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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도시 이오아니나 Ιωάννινα/Γιάννενα loannina | |||||
| <colbgcolor=#004C98> 국가 | | ||||
| 행정구역 | 이피로스주 이오아니나 현 | ||||
| 면적 | 403.322 | ||||
| 인구 | 113,978명 (2021년 기준) |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
| 시간대 | UTC+02:00 (EET) | ||||
1. 개요
구도심의 전경
내성 일대
그리스어 Ιωάννινα/Γιάννενα
터키어 Yanya
영어 Ioannina
그리스 서북부의 이피로스(에페이로스)주의 도시이자 주도이며, 이오아니나 현[1]의 현청 소재지이다. 이오안니나, 요안니나, 요아니나 등으로도 표기된다. 다만 현지인들은 얀니아 (Γιάννινα) 혹은 얀네나 (Γιάννενα)로 부른다. 핀도스 산맥 사이의 분지에 자리하며, 팜보티다 호수의 서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1만명이다.
1358년부터 1416년까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시절 수도가 되어 번영했고, 1430년부터 시작된 '야니아'(Jannia)라 불린 오스만 제국기에는 18-19세기 알리 파샤가 사실상 자립한 야니아 파샤령의 중심지로써 번영을 이어갔다. 호수로 돌출된 반도에 형성된 구도심은 외성과 내성의 2중 성벽과 페티예 모스크, 아슬란 파샤 모스크 등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 시기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다.[2]
2. 역사
고대에는 몰로시아 인이 거주했으나 마을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벽이 둘러지는 등 도시화가 되었으나 이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동로마 제국기인 879년에야 주교 자카리아스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참석으로 이오아니나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의 수도원 자리에 도시가 세워져 '요안니스의 자리'란 뜻인 아기오안니나 (Agioannina)가 바뀐 형태, 벨리사리우스의 딸의 이름이란 설 등이 있다. 9-10세기 동안 나프팍토스 대주교구에 속해있던 이오아니나 주교구는 1020년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정복 후 오흐리드 대주교구로 이관되었다. 10세기에 처음 세워진 성벽은 11세기 말에 보강되었고, 1082년 보에몽이 함락해 잠깐 영유하며 내성의 남부를 증축했다. 12세기 들어 도시는 요아니나 주의 치소가 되었고, 1204년 4차 십자군 후 베네치아 공화국령으로 결정되었으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접수해 남쪽 아르타에 기반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령이 되었다.
2.1.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외성의 시계탑 일대
미하일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등지의 난민들을 수용하며 시가지를 확장, 성벽을 신축했다. 당시 나프팍토스 대주교는 이오아니나를 '구원의 방주'라 묘사했다. 기존 주민들은 1232년에 이주민들을 내쫓으려 했지만, 결국 둘은 동화되었고 도시는 갈 수록 정치 및 경제적으로 중요성을 얻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도 정착했다.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 후 아르타를 비롯한 이피로스 대부분 지역이 니케아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도 이오아니나는 포위를 견뎠고,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구원했다. 1280년대에는 테살리아(1268년~1318년)의 요안니스 1세와 동로마 제국군이 연달아 도시를 포위했으나 실패했다.
1318년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암살로 이피로스 황실의 직계가 끊기자 이오아니나는 암살자인 조카 니콜로 오르시니를 인정하지 않으며 동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점령, 대주교구로 지정하고 주민들에게 여러 특권과 자치 및 면제권을 부여하는 금인칙서를 하사했다. 따라서 1338-39년 이피로스 반란 시에도 이오아니나는 동로마에 충성을 유지했다. 동로마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여 1347년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이 점령했고, 그의 사후 동생 시메온 우로시가 계승했으나 1356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점령해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지배가 36년만에 복구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아르타의 도시 규모를 뛰어넘은 이오나니나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1359년 니키포로스 2세가 알바니아 부족들과 싸우다 전사하자 이피로스 상당 부분이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바게네티아 일대의 그리스 인들이 이오아니나로 피신해왔다. 혼란을 틈타 이오아니나를 탈환한 시메온 우로시는 테살리아에 머물렀고, 사위 토마 프렐류보비치 (토마스 2세)를 이피로스 군주에 봉했다. 토마스 2세는 1367년 알바니아 인들에게 상실한 아르타 대신 이오아니나를 수도로 하여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이어갔고, 싸늘한 여론에도 1379년 알바니아계 아르타 전제군주국의 기습을 격퇴했다. 이 승리에 대해 현지인들은 수호 성인 미카엘의 가호가 있었다고 여겼다.
