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수 | 1939년 3월 24일 |
취역 | 1940년 1월 20일 |
퇴역 | 1945년 10월 5일 |
카게로급 구축함 | ||||||||||||||||||
카게로 | 시라누이 | 쿠로시오 | 오야시오 | 하야시오 | ||||||||||||||
나츠시오 | 하츠카제 | 유키카제 | 아마츠카제 | 토키츠카제 | ||||||||||||||
우라카제 | 이소카제 | 하마카제 | 타니카제 | 노와키 | ||||||||||||||
아라시 | 하기카제 | 마이카제 | 아키구모 |
1. 개요
[navertv(43931319)] |
[다큐] 소년들의 연합함대-행운의 구축함. 유키카제의 전쟁(2020) [5] |
일본군에서 가장 유명한 구축함으로, 불침함과 수훈함의 영광을 동시에 누린 함선이다.[8]
2. 제원
배수량 | 2,490t |
전장 | 118.5m |
선폭 | 10.8 m |
흘수선 | 3.8 m |
속도 | 35 knt |
승무원 | 240명 |
무장 | 89식 12.7cm 40구경 연장포 3기 96식 25mm 대공기관포 24정 95식 13mm 대공기관총 4정 92식 4연장 61cm 어뢰발사관 2기(93식 어뢰 16발) 2식/3식 폭뢰 36발 |
중화민국군 단양[9] | *1948 ~ 1956년 [10] 89식 12.7cm/40 연장포 1기(전방) 98식 10cm/65 연장포 2기(후방) 96식 25mm 대공기관포 8문 * 1956년 이후 Mark 12 5인치/38 연장포 3기[11] 3인치/50 단장포 2기 보포스 40mm 포 10문 |
3. 함생
3.1. 제2차 세계 대전
전쟁이 일어난 후, 유키카제는 남방작전에 참가하여 필리핀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공격에 참가한다. 1942년 2월에는 제2수뢰전대의 일원으로 자바해 해전에 참가했지만 어뢰 한 방도 맞추지 못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낸다. 그래도 해전 자체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연합군측 선원 40여 명을 구조했다. 해전에 대한 내용은 묘코급 중순양함 항목 참조.3월경 자바에서는 미국 잠수함 USS 퍼치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퍼치는 이후 스스로 모든 해치를 열고서 자침.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제2함대 소속으로 참가했지만, 별다른 전과는 거두지 못하고 철수한다. 이후에는 제8함대 기함 초카이의 호위 임무를 맡았고, 미드웨이에서 대파된 중순양함 모가미의 호위를 맡아 트럭에 도착한 후, 아카시 공작함의 호위를 맡아 구레로 돌아간다. 같은 시기에 벌어진 게 일본군의 대승리인 사보섬 해전(1번 항목).
트럭으로 돌아온 유키카제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공모함 쇼카쿠의 호위를 맡지만 쇼카쿠는 대파된다. 이후에는 즈이카쿠의 호위임무를 맡아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한다.
1942년 11월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에서는 첫 번째 야간전에 참가했다. 구축함 유다치의 돌격으로 난장판이 된 이 해전에서 미군의 방공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공동전과)시켰다고 하나, 미군의 피해 집계와는 다르다.[12] 게다가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는 미군 중순양함과의 전투에서 대파되었고, 유키카제는 다른 구축함들과 함께 히에이 호위를 맡게 된다. 아베 제독은 대파된 히에이 대신 유키카제를 임시 기함으로 삼고 후퇴를 서두르지만,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히에이는 파괴된다. 손상을 입은 유키카제는 구레로 돌아갔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함 워싱턴과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게 패배한다.
1943년 2월, 유키카제는 과달카날 철수작전에 참가했고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943년 3월, 유키카제는 비스마르크해 해전에 참가한다. 지휘관은 기무라 마사토미였고 호위용 제로센과 하야부사 100여대가 동원되었지만, 미군이 공습에 동원한 비행기는 338기였으므로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수송함 8척과 구축함 4척이 격침되고, 구축함 4척만이 생환했으며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도 중상을 입었다. 한편 유키카제는 무사히 생환했고, 이후 수송임무에 종사하다가 1943년 7월 6일에서 9일까지 제8함대의 임시 기함을 맡기도 했다.
