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20:36:02

어디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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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오디 머피
Audie Murphy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601 Vine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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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어디 머피
Audie Murph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Audie_Murphy.jpg
본명 어디 레온 머피[1]
Audie Leon Murphy
출생 1925년 6월 20일
텍사스 킹스턴
사망 1971년 3월 28일 (향년 45세)
버지니아 로어노크[2]
묘소 알링턴 국립묘지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42년 ~ 1945년
텍사스 주방위군
1950년 ~ 1966년
미합중국 육군 예비군
1966년 ~ 1969년
서명 파일:어디 머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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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최종 계급 중위 (미국 육군)
소령 (텍사스 주방위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명예훈장
수훈십자장
은성훈장 (2회)
동성훈장 (2회)
공로훈장
퍼플하트 (3회)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은성 무공십자훈장
야자수 무공십자훈장 (4회)[3]
명예시민근속훈장
텍사스 입법 명예훈장 등
}}}}}}}}}

1. 개요2. 상세3. 출생4. 군 시절5. 명예훈장6. 전후7. 여담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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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전쟁 영웅군인이자 배우이다.

2. 상세

역대 미군 출신 인지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1위를 차지하는 영웅급 대접을 받는 인물이다.

그야말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훈장, 기장, 휘장, 표창장 등 상훈이란 상훈은 죄다 받은 경력 때문에 미 육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넘사벽이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롤모델로 받들어질 만큼 전설급으로 대우받고 있다. 명예 훈장, 퍼플 하트, 수훈십자장, 은성훈장, 동성 훈장, 전투보병휘장 등... 당장 위에 첨부된 사진만 봐도 소련식 훈장 방탄복을 방불케 한다. 마블 코믹스스티브 로저스가 이 인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잘못된 소문이 있을 정도로 둘의 행적이 비슷한데[4] 군입대 신청이 여러번 거부되었으나 계속된 시도로 입대한 후 넘사벽 성과를 보인 점은 정말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PTSD를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중 한명이기도 하다. 전장의 참혹함에 시달린 나머지 베개 머리밑에 항상 권총을 둔 상태에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여기에 밤마다 악몽을 꾸는 건 두말 할 것도 없다. 자신의 회고에서도 "두려움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가정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견디다 못한 첫 번째 아내 Wanda Hendrix[5]와 이혼했다. 심지어 도박까지 했었을 정도로 심했다. 한때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감독에게 "전쟁에 참전하기 전엔 모든 게 흥분되고 기대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고백했었다고 한다.

3. 출생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1925년 6월 20일 텍사스 주 소재 헌트 카운티의 킹스턴에서 아일랜드계 소작농인 에멧 베리 머피와 처 조시 벨 킬리안 사이의 12자녀들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린시절은 파머스빌, 그린빌과 셀레스트 등지를 옮겨다니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려둔채 집을 나갔으며, 어머니는 그가 16살때 심장 내막염과 폐렴의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굉장히 아름답고 땅에 닿을듯한 긴 머리를 갖고 계신 분이었다. 아울러 과묵하시고 무언가를 찾는듯 하신 분이셨는데 어머니를 여읨으로서 나의 일부도 떠나간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머니의 사망은 그의 일생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결국 초등학교 5학년만을 다니고 중퇴. 16세이던 1941년, 그린빌에서 라디오 수리점 직원으로 일했고 목화농장, 일반상점, 주요소 등에서 막일을 했다. 그의 어린 세 동생들은 헌트 카운티의 퀸란에 있는 고아원으로 입원하도록 허락되었다.

어릴때 외톨이였는데다가 감정기복이 심하고 아울러 성격이 불같았다고 한다.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 컸던 듯.

4. 군 시절

평소부터 군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는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하자 애국심에 참전을 결심, 미 육군과 미 해군, 미 해병대에 지원했으나, 입대 제한연령에 미달했고, 166cm의 키에 50kg 몸무게도 신체검사 기준에 미달하였기 때문에 모두 낙방했다. 그는 곧 몸무게 증량을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누나의 도움을 받아 출생증명서를 위조한 끝에 결국 미 육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1942년 6월 30일 미 육군에 입대한 그는 보병주특기로 현 텍사스 주 소재인 캠프 월터스[6]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당시 신병중대장은 왜소한 그의 체격을 보고 전투보병으로 체력이 모자라지 않을까 우려하여 조리주특기로 변경을 제안하였지만 그는 전투보병을 희망하여 13주간의 신병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Marksman Badge와 Expert Badge를 받았다. 후반기 고등보병 훈련은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7]에 주둔한 제76보병사단에서 받았다. 1943년 1월 고등 보병훈련을 마치고, 미 뉴저지 주에 위치한 캠프 킬머 보충대를 거쳐 1943년 2월 20일,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위치한 미 육군 제3보병사단(사단장 Lucian K. Truscott, Jr. 소장) 15보병연대 1대대 B(베이커) 중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자대 배치 이후 그는 3사단과 함께 알제리의 아르쥬에서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고, 5월 7일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7월 10일 시칠리아 상륙작전 당시 리카타 지역에서 척후 정찰 중 도망 중이던 이탈리아군 장교 2명을 사살하고, 7월 15일 상병(Corporal)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열흘 후 소속중대가 팔레르모를 도착했을 때는 환자 열외로 전투에 불참했고, 회복 후에는 연합군이 작전목표인 메시나 항을 향하는 도중에 산 프라텔로에서 본대가 교전을 하는 동안 고지에 있는 기관총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투에 참여했다.