1384년 토마스 2세의 암살 후 주민들은 그의 라이벌이던 에사우 부온델몬티를 추대했다. 에사우는 추방되었던 대주교 마테오를 복직시키고 다른 인사들의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었다. 또한 밀과 과일 등 여러 생필품에 부과된 세금을 폐지하여 민심을 얻었다. 1386년 에사우는 동로마에 명목상 복속했고, 이에 동로마 사절이 이오아니나에 당도해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했다. 1389년 아르타 전제군주국의 진 부아 슈파타가 이오아니나를 포위하자 에사우는 오스만 제국의 구원병을 얻어 격퇴했고, 1396년 그는 진 부아 슈파타의 딸 이리니와 결혼해 양국의 화목을 도모했다.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에사우가 1411년 사망하자 주민들은 케팔로니아 & 자킨토스 백작이자 1407년 아카르나니아를 접수한 카를로 1세 토코를 추대했다.
2.1.1. 시난 파샤의 서약
| 시난 파샤가 주민들에게 안전과 자치를 보장한 서약문의 필사본 |
카를로 1세는 1416년 아르타를 점령해 이피로스를 통합했고, 동로마 및 오스만의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1429년 그가 사망한 후 어린 아들 카를로 2세가 계승한 것에 대해 장성한 서자 에르콜레가 반발하며 오스만 군대를 불러들였다. 알바니아 인이 다수였던 이피로스 군대는 1430년, 마침 테살로니카를 점령하고 다가온 오스만 군에 저항하지 않았다. 이오아니나는 그해 10월 9일, 오스만 지휘관 시난 파샤가 안전과 자치를 서약하자 항복했다. 이후 도시는 483년간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2.2. 오스만 제국
세례 요한 성당을 개조한 아슬란 파샤 모스크. 현재는 인류학 박물관이다.
17세기 무렵 성밖에 세워진 벨리 파샤 모스크.
오스만 시기 이오아니나는 '야니아' 혹은 '자니아'로 표기되었고, 야니아 산작의 치소였다. 15-16세기 동안 도시는 안정을 누렸고, 성내에 성당 25개와 수도원 7개가 있는 반면 모스크는 성밖에만 세워지는 등 종교적 존중이 이루어졌다. 1564년 기준 이오안니나에는 기독교도 1250 가구와 무슬림 50 가구가 거주했다. 그러던 1611년 9월, 전 라리사 대주교 디오니시오스가 테스프로티아 해안의 70여 마을에서 8백여 농민과 목동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켜 이오아니나로 진격했다. 봉기군은 현지 총독 오스만 파샤의 저택을 불태웠고, 대주교 대리가 지지를 표했다. 겨우 피신한 오스만 파샤는 기병을 포함한 수비대와 그리스인 유력자들의 도움으로 다음날 반격하여 봉기군을 격파했고, 동굴에 숨었다가 잡힌 디오니시오스는 시내의 광장에서 고문을 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과 봉기군 및 내통자들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졌다.[3]
일부지만 주민들이 봉기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자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오스만 파샤는 성내의 모든 성당과 수도원을 모스크로 전환했고, 그리스인 주민들을 성밖으로 이주시켰다. 성내에는 무슬림과 유대인만이 거주가 허락되었고, 1204년에 세워진 데스포티스 학교 역시 폐쇄되었다. 이로써 180년간 이어진 종교적 관용 및 자치권이 폐지되었다. 1618년에는 이오아니나의 상징과도 같던 세례 요한 성당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아슬란 파샤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오스만 당국은 보복으로 기독교도 시파히에게 주었던 티마르 (영지)를 몰수했고, 이에 많은 현지 유력자들이 특권 유지를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투르코야니오트 (Τoυρκογιαννιώτες)라 불리게 되었다.
