설득하기 위해 단한번 해봤다.[35] 대개 발굴을 위한 개인호 탐사와 발굴현장 감독, 유해발굴, 발굴자료정리 등 다양한 업무가 존재한다.[36] 물론 정 심각하면 분대장이나 팀장에게 보고 후 외진을 가도록 하자. 몸 다쳐봤자 너만 손해다.[37] 하루에 몇 명의 병력이 투입되어 몇 점의 유품과 몇 구의 유해를 수습, 식별하였는지를 작성한다.[38] 주간보고라고 부르는 팀도 있음[39] 주로 유해와 유품 식별기록[40] 실제로 전방지역은 4월에도 눈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41] 보통 05시30분~06시정도로 조기기상을 함[42] 이 때문에 파견부대의 취사병이 더 일찍 준비해야 된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43] 실제로 감식병과 발굴병이 같이 생활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발굴병들은 일찍 일어나서 밥 다먹고 출동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일어나는 감식병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한가득이다.[44] 모래 한알이 떨어져 있으면 촬영 후 사진을 보면 별처럼 빛나 보인다.[45] 물론 발굴기간에 전역하는 다른 팀의 병사는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46] 보통 군단 인사참모처에 유해발굴과가 있으며 비전투 업무인 한직인 만큼 대령 진급에 실패한 짬중령이 과장으로 보임된다. 그리고 과장 휘하에는 유해발굴통제장교(이쪽도 진급이 물건너간 짬소령이다.)와 각 팀의 팀장들(부사관)이 보임된다.[47] 심지어 검정고시만 붙고도 온 사람도 있었다![48] 2011년은 2작사와 3군이 같이 교육받았고, 1군지역은 따로 했다. 2012년은 1월 30일~2월 10일까지 '1기'가 제3야전군사령부 선봉교육대에서 교육받았다.[49] 예를 들어, 7군단 경우는 6박 7일 포상휴가를 받았다![50] 병사들이 포상에 눈이 멀어 새하얗게 불태우기도 하지만, 간부의 반강제적 연등이 다반사이다. 왜냐면 병들 성적=간부 실적이기 때문이다. 2013년 집체교육의 경우,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생활관 문을 밖에서 잠그고 공부를 시켰다!![51] 발굴현장에서 나온 유해를 정밀하게 그리는 그림. 발굴병이 직접 그려야 돼서 발굴병을 환장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지만, 2011년부터 기록이 전부 전산화 되면서 그릴 필요는 없어졌다. 오오 국방부 오오... 2011년 당시 상, 병장급의 발굴병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매우 거부감이 컸다. 기대치에 비해 막상 나온 건 황당할 정도로 조잡했기 때문이다.[52] 19년 현재는 다시 종이에 유해도를 그리고 있다.[53] 유해도 기록이 전산화 되면서 이제 국방부 인원이 한다.[54] 예를 들어 우천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한지로 유골을 덮고 흙으로 완전하게 덮은 뒤에 물골을 파놓고 표시를 한 뒤 우천이 끝나면 발굴한다.[55] 6.25 전쟁은 고지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지 주변의 개인호에 주로 유해가 많이 있다. 유해발굴도 이 개인호를 기준 삼는다.[56] 군필이면 알다시피 군대의 아침식사 메뉴 구성은 상당히 안 좋은 편이다..[57] 유해발굴을 담당하는 부대, 발굴 지역 인근의 부대로 정해지며, 1개 대대 정도가 아예 통째로 발굴에 투입된다.[58] 물론 유해를 많이 수습한다면 그만큼 삽질을 많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테랑 발굴병들은 공병 못지 않은 삽질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59] 유해를 찾아낸 지원부대 병사에게는 대대장 차원에서 포상휴가가 주어지기도 한다.[60] 실제로 완전유해를 매일 10구 이상씩 혼자서 받은 경우도 있다. 감식병은 꿀이 아니다[61] 현지 GOP 부대와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참 골치아파진다. 해당 사례의 경우 GOP 초소의 상급 부대와 발굴에 투입된 부대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상호 간 소통과 협조가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62] 이건 좀 오바고, 예전 발굴과장(국유단 초기부터 있던) 이야기인듯 한데, 워낙에 짬중령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사단장들을 봐도 별로 쩔쩔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짬중령이라도 중령은 중령. 그런데 중령이면 소위 임관으로부터 30년까지 채운 후 제대하게 되는데 소위 임관 후 27년 정도 되면 사단장이다. 그러니까 거의 전역 일보직전이라는 소리다. 짬은 몇년 더 많다 하더라도 엄연히 하급자였기 때문에 중령이 형식적으로라도 상급자인 사단장에게 경례했다. 사석에서는 사단장이 경례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63] 야전부대 간부들은 국방부라는 이름에 좀 약한 듯하다. 뭐 자기 휘하 병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대체로 국방부 소속이면 병이라도 일반 병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친절(?)하게 해준다. 그리고 국방부와 현지부대 간부들이 협의해 발굴을 진행한다고는 해도, 현장에서의 실무적인 진행은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의 지휘를 받아서 발굴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발굴경험 좀 되는 상병장급 병에게 좀 어리버리하다 싶은 중소대장급 지휘관들이 끌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더군다나 발굴 실적에 관련되는 일일, 주간, 월간 보고를 발굴병들이 작성한다. 게다가 국방부라는 소속 특성상, 또 유해발굴사업 특성상 군생활기간 동안 투스타는 물론이요 포스타도 심심치 않게 보기 때문에 웬만한 영관급 장교를 봐도 쫄지 않는다.소대장 정돈 밥이에요 헤헤[64] 실제로, 유해발굴병으로 파견나오면 주변에 터치하는 사람이 없어 확실히 편하긴 하다.산타는 거 빼고. 그러나, 다른부대에서 튀는행동을 보이거나 소위 '병신짓' 하고 다니면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는 물론, 이게 잘못 꼬이면 해당 대대, 자신이 속한 대대는 물론 여단(연대), 사단까지 올라가 위에서 개털리는 수가 있다. 따라서, 서로가 조심조심하면서 튀는 행동만 안 하면 된다.[65]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국유단 입장에서 보면 군단발굴병은 뭐 제대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고...'배째라' 정신만 강해져서 소수의 바람직한 경우를 제외하곤 딱히 의욕도 없고...그냥 삽셔틀+발굴부대 통제용.[66] 물론 그래봤자 아저씨 관계이므로 국방부 일병이 군단 병장에게 ~~씨 이것좀 해주세요 해도 별 말 없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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