1943년 9월 유럽 본토 침공의 일환으로 실시된 살레르노 상륙 작전 당시에는 배티파글리아로 파견돼 볼트루르노에서 척후 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전사자 1명의 피해만 입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피해없이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적군 5명을 사살, 그리고 10월달에 있었던 전투에서는 7명의 독일군의 공세를 방어해내면서 3명 사살, 포획 4명의 업적을 이뤘고 그해 12월 13일 병장으로 진급한다.

1944년 1월 13일 하사로 진급 후 안치오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3월 2일 교전 중 포격을 받고 파괴된 독일군 전차에서 탈출하는 전차병을 사살하였으나, 전차가 수리 후 재사용 가능한 상태임을 확인하고 홀로 적진으로 침투하여 재사용이 불가능하도록 총류탄으로 전차를 파괴했다. 이 무공으로 그는 동성 훈장을 받았다. 계속된 전투의 결과 5월 8일에는 전투보병휘장과 두 번째 동성 훈장을 받았다. 8월 4일에는 부소대장직을 맡았다.

1944년 8월 15일. 남프랑스 전역에서 라마투엘르의 포도밭으로 이동 중 독일군의 기습을 받자, 기관총으로 응전해 2명 사살, 1명 부상을 기록한다. 곧이어 저택에서 2명의 독일군이 투항의사를 밝히고 나와 그의 절친이 처리차 다가가자 갑자기 발포, 절친을 살해하자, 곧바로 진격해 응사, 6명을 사살, 포획 11명을 기록한다. 이 무공으로 그는 미국의 2등급 무공훈장인 수훈십자훈장을 수훈했다.

1944년 9월 15일 북동부 프랑스 전역에서 작전 중,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를 받는다. 이 시점까지 15연대 B중대에 남아있던 파병1진 대원은 머피를 포함해 단지 3명에 불과했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 중인 10월 2일 완벽하게 방어된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단독으로 공격하여 적 전방 14m 앞에서 수류탄 공격으로 기관총 진지를 섬멸하는 전공으로 미국의 2등급 무공훈장인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10월 5일에는 독일군이 점령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단독으로 SCR-536 무전기를 메고, 독일군의 직접 사격을 받으며 적 전방 180m 지점까지 이동 후 정확한 좌표로 포병화력 지원을 요청, 엄폐된 진지에서 방어 중이던 독일군 다수를 섬멸했다. 중대가 고지를 점령했을 때 남겨진 독일군 전사자는 15명, 부상자는 35명이었다. 이 무공으로 그는 두 번째 은성 훈장을 수훈했다. 10월 14일에는 현지임관을 통해 소위로 진급하고, 15연대 B중대 3소대장직을 맡았다. 10월 26일 3소대가 독일군 저격수의 공격을 받자 단독으로 우회 기동하여 독일군 저격수 3명을 생포하려 하였으나, 급습을 알아차린 저격수의 선제사격으로 부상을 입어 대응사격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이때 심각한 부상으로 후송을 가게 되었으나 당시 기상상황으로 인해 후송이 3일간 지연되고, 응급실 사정으로 입원이 몇 일간 추가 지연되어 총상 부위가 괴사되는 바람에 1944년 12월 28일까지 병원에 입원했다. 이 부상으로 그는 퍼플 하트를 추가로 수훈했다.