2.2.1. 그리스 계몽주의의 산실
마루차이아 학교를 계승한 카플라네이오스 학교
17세기 초의 사태에도 이오안니나는 그리스 정교도 다수 도시로 남았고, 그리스어 사용 역시 압도적이었다. 오스만어를 쓰는 관료 및 오스만어와 알바니아어를 혼용한 수비대 역시 종종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1670년 도시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37개의 마할레 (구역)가 무슬림 18개, 기독교도 14개, 유대인 4개, 집시 1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4천 가구가 거주하고 1900개의 상점 및 공방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이오아니나의 경제적 활발함을 알 수 있고, 주민들은 종종 수공업에 종사했다. 베네치아와 리보르노 등 이탈리아 상인들은 종종 왕래하며 시내에 상관 및 은행을 두었다. 한편 베네치아로 이주한 이오안니나 출신의 니콜라오스 글리키스, 니콜라오스 사로스, 디미트리오스 테오도시우는 각각 1670년, 1687년, 1755년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세웠다.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1600권 이상의 그리스어 서적들은 이오아니나를 중심으로 그리스에 보급되었다. 책의 종류는 역사, 철학, 수학, 의학 등 다양했다. 이오아니나는 무기, 돈, 그리고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고 곧 오스만 제국령 그리스 도시 가운데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로 우뚝 섰다.[4]
이오아니나 출신 사업가들은 종종 고향에 학교를 세우는 등 자선 활동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1647년 베네치아 상인 에피파네이오스 이구메노스가 에피파니우 학교를, 1676년 엠마누엘 구마스가 기우메이오스 학교를 설립했다. 후자의 경우 1725년 교장 발라노스 바실로풀로스에 의해 발라네이오스로 개칭되었고 철학, 사상, 수학을 가르쳤다. 베사리온 마크리스, 게오르기오스 수그두리스, 아나스타시오스 파파바실레이우, 메토디오스 안트라키테스, 요안니스 빌라라스, 코스마스 발리노스 등의 그리스 계몽주의자들이 그곳에서 공부했다. 1742년에는 역시 베네치아의 이오아니나 출신 주민인 마우체스 가문이 마루차이아 학교를 세웠다. 첫 교장 에우게니오스 불가리스는 물리학과 화학, 철학, 그리스어 전문가였다.
이오아니나의 계몽주의 학교들 중 마루차이아는 1797년 베네치아 멸망 후 폐교되었다가 러시아의 이오아니나 출신 상인 조에스 카플라네스의 후원으로 카플라네이오스 학교로 재개교했다. 첫 교장 아타나시오스 프살리다스는 발라네이오스 출신인 메토디오스 안트라키테스의 제자로, 빈과 러시아 등지에서 유학했다. 그는 다국어로 쓰인 수천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과 물리학 및 화학 실험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했고, 후자에 대해 알리 파샤가 호기심과 의심을 보였다. 네오피토스 두카스는 과장을 보태어 18세기 헬라권의 모든 작가들은 이오아니나 출신이거나 그곳의 학교 출신이었다고 평했다. 발라네이오스는 1797년 베네치아 멸망 후 자금난을 겪다가 1820년 이오아니나 공성전과 함께 폐교되었다. 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필사본과 시집들은 이오나니나 함락 당시 전소되었다.
2.2.2. 알리 파샤의 야니아 파샤령
알리 파샤가 세운 궁전 일대
1430년에 세워진 페티예 모스크는 1795년, 알리 파샤가 자신의 궁전 모스크로 삼으며 현재와 같이 증축했다.