1943년 7월에는 콜롬방가라 해전에 참가했고, 일본군은 제2수뢰전대 기함(겸 함대 기함)인 경순양함 진츠가 탱커로 나서서 미군의 포격을 전부 얻어맞는 동안 다른 구축함들과 함께 미군을 공격하여 구축함 1척 격침, 경순양함 3척 대파의 전과를 올린다. 유키카제는 이 전투에서 미군 순양함의 주포사격을 한 발 얻어맞았지만 불발탄이었다고. 다만 유키카제는 전투 이후 순양함 3척을 격침했다고 보고했는데, 이건 산소어뢰의 위력을 과신했기에 벌어진 실수였다. [13] 이후에는 다시 수송 임무에 종사.
1943년 11월 2일에는 라바울에 입항할 예정이었지만, 공습을 예견하고 항구 밖에 정박했기에 무사했다.
1944년 2월, 16구축대가 해체되고 유키카제는 17구축대의 5번함이 된다. 16구축대의 소속 함선이 유키카제 하나밖에 안 남은 탓인데,[14] 17구축대 소속 구축함 타니카제 승조원들은 "유키카제가 16구축대를 잡아먹었다"며 불쾌감을 표시했고, 타니카제는 이후 예감대로 구축함 킬러 가토급 잠수함 USS 하더(Harder)에게 격침당한다.
1944년 5월, 암초에 부딪히는 사고로 인해 스크류 부분에 파손이 생기고 최대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이 탓에 주력함대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후방으로 빠져 보급함대의 호위를 맡게된다. 호위 도중 미군의 공습을 받았는데,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유키카제는 미군 함재기에 탐조등을 직접 비춰서 3기를 추락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호위대상인 유조선 2척은 결국 행동불능이 되어 처분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주력함대인 일명 '구리다 함대' 소속으로 참가했고, 유키카제는 사마르 해전에서 동료 구축함들과 함께 미군을 향해 20발 이상의 산소어뢰를 날린다. 이후 유키카제의 보고는 '정규항모 1척 격침, 신형 항모 1척 대화재, 구축함 2척 격파'였지만 실제 전과는 제로였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전함과 순양함들은 미군의 집중 공격을 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15척의 구축함들은 상대적으로 공격을 덜 당한 덕분에 2척만이 격침되었다. 유키카제의 피해는 제로였지만, 해전 자체는 결사적으로 항전한 미군의 승리.
사마르 해전 종료 후, 유키카제는 미군의 공습으로 격침된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를 구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결국 구축함 노와키가 구조를 맡게 되었고, 노와키는 이 구조활동 도중 미군 순양함에게 발견되어 격침되었다. 유키카제는 그 대신 모가미급 중순양함 스즈야의 승조원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미 원대 복귀 명령이 내려져있던 터라 자매함들과 합류하여 떠나게 된다.[15]
레이테 만 해전의 참패 이후, 17구축대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함대를 호위했지만 17구축대 기함인 구축함 우라카제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는 미군 발라오급 잠수함 USS 씨 라이언(Sea Lion)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유키카제는 야마토와 나가토를 호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후 17구축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이었던 시나노의 호위를 맡게 된다. 그러나 레이테 만 해전으로 손상을 입은 채 호위임무에 나선 결과는 발라오급 잠수함 USS 아쳐피시의 공격을 받아 시나노 격침.[16]
1944년 12월, 유키카제는 히 87선단이라는 수송부대의 호위임무를 맡았다. 편성은 항공모함 류호, 17구축대, 그리고 '구레의 유키카제, 사세보의 시구레'라고 불릴 정도의 행운함으로 유명한 구축함 시구레였다. 그러나 유키카제는 기관 고장으로 불참하게 되고, 이 임무에서 시구레는 격침되고 만다.