파일:scan_pic0218_rdax_500x272.jpg
1945년 1월 14일 15연대 B중대 3소대장 보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진행된 16일간의 라인강 콜 마르 포켓 교두보 전투에서 머피는 두 다리에 다시 부상을 입어 퍼플 하트를 또 다시 추가로 수훈했다. 이 전투 개시 직전 235명이었던 B중대는 1월 26일 시점에 중대원 총원 18명으로 감소해 있었다. 다리 부상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중대에 남았던 머피는 중대에 남은 유일한 장교였기 때문에 중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날 6대의 독일군 전차와 다수의 보병들이 B중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머피는 중대원들에게 숲 속으로 이동하여 엄폐사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독일군의 직접사격을 받으며 중대지휘소에 홀로 남아 무전으로 중대를 지휘하며 자신의 M1 카빈으로 사격을 하고, 곧 파괴된 아군의 M10 GMC 대전차 자주포에 탑승하여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채 자주포에 장착된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몰려드는 적 보병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자살행위에 가까운 이 절망적인 전투는 한 시간 가량 지속되었는데, 사살한 적군은 350명 정도로 추정되며 놀랍게도 머피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뿐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부상에도 머피는 다시 후송을 거부하고 중대에 남기를 고집했다. 이 자살행위에 가까운 놀라운 무공으로 그는 미국의 1급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거듭되는 전투 끝에 1945년 2월 16일 그는 중위로 진급했다. 3월 11일 연대장은 부상으로 몸이 엉망인 그를 전장에 빼내 연대본부 연락장교로 보직을 변경하였으나 5월 20일 B중대의 주요 장교들이 전투 중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위기에 빠진 중대를 돕기 위해 연대본부 인원을 무단으로 차출하여 B중대로 달려가 위기에 빠진 중대를 구출했다.

1945년 8월 21일 전쟁 중 부상으로 인해 50% 장애등급을 받고 중위 계급으로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전역했다. 이후 생업과 병행하는 주방위군과 연방예비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하고 1969년 5월 22일 퇴역했다.

5. 명예훈장

보즈산맥에 위치한 2,200평방킬로미터의 콜마르 지대는 1944년 11월부터 독일군의 점령지였는데 1945년 1월 14일에 이미 12월로 본지역으로 이동한 소대와 합류한다. 1월 24일, 3사단과 홀즈위르의 마을로 진입하는 중, 독일군의 역습을 받아 두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M10 대전차 자주포가 파괴되면서 승조원들이 차량을 버려두고 후퇴하는 혼란가운데 휘하 병력에게 숲쪽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이 직접 M1 카빈으로 응수하는 것과 동시에 야전 통신기를 이용, 아군포격을 유도하고 파괴되어 버려진 M10에 위치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나머지 잔여병들을 처리하는 한편 진격해오는 적 전차와 보병을 1시간 동안이나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막아내어 아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여기에 두 다리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도리어 동료들과 남아있을 것을 고집했으며 결국에는 반격작전에까지 참여한다. 이러한 무용에 힘입어 명예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이때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6. 전후

전후 제대한 다음에는 배우로서 21년간 활동했는데 주로 서부극에 출연했다. 아울러 작사가로서도 괜찮은 성공을 거두며 더티 해리의 주연에도 거론되기도 하다가 197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 여담

  • 스웨덴 메탈 밴드 Sabaton의 To Hell and Back이 이 사람에 대한 노래이다.
  • 전후 파머스빌에 그의 누나와 매형을 위해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형제들이 누나의 집에 잠시 더부살이를 했었다고 한다.
  • 자신의 자서전 To Hell and Back을 영화화하자 그 자신이 역할을 맡았다. 영화 도입부에 그를 소개하는 인물은 미 육군 대장 월터 B. 스미스 장군이다. 스미스는 북아프리카, 유럽 전선에 아이젠하워의 참모로서 종군하였으며, 전후 주 소련 대사, 중앙정보국장, 국무차관을 지냈다. 이 영화가 개봉된 뒤 파티에서 친구가 그에게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불타는 탱크위에서 기관총을 쐈던게 그가 전쟁중 했던 가장 용감했던 행동이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건 두번째쯤 되는 이야기인데 자신이 가장 용감했었다고 생각했던 일은 영화에 못넣었는데, 그 이유가 각본가에게 그 이야기해줬더니 그런 내용을 영화에 넣으면 관객들한테 X구라뻥이라는 이야기 들을꺼라고 영화에서는 뺐었다고 한다.

8. 같이 보기



[1] '오디'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2] 북서쪽으로부터 14노티컬 마일 (약 25.9km) 떨어진 지점[3] 하나는 벨기에, 나머지는 프랑스로부터 받았다.[4] 실제로는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가 1941년에 만들어져 1943년부터 시작된 머피의 활약상보다 2년 먼저 일어났다.[5] 1928.11.03.-1981.02.01. 배우였는데 어디 머피와의 이혼 후 배우 경력도 파탄 났다고 한다.#[6] 현 포트 월터스. 현재는 텍사스 주방위군 훈련소로 사용중.[7] 현 미 사이버 사령부 본부이면서 정보병과특기 훈련생이 여기서 교육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