1788년 야니아 산작을 중심으로 이피로스, 테살리아, 아이톨리아, 보이오티아, 아티카 등 그리스 서부와 중부를 석권한 알리 파샤 테펠레나는 이오안니아를 수도로 삼았다. 30년 이상 이어진 그의 지배 하에서 도시는 경제적,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했고 19세기 초엽에 방문한 프랑스인 학자 프랑수아 푸크빌은 3200 가구 (2천 기독교도, 1천 무슬림, 2백 유대인)가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알리 파샤는 여인들을 자루에 넣어 호수에 던지는 등 그리스 주민들에게 가혹했지만 동시에 그의 휘하에서는 후일 그리스 독립 운동을 이끌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 마르코스 보트사리스,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소스 등이 배출되었다. 1820년, 알리 파샤가 유럽 각국과 교류하는 등 자립을 꾀한다 여긴 조정은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토벌군을 보내 이오안니나를 포위했다. 1년여의 공성전 끝에 알리 파샤는 항복하고 호수의 이오안니나 섬에서 술탄의 사면을 기다렸으나, 1822년 암살되었다. 한편 발라네이오스, 카플라네이오스 역시 불타는 등 1820-21년 이오아니나는 시가지 상당부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2.2.3. 근대
1905년에 세워진 시계탑
조시마이아 학교 (건물은 1905년에 완공)
그리스 독립 전쟁 기간 도시는 안정을 유지했고, 1828년에 이탈리아와 러시아 모두에서 활동하는 조시마스 형제가 조시마이아 학교를 세웠다. 그곳에선 그리스어, 외국어, 철학 등을 가르쳤다. 비슷한 시기 현지 여성 부호 앙겔리키 파파조글루가 사망한 후 그녀의 저택이 여학교인 파파조글레이오스가 되어 1905년까지 기능했다. 1869년 대화재가 벌어져 시가지 대부분이 전소되었고, 총독 아흐메트 라쉼 파샤는 독일 건축가 홀츠의 계획에 따라 시장을 재건했다. 이오아니나 출신 재외국민들의 기부로 성당, 학교 등의 고급 건물이 세워졌고 오스만 은행은 그리스 지역의 첫 지점을 이오아니나에 세웠다.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던 도시는 19세기 말이 되어가며 민족주의가 조금씩 발현했다. 1877년 현지 알바니아 주민들은 당국에 알바니아어 학교 설립을 요구했고, 알바니아인 권익 위원회를 세우려 했다. 그리스 주민들은 열강들에 그리스 편입을 알리려 했고, 1879년 디미트리오스 차시오티스는 파리에서 관련 각서를 출판했다.
1880년대 기준 이오아니나 및 근교에는 7만 7천여 그리스 정교도와 5천여 무슬림, 3천여 유대인, 2백여 외국인이 거주했다. 시내에는 여러 터키어 학교가 세워졌지만 무슬림 유력자들도 자녀를 조시마이아 같은 명문 그리스 학교에 보내길 원했기에 그리스어의 우위가 계속되었다. 시의회 시간은 그리스어로 유지되었고, 1868년에 출간된 공식 신문인 빌라예트도 터키어와 그리스어가 병용되었다. 20세기 들어 이오아니나의 알바니아 협의회는 현지 알바니아 학교와 성당에서 그리스 대주교의 영향을 제거하는 데에 힘썼다. 이오아니나의 오스만 지배, 즉 투르코크라키는 483년간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2.3. 근현대
1913년 2월 21일, 발칸 전쟁의 비자니 전투 후 이오아니나는 그리스 령이 되었다. 현지 출신 조종사 크리스토스 아다미디스가 전투기를 몰고 시청 광장에 착륙하자 주민들이 나와 맞이했다. 1922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당시 무슬림 주민 대부분이 터키로 이주되었고, 20여 가구의 알바니아 무슬림만 남았다. 도시 유력자들 중 일익을 담당했던 투르코야니오트들 역시 터키 본토로 추방되었다.[5] 도시에는 과거 도시의 부흥을 이끌었던 경제권, 행정 실무, 문화적 주도권의 상당 부분을 쥐고 있던 기독교인 상류층[6]들이 남았다. 이 기독교 엘리트들은 단순한 피지배층이 아니라, 국제 무역을 장악한 거부들이었으며 은세공과 무역, 알리 파샤의 공무원들이자 정치적 조언자, 독립전쟁기 그리스의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경제, 문화적 리더로써 도시의 번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었다.[7]
2차 대전 시기인 1940년, 이탈리아는 그리스 침공에 나서며 이오아니나 점령을 우선 목표로 삼았으나 그리스 군은 칼파키 방어선에서 결사 항전하며 버텼다. 1941년 4월 독일 공군이 항복 협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폭격했다. 1943년 10월, 독일군은 저항군 거점이라 여겨진 이오아니나 인근 마을 링기아데스에서 1백여 주민을 학살했다. 1944년 3월, 독일군은 유대 주민 1950명 중 1870명을 절멸 수용소로 보냈다.[8]
