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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E. 밀러

제44대 공화당 전국위원장
윌리엄 에드워드 밀러
William Edward Miller
파일:윌리엄E.밀러.jpg
<colbgcolor=#e81018> 출생 1914년 3월 22일
미국 뉴욕주 록포트
사망 1983년 6월 24일 (향년 69세)
미국 뉴욕주 버펄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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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학력 노터데임 대학교 (B.A.)
유니언 대학교 (L.L.B.)
종교 천주교
신체 170cm
재임기간 공화당 제44대 전국위원장
1961년 6월 2일 ~ 1964년 6월 15일
연방하원의원[1]
1951년 1월 3일 ~ 1965년 1월 3일
서명 파일:윌리엄 E. 밀러서명.jpg
군사 경력
복무 미국 육군
1942년 ~ 1946년
최종 계급 중위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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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법조인,정치인,1964년 미국 대선 공화당 미국 부통령 후보

2. 생애

업스테이트 뉴욕의 록포트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노터데임 대학교 학사를 딴 뒤 올버니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사를 딴다. 변호사로 일하다 2차 대전 중에는 미 육군에 입대한다. 종전 뒤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검사보로 임명된다.

나이아가라 카운티 검사보를 지내던 밀러는 뉴욕주지사 토머스 듀이에 의해 지방검사에 임명된다. 검사 임기 중 반노조로 명성을 얻어 공화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출마한 밀러는 쉽게 당선된다.

북동부 뉴욕주 출신이지만 록펠러 공화당과는 전혀 달랐던 그는 하원에서 공화당 보수파로 활동한다. 남부전략 지지 및 지원[2], 하원 소수당 대표로 찰스 A. 할렉(Charles A. Halleck)을 지지해 당선시킨 행보가 대표적이다. 그 보답으로 1960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를 주도하게 된 밀러는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하원에서 22석을 가져오는 성과를 낸다. 그는 당연히 민주당 대통령들에게도 신랄한 악평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해리 S. 트루먼은 "청부업자", 추진하던 개혁이 의회에서 막힌 직후의 존 F. 케네디는 "울보 연기"를 한다고 비난했다. 다만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배리 골드워터는 티켓의 지역적, 종교적 균형을 위해 당시 공화당 전국위원장이던 북동부 가톨릭 신자[3]인 밀러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한다. 배리 골드워터는 그의 지명 이유가 존슨을 가장 화나게 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농담했고, 대선 중에도 존슨의 부패와 스캔들을 열심히 물어뜯었다. 그러나 밀러는 골드워터보다 덜 보수적이었을 뿐, 중도온건파와 록펠러 공화당원들에게 어떠한 호소도 되지 않았고, 골드워터/밀러 티켓은 딥사우스와 애리조나만 이기며 선거에서 참패한다.[4]

선거 대패 이후 밀러는 정계를 은퇴하고 법조인으로 복귀한다. 1983년 사망하자 장례식에는 배리 골드워터를 비롯한 여러 정치인들이 애도를 위해 참석하였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48 나이아가라 카운티 지방검사 선거 나이아가라 카운티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당선 (1위) 초선
195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뉴욕 42구

75,377 (58.57%) 초선
195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뉴욕 40구 102,565 (59.64%) 재선
195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77,016 (60.92%) 3선
195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17,051 (64.34%) 4선
195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90,066 (60.80%) 5선
196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4,752 (53.62%) 6선
196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72,706 (52.04%) 7선
1964 미국 부통령 선거[5] 미합중국 27,175,754 (38.47%, 52명) 낙선 (2위)

4. 같이 보기


[1] 뉴욕 42구(1951-1953)
뉴욕 40구(1953-1965)
[2] 공화당은 1962년 중간선거에서 케네디의 인기에 고전하면서도, 남부에서는 득표를 늘렸다.앨라배마에서는 현역 상원의원에게 1.8%p로 겨우 졌다.[3] 흔히 미국의 종교적 보수주의자라고하면 개신교도를 생각하겠지만, 미국 북동부 공화당, 특히나 뉴욕 공화당에서는 얘기가 좀 달랐다. 여기는 베트남 전쟁 반전파로 유명한찰스 구델 상원의원과 공화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찰스 마티아스 상원의원을 필두로 한 개신교도들이 대체적으로 진보•온건•중도 성향이었고, 반면 밀러를 비롯해 후일 뉴욕시장이 되는 루디 줄리아니등(물론 줄리아니도 초기에는 타 공화당원들에 비해 온건축에 속했다) 가톨릭이 보수 성향이었다. 애시당초 미국 가톨릭 자체가 낙태같은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등 보수적 면모가 일부 존재하기도 하고. 하여간 재비츠가 낙선하고 마티아스가 은퇴한뒤 북동부의 소위 WASP 온건파들은 쇠퇴했고, 이탈리아계•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게되었다.[4] 밀러의 출신인 뉴욕주에서는 린든 B. 존슨이 모든 카운티에서 이기며 압승한다. 그 외에도 뉴잉글랜드에서 골드워터는 단 1개의 카운티에서만 승리한다.[5] 대통령 후보는 배리 골드워터[6] 뉴욕주 연방하원의원,낙선한 공화당 부통령 후보라는 점이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