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2 23:58:12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1. 개요2. 상세3. 여담4. 참고 사이트
4.1. 에스코피에의 메뉴판4.2. 관련 글
4.2.1. 한국 사이트4.2.2. 외국 사이트

1. 개요

Georges Auguste Escoffier
(1846