전후 도시는 재건되어 안정을 되찾았고, 1970년에는 이오아니나 대학이 세워져 현지 학생들은 테살로니키의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3. 도시의 특징
3.1. 지리와 기후
해발 약 500m의 고지에 위치하며, 팜보티스(Pamvotis) 호수의 서쪽 기슭을 끼고 발달했다. 그리스 본토에서 인구 5만 명 이상인 도시 중 강수량이 가장 많은 도시로 꼽힌다.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지중해성 기후(Csa)와 온난 습윤 기후(Cfa)의 경계에 해당한다. 여름에는 최고 42.4°C까지 치솟을 정도로 덥고 건조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13°C까지 떨어지는 등 춥고 습하다. 특히 겨울철에는 인근 핀도스 산맥의 영향으로 눈이 내리거나 서리가 잦으며, 연간 강수량이 1,100mm를 넘길 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 이 때문에 "이오아니나에서는 비를 피할 수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3.2. 도시 경관, 건축
오스만 제국 시기의 흔적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신고전주의 양식, 그리고 현대 건축이 뒤섞인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1820년 알리 파샤가 공격 당하던 공성전 당시 도시가 초토화되었고, 1869년 대화재로 구도심 상당수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구도심 건물들은 대부분 19세기 중반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는 비잔틴과 오스만, 현지 양식이 결합된 이른바 투르코야니오트(Turkoyanniotiko) 양식이 유행했으나, 19세기 중반 탄지마트 개혁 이후 유럽풍의 신고전주의가 도입되었다. 시계탑, 우체국, 조시마이아 도서관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그리스의 모더니즘 건축가 아리스 콘스탄티니디스(Aris Konstantinidis)가 설계한 이오아니나 고고학 박물관과 카페 '오아시스' 등이 들어서며 현대적 미감을 더했다.3.3. 사회, 경제
현대 이오아니나는 지역 행정, 교육, 의료의 중심지이며 앞서 설명했듯이 1964년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의 분교로 시작해 1970년 독립한 이오아니나 대학교(University of Ioannina)가 있다. 약 2만 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도시 경제의 핵심 축을 담당한다. 캠퍼스가 도심에서 약 6km 떨어져 있어 대학촌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또한 이오아니나 대학 병원과 하지코스타 종합병원이 있어 그리스 서북부의 의료 허브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은세공업이 매우 유명하여 지금도 시내 곳곳에서 은제품을 파는 상점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독일 등 외국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테크 허브로 도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3.4. 농축산업 및 향토요리
이오아니나는 산악 지형이 많아 대규모 경작보다는 목축업이 발달했다. 특히 그리스 식탁에 오르는 육류와 유제품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오아니나는 양계 산업의 중심지로 그리스 최대의 닭고기 생산지이다. 그리스 양계 시장을 양분하는 거대 협동조합인 핀도스(Pindos)와 기업 니치아코스(Nitsiakos)의 본사가 모두 이오아니나에 있다. 덕분에 그리스 전역에서 소비되는 닭고기의 약 50% 이상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그리스를 대표하는 치즈인 페타 치즈의 최대 생산지 중 하나다. 한국인에게도 (주로 면세점이나 수입 치즈 코너에서) 익숙한 그리스 최대 유제품 기업 도도니(Dodoni)의 공장이 이오아니나에 있다. 1963년 설립되었으며, 이오아니나 지역 수천 명의 농가로부터 우유를 수매하여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업이다. 또 페타 외에도 이 지역 특산물인 갈로티리(Galotyri)가 유명하다. 우유와 요거트, 페타 치즈의 중간 형태를 띠는 크리미한 치즈로, 빵에 발라 먹거나 고기 요리에 곁들인다.