1945년 3월 19일에 미군이 구레를 공습했을 때에는 구레에서 대공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4월, 유키카제는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가 주축이 된 오키나와 특공 작전에서 생환했다. 제2수뢰전대 소속으로 참가하여 야마토에서 후방으로 1.2km 떨어진 곳에 편성된 덕분에 무사히 귀환. 야마토의 전방으로 공격이 집중된 탓에 이 전투에서 야마토의 후방으로 배치된 함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라서 최후미에 있던 아키즈키급 2척 중 스즈츠키의 경우는 거의 침몰 직전까지 망가지면서 선수가 박살나는 바람에 후진으로 간신히 입항했다. 가장 피해가 적었던 건 야마토의 양 후방 대각선쪽에 각각 위치해있던 유키카제와 하츠시모.
야마토가 최후를 맞은 이 전투에서 유키카제에게도 미군의 어뢰가 날아왔지만, 미군은 야마토를 잡기 위해 어뢰의 심도를 깊게 잡았으므로 어뢰는 유키카제의 아래로 통과했다. 그 외의 피해는 불발탄 1발을 맞은 것밖에 없다. 미군기가 투하한 폭탄이 식량창고의 곡식 푸대에 처박히는 바람에 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유키카제는 3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참고로 이 보노미사키 해전 한정으로 가장 운이 좋았던 배는 아래 항목에서 서술되는 하츠시모로 이쪽은 전사자수 0명. 그러나 야마토가 침몰했으므로, 호위 임무 자체는 실패했다.
1945년 4월 20일, 제2수뢰전대가 해체된다. 17구축대도 유키카제 하나만 남았으므로, 또다른 행운함인 하츠시모가 17구축대에 소속되고서 5월에 사세보에서 마이즈루로 이동했지만 그러나 6월이 되자 유키카제가 있는 마이즈루항에도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고, 유키카제와 하즈시모는 마이즈루항을 떠나 미아즈만으로 피난한다.
1945년 7월 30일, 유키카제는 미아즈만 (마이즈루항 서쪽의 만)에서 또 공습을 당했지만 유키카제는 살아남는다. 이때 회피기동 중에 기뢰에 접촉했는데, 이 기뢰가 여러번 접촉하면 폭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뒤따라 오던 하츠시모가 폭침한다.[17] 이것이 유키카제 최후의 전투였고, 이후 종전을 맞이했다.
자세한 내용은 유키카제 일본어 위키를 참고하자.[18]
3.2. 중화민국 구축함 단양
전후에 태평양의 각 섬에 흩어져 있던 미귀환병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임무에 종사하였다. 그 당시 '이 배는 어디 후방에서 편하게 놀고 먹었길래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함?'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모양이다.[19]이후 중화민국에 배상함으로 넘겨졌다.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에 더해, 유키카제에 자부심과 애정이 가득했던 구일본군의 승조원들은 보일러실부터 함교에 이르기까지 배 전체를 그야말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짝반짝하게 미싱하고 완벽하게 정비하여 인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종전 후 복원선으로 사용되다가 중화민국에 인도되었기 때문에 모든 포탑과 무장이 철거된 상태였다.
중화민국 해군에서는 "단양"이라는 함명으로 개명하고 기함이 되었다. 단양은 한자표기로는 丹陽, 대한민국 충청북도의 단양과 동일하다.[20] 이후 동급의 중화민국 구축함은 '양(陽)자 급'이 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키카제의 옛 승조원들은 새 이름이 카게로(陽炎)급의 한 글자를 따왔다는 데에서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대만에서도 유키카제는 활약하는데, 인도 직후인 1948~49년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대만으로 후퇴하는 국민당군을 호위했고,[21] 10여 년 후인 1958년 9월 진먼 포격전, 요라만 해전에도 신양(信陽)함[22]과 함께 어뢰정의 뇌격에 침몰한 타강함을 구출하기도 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58년 9월엔 어뢰정 한 척을 격침시키고 한 척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물론 대만에서도 생채기 하나 안 난 강운은 여전했다. 국공내전 말기 해군 주력함의 상당수가 반란을 일으켜 공산당에 투항하여[23] 유키카제는 한동안 대만 해군의 최일선에서 뛰게 된다.
퇴역 기념식.
유키카제가 완전히 시대에 뒤처진 함선이 되면서, 1966년에 퇴역후 훈련함으로 있다가 일본의 옛 승조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환을 요청하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일본-대만의 국교관계가 좋았던 터라 흔쾌히 성사가 되었으나 강운도 여기까지였는지, 1969년 태풍으로 심하게 침수되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해체(스크랩)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온 타륜과 닻은 일본에 반환되어,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의 구 해군병학교 교육참고관에 전시되어 있다. 스크류는 중화민국 해군군관학교에 전시 중이다.