이오아니나의 요리는 가난한 산악인들의 지혜가 담긴 식사 파이와 호수의 별미, 그리고 동방 아나톨리아의 영향을 받은 달콤한 디저트로 요약된다. 이오아니나 섬에서는 특히 개구리와 장어가 유명하고, 현지 생산품(우유, 치즈, 요거트, 고기)과 맛있는 레시피(파이)로 유명하다. 또 에페이로스 지역은 그리스에서 파이(Pita)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얇은 반죽(Phyllo) 사이에 구하기 쉬운 채소나 치즈를 넣어 구워 먹던 것이 발전했는데 이 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 이곳은 오랜기간 오스만 제국의 영향과 발칸 반도의 교역로였던 역사 덕분에, 튀르키예 요리의 영향을 받아 시럽을 듬뿍 적신 달콤한 디저트(Siropiasta)가 매우 발달했다.
- 카소피타(Kassopita): 얇은 도우 없이 밀가루 반죽과 치즈를 섞어 구운 투박하지만 고소한 파이이며, 밀가루 파이(Aleuropita)라고도 부른다.
- 바차리아(Batsaria): 각종 산나물과 채소, 우유를 넣어 만든 영양 만점 파이.
- 코토피타(Kotopita): 양계 산업이 발달한 도시답게 닭고기를 듬뿍 넣은 파이도 흔하다.
- 개구리 뒷다리(Vatrachopodara): 팜보티다 호수 주변과 섬 지역 식당의 메인 메뉴. 튀김으로 주로 나오며, 맛은 닭고기와 생선의 중간 정도로 부드럽다.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가장 많이 찾는 메뉴.
- 민물장어 & 송어: 호수에서 잡히는 장어와 송어 요리 역시 유명하다. 특히 기와에 구워내는 방식이 전통적이다.
- 야니오티코(Giannotiko): 이름부터 '이오아니나의 것'이라는 뜻. 카다이프 안에 호두 등 견과류를 넣고 돌돌 말아 시럽에 절인 것으로, 이오아니나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할 디저트 1순위다.
- 바클라바: 인근 멧소보 지역의 질 좋은 버터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풍미가 진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클로스타리(Klostari)라 불리는, 주름지게 말아낸 바클라바가 특산품이다.