4. 평가
4.1. 불침함
미국의 회색유령과 함께 거론되곤 하는 2차대전의 불침함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8번의 해전을 겪으면서도 결국 가라앉지 않은 함이다. 단순히 가라앉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종전 때까지 사상자도 거의 안 나왔다. 260명의 승조원 중 전사자는 단 2명 뿐.이러한 배경에는 취역 초기에 신예함으로서 일본 최정예 구축함대였던 제2수뢰전대에서 빡센 강도로 훈련을 받았던 점. 여러 전장을 거치고 그때마다 살아남으며 선원들의 경험치가 계속해서 쌓여갔다는 점, 구축함이라서 공격 우선 순위가 최하위라는 점 등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유키카제와 마찬가지로 역경을 거쳐왔음에도 마지막에 한 끗발이 모자라서 결국 가라앉아버린 함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결국 가장 큰 요인은 '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후반부부터 종전까지 유키카제의 함장을 맡았던 테라우치 마사미치는 유키카제의 생존 비결에 대해 "선원들이 우수한 탓도 있지만, 역시 운빨이야"라고 대답. 덕분에 불침함이라는 별명과 함께 '행운함'이라는 별명도 붙어있다.
그러나 유키카제를 보는 시선이 언제나 호의적이진 않았다. 유키카제가 17구축대에 배속되었을 때, 다른 구축함 승무원들은 "유키카제가 다른 배의 운을 빨아먹는다", "유키카제가 (전의 소속부대였던) 16구축대를 잡아먹었다"며 싫어했고, 이후 17구축대 구축함들도 줄줄이 격침된다. 첫 번째로 격침된 배는 유키카제가 동료함의 운을 빨아먹는다는 사신설을 퍼뜨린 타니카제. 거기에다 유키카제의 고국인 일본 제국과 훗날 배상함으로 넘겨졌던 중화민국은 전부 전쟁에서 패배 했던지라 유키카제의 운은 나라의 운마저도 빼앗아 먹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함장 데라우치 소좌는 죽음을 각오하는 상징인 국화무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배를 지휘한 열혈 지휘관이기도 했다. 거기에 유키카제의 함내 군기는 군기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가혹행위로 점철된 구 일본군의 다른 병종들에 비하면 매우 자유로웠던 수준으로, 게다를 질질 끌고 다니며 마작을 즐기기도 하는등 매우 자유로웠다고 한다. 다만 야마토의 오키나와 특공작전에서 야마토가 격침되고 나자 '어떻게 하지? 일단 생존자 구조는 포기하고 우리들끼리만이라도 오키나와로 가볼까?'라고 제안하여 다른 함장들을 빡치게 만들었다는 듯하다.
4.2. 유키카제의 한계
유키카제의 강운과 함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구축함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24]물론 구축함이 전세를 뒤집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다 함대에 맞선 태피 3의 구축함 존스턴(DD-557), 호엘(DD-533), 히어만(DD-532)과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는 패배를 승리로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히어만은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함 야마토를 전장에서 쫓아냈고, 나가토도 같이 쫓아냈으며, 구리다 함대의 맹공으로 호엘과 존스턴, 사무엘 B. 로버츠가 격침되는 와중에도 끝내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유키카제에게는 이런 전공은 없다. 그리고 해당 사례는 구축함들의 용맹 뿐 아니라 태피 1, 2에서 보낸 함재기를 포함해 총합 400여대의 함재기가 화력 지원을 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려한 전공도 그리 많지 않았다.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승리에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그 해전에서 가장 공로가 큰 건 탱커 역할을 성공시켜 일본군 경순양함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한 제2수뢰전대 기함 진츠이고, 대규모의 해전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자바해 해전에선 어뢰 명중률 0%였고, 과달카날 해전에서도 유다치의 발광 탓이라곤 해도 히에이를 지키지 못했고, 사마르 해전에서도 어뢰 명중률은 0%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졌음을 감안해야겠지만, 일본군이 잘 나갈 때 벌어졌던 자바 해전에서도 그리 잘나가던 건 아니었다.
결국 유키카제는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어느정도 전공도 챙겼으며, 마지막까지 상처없이 살아남음으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만 구축함의 한계로 전쟁의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일본군의 주력 항공모함으로서 혈투를 벌인 쇼카쿠급 항공모함들이 유키카제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나마 유키카제보다 전공이 뒤떨어지는 배들이 일본에 수두룩하다는 점이 위안점일지도 모른다.[25]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불침함의 명성 덕에 무수한 일본 서브컬쳐 함대물에 영향을 끼쳤다.유키카제를 주연으로 한 영화는 1964년작인 구축함 유키카제가 있다.
오마쥬의 대표적인 예라면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소요카제.
은하영웅전설 팬들은 불침함 율리시스도 오마주의 범주에 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율리시스는 표준 우주전함이고, 작중에서도 멋진 활약을 보이기보다는 '악운함'으로서 활약을 펼치는 등 유키카제와 특별한 접점은 없으므로 범주에 넣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도 은영전 후반에는 엘 파실 혁명군과 이제르론 혁명군의 기함이 되어 최후반부까지 활약한다.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 제1작 우주전함 야마토에서는 M-21881식 유키카제형 우주돌격구축함의 네임쉽으로 등장하였고, 최신작 우주전함 야마토 2199에서는 이소카제형 돌격 우주구축함 3번함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최후에 침몰한다. 또한 실사판에선 초반에 코다이 마모루의 함으로 나오는데, 후유즈키 등 지구의 잔존함대와 함께 오키타 쥬조의 기함만 제외하고 전부 격침당한다.
함대 컬렉션에 등장하는 유키카제의 의인화 캐릭터는 유키카제(함대 컬렉션) 항목 참고.
전함소녀에서는 자기 동료들의 운을 낮추고 자신의 회피를 높이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 윌리엄 D. 포터와 조합하면. . . 유키카제(전함소녀) 참고.
벽람항로에서는 SSR구축함으로 등장. 전투당 1번이지만 최초로 후열함을 회복시키는 스킬과, 일정확율로 자신의 피격 데미지를 1로 만드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 유키카제(벽람항로)참고
강철소녀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 개장하면 이름이 단양으로 변경되고 소속도 중화민국이 된다. 유키카제(강철소녀) 항목 참고.
월드 오브 워쉽에서는 벽람항로콜라보 해서 8티어 배정 받았다.
함선은 아니지만 전투요정 유키카제에서 주인공의 콜사인으로 쓰인다. 정보를 가지고 귀환해야 하는 정찰기의 임무상 아군이 전멸해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파일럿들에게 사신이라 불리며 경원시된다.
Naval Creed:Warships에서도 5티어 1차 프리미엄 구축함으로 등장한다, 끝까지 살아남은 운을 고증해 수리반을 준다.
어비스 호라이즌에도 등장했다.[26]
세계정복자 4에서 네임드쉽 해군함선으로 냉전 도전모드와 함께 구축함으로 추가되었으며 역사대로 대만으로 플레이시 단양 한대가 항구에 있다. 단 설명에 유키카즈급으로 나오다
워쉽 플릿 커맨드에서 5성 구축함으로 등장하는데 불침함의 유명세인지 잘 안 맞는다. 후방 포탑 1기가 제거되고 대공포가 증설된 대전 말기의 고증으로 등장하며 자세히 관찰하면 유키카제의 이름이 현측과 선미에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6. 관련 문서
[1] 카게로급 구축함 8번함. 함명은 유키카제(雪風).[2] 세토 내해에 위치한 일본 군항. 현재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의 모항.[3] 나가사키의 일본 군항. 현재 해상자위대 제2호위대군의 모항.[4] 시구레는 결국 전쟁 중 잠수함에게 격침된다.[5] 일본 NHK BS1에서 2020년 8월 23일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이다.[6] 일본은 국제조약[27]을 회피하기 위해 14세부터 지원 가능한 해군 특별 소년병 제도를 만든다[7] 일본 NHK BS1에서 만든 다큐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필터링이 필요하다.