- 지차(Zitsa) 와인: 이오아니나 바로 북서쪽에 위치한 지차(Zitsa) 마을은 데비나(Debina)라는 토착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으로 유명하다.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이 이곳의 와인을 마시고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 치포우로(Tsipouro): 포도 껍질을 증류해 만든 그리스 식 증류주. 이오아니나 사람들은 치포우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식사 때마다 곁들이는 반주 문화가 발달해 있다. 이오아니나가 속한 에피로스 산악 지역은 전통적으로 아니스를 넣지 않은 순수 치포우로(Choris Galykaniso)를 선호하는 편, 이는 이탈리아의 그라파(Grappa)와 맛이 거의 유사하다. 현지에선 우조와 달리 아니스 향 없는 순수 치포우로를 더 즐기는 편이다. 치포우로는 우조보다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특히 이오아니나가 속한 이피로스 지역은 치포우로 생산과 소비의 전통이 깊다. 에피로스의 경우 이오아니나 인근 지차(Zitsa) 마을의 유명 와이너리인 도멘 글리나보스(Domaine Glinavos) 치포우로 등의 브랜드가 있으며[9] 해당 지역의 지역 특산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이오아니나 사람들은 인공적인 향을 첨가하지 않은 포도 증류주 본연의 강하고 흙내음이 나는 풍미를 더 즐긴다고도 볼 수있다.[10][11]
3.5. 관광 명소
고즈넉한 도시구조와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매력적인 곳으로 팜보티스 호수의 푸른 물결과 장엄한 핀도스 산맥이 펼쳐져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폼내는 아름다운 도시다. 이오아니나 성은 동남쪽의 내성인 이츠 칼레(Its Kale)에는 알리 파샤의 무덤, 페티예 모스크, 비잔틴 박물관, 그리고 2016년에 개관한 은세공 박물관이 모여 있다. 북동쪽 내성에는 아슬란 파샤 모스크(현재는 시립 민속 박물관)가 있다. 성벽 안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교 회당도 남아있다. 다만 모스크와 시나고그는 종교 시설로서의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고 문화사적에 가깝다.이오아니나 섬(Nisos Ioanninon)은 팜보티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별도의 이름 없이 그냥 섬(Nisi)이라고 불린다.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으며, 알리 파샤가 최후를 맞이한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이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외에도 11~17세기에 지어진 6개의 수도원이 있어 타임머신을 탄 듯한 느낌을 준다.
페라마 동굴(Perama Cave)은 도심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석회동굴. 흥미롭게도 1940년 2차 대전 당시 주민들이 이탈리아군의 공습을 피해 방공호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총 길이 830m에 달하며 내부 경관이 수려하다.
그외 유럽 도시라면 하나즘 있는 일반적인 시립 고고학 박물관에선 도도나 유적 등 에페이로스 전역의 유물을 전시하며 파블로스 브렐리스 밀랍인형 박물관이라는 특이한 박물관이 도심에서 14km 떨어진 비자니(Bizani)에 위치한다, 이곳은 그리스 역사의 주요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했는데 퀄리티가 상당히 높아 인기 있는 관광지다.
4. 기타
- 근대 시기에 큰 전쟁을 겪지 않아 고즈넉한 모습이 잘 남아있다.
- 팜보티다 호수 내에 있는 이오아니나 섬도 현지 관광지로, 페리가 자주 운행한다.
- 인근 자고리(Zagori) 지역의 생수는 그리스 전역에서 팔릴 정도로 유명하다.
[1]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이오아니나 지역 단위(Ioannina Regional Unit,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고 '현(縣)'은 2011년 칼리크라티스 개혁 이전의 명칭이기는 한데, 한국에서는 이 새 행정구역도 '현'이라고 관용적으로 쓰는 감이 있다.[2] 테살로니키처럼 5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으니 그럴만 하다.[3] 한편 디오니시오스의 부관 가브리엘 말라마스는 마니 반도로 도주했다.[4] 물론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인들이 손을 댄 도시 가운데 제일 번영한 도시는 그 도시지만, 이 당시 그리스인이 주도하던 도시 가운데서는 압도적이었다는 의미로 받자.[5] 이들 중 상당수, 특히 상류층 여성이나 가정 내에서는 그리스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했다. 튀르키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무슬림이라서 튀르키예로 왔지만, 튀르키예어를 잘 못하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들은 야니오티카(Yanniotsika)라고 불리는 그리스어 방언을 썼다고. 