[8] 아이러니하게도 별명은 '사신'으로, 유키카제와 동행한 일본군 배들 중 상당수가 침몰했기에 '동료함의 행운을 빨아먹는다'는 의미로 붙었다.[9] 로마자 표기인 Tan yang을 보고 '탄양'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는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른 표기이고 한어병음으로는 Dānyáng으로 표기된다.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도 단양이 맞다.[10] 89식, 98식 포는 일본에서 만든 정식 터렛이 아니라 임시 터렛을 사용했다. 이 중에서 98식 10cm/65 연장포는 배에서 쓰던 물건이 아닌 대만 가오슝의 방공포대에 배치되어 있던 물건을 가져다가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11] 전방에 1기, 후방에 2기[12] 일본 위키를 보면 미군측 기록과는 맞지 않지만 전과로 인정한다고 써있다.[13] 산소어뢰의 위력 자체는 뛰어나며, 제대로 맞추면 순양함 정도는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고 이는 사보섬 해전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미군도 사보섬 해전 이후 데미지 컨트롤 능력을 죽어라 강화했으므로 1942년 11월 30일에 벌어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는 산소어뢰에 맞고도 순양함 4척 중 3척이 살아남았다.[14] 엄밀히 따지자면 유키카제 외의 3척 중 2척만 격침되고 아마츠카제는 생존했으나 말 그대로 함선이 반토막 나버리는 피해를 입었다. 사족이지만 결국 아마츠카제는 마지막까지 원래 모습으로 수리되지 못한 채 일본 본토 귀환 도중 격침당하지만 그 시점이 야마토 특공 직후였기 때문에 카게로급 중에서는 그 이소카제나 하마카제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셈이다.[15] 스즈야의 승조원들은 이후 구축함 오키나미가 구조하였다.[16] 뭐, 이건 손상 때문은 아니고 소나로 잠수함을 탐지했지만 근처에 다른 잠수함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요격을 지시하지 않은 탓이다.[17] 하츠시모도 야마토 특공 작전에서 단 한 발의 피탄도 당하지 않은 어지간한 강운함이었지만 결국 유키카제에는 당해내지 못했다.[18] 위에 서술된 것처럼 미군측과의 기록과 맞지않는 내용도 있기에 교차검증은 필수이다.[19] 참고로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작가인 미즈키 시게루 역시 유키카제로 귀국한 사람들 중 하나다.[20] 장쑤성 단양현의 이름을 따왔다. 지금은 장쑤성 전장시에 위치한 현급시이다.[21] 당시에는 비무장 상태로 인도되었기 때문에 재무장 조치가 필요했는데, 구할 수 있는 장비가 제한되어 10센티 연장고각포, 12.7센티 연장고각포, 25밀리 단장기총 등 일본제 장비를 구할 수 있는 대로 장착했다. 각 포좌나 포탑도 원래 규격에 맞는 정규 부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형태의 임시 부품들로 구성되었다.[22] 일본명 하츠우메(初梅). 마츠(松) 급 구축함의 개량 겸 양산난이도 하락형인 타치바나(橘) 급 14번함으로 일본 해군 최후의 구축함이다. 1945년 6월에야 겨우 완성되었기 때문에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고, 바로 중화민국에 배상함으로 넘겨졌다.[23] 아레투사급 경순양함 오로라도 충칭이라는 이름으로 운용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붙어버렸다. 물론 얼마 안 가 추격에 나선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지만.[24] 구축함이라는 함종 자체가 본질적으로 함대의 보조역이고, 혼자서는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뜻이다.[25] 당장 항공모함만 봐도, 유키카제보다 전과가 뒤떨어지는 배는 얼마든지 있다. 첫 번째 대규모 해전에서 격침된 히요와 다이호, 출격도 못하고 침몰한 시나노, 수송선으로만 쓰인 운류급 항공모함 등이 그 예이다. 다른 함정도 추가하자면 한심한 운용의 종결자였던 야마토 자매와 트롤링의 대가 아라시.[26] 2020년 10월에 종료된 국내서버에서 국내섭 출시부터 1주년인 2020년 5월전까지 아이콘을 맡았었다. 국내섭 1주년부터 섭종까지의 아이콘은 세종대왕급 구축함 세종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