이오아니나는 오스만 제국 시절 매우 번영하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도시였고 투르코야니오트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시골 이주민이 아닌, 도시 귀족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튀르키예 내에서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현재 이 공동체는 1세기가 지나며 자연스레 해체되었다.[6] 이들을 보통 아르혼테스(Archontes, 기독교 귀족, 유력자, 통치자 계급) 혹은 프로크리토스(Prokritos, 유력자)라고 불렀다.[7] 흥미롭게도 이오아니나의 기독교 귀족들과 무슬림 귀족들은 계급적 동질감을 공유했다. 투르크야니오트들은 본래 토착 유력자들이거나 오랜 기간 이 도시에 살면서 강렬한 그리스 계몽주의의 선두를 달리던 이오아니아의 분위기에 동화된 무슬림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종교는 달랐지만, 같은 동네에 살며 아르혼테스나 프로크리토스들과 같은 언어를 썼고, 서로의 복장이나 생활 양식이 매우 비슷했다. 투르코야니오트 무슬림들조차 집안에서는 그리스어를 썼기 때문에, 두 집단은 종교만 다른 하나의 상류 사회를 형성하기도 했는데 근대 민족주의 도래전 오스만 제국기 발칸 반도에서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이 어떻게 섞여 살았던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무력과 정치를 쥔 무슬림 지배층과, 돈과 지식, 행정을 쥔 기독교 지배층이 공존했던 이 도시는 같은 그리스어를 쓰는 이웃사촌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운명이 극적으로 갈린 일례를 보여 주었다. 제국이 멸망하고 인구 교환이 일어났을 때 무슬림들은 추방당했지만, 이 기독교 엘리트들은 그대로 남거나 그리스 신생 국가의 정치, 경제 지도층으로 흡수되는 상반된 결말을 맞이했던 것이다.[8] 이오아니나의 유대인들은 고대부터 그리스어를 사용해온 고유한 공동체인 로마니오트(Romaniotes) 유대인이었다. 이오아니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쓰고 현지 문화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치 점령 초기에는 자신들이 추방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1944년 3월 25일(그리스 독립기념일) 새벽, 나치는 이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냈고, 생환자는 불과 100여 명에 불과했다. 나치의 이 만행으로 2천 년 넘게 이어온 이오아니나의 로마니오트 역사가 사실상 끊기게 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이민 간 이오아니나 출신들이 미국 뉴욕에서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에 세운 '케힐라 케도샤 야니나(Kehila Kedosha Janina)'라는 시나고그가 있는데, 이곳은 서반구 유일의 로마니오트 회당으로, 매주 예배를 드리고 박물관을 운영하며 그 명맥을 간신히 잇고 있다. 그들이 사용했던 유대-그리스어인 예바닉(Yevanic)은 현재 많이 잊혔고 현지의 젊은 세대는 현대 그리스어, 영어, 히브리어 등을 사용하여 거의 현지에 동화되었다.[9] 데비나 품종 와인과 고품질의 치포우로를 생산하는 지역 명문 기업이다.[10] 우조는 주로 식전주(아페리티프)로 해산물 메제(Meze)와 함께 즐기는 경향이 강한 반면, 치포우로는 식사 전후 또는 식사와 함께 폭넓게 곁들이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 아니스 향이 없는 치포우로가 다양한 식사 메뉴에 더 잘 어울린다고 느낄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오아니나는 산악 지형이라 닭고기, 양고기등의 육류와, 페타, 갈로티리 같은 치즈 류, 버터가 듬뿍 들어간 파이 등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을 주로 먹는다. 한편 우조 제조 과정에서 반드시 아니스를 넣어 증류해야 하므로, 물을 타면 뿌옇게 변하고 특유의 박하/치약 향이 나는데, 주로 해산물과 먹는 여름용 식전주 이미지가 강하다. 따라서 아니스 향이 강한 우조나 향이 첨가된 술은 이런 고기/유제품 요리의 맛을 덮어버리거나 충돌할 수 있다. 반면, 향이 없고 도수가 높으며 깔끔하며 드라이한 순수 치포우로는 기름진 입안을 씻어주는 역할을 하여 고기 요리나 파이와 궁합이 매우 좋다. 한국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는 이치와 같다.[11] 사실 치포우로는 14세기경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이 와인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반면 우조는 19세기에 와서야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서부터 산업화되어 그리스에도 널리 퍼진 술이다. 이오아니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 방식인 치포우로에 대해 "우조는 관광객이나 마시는 것"이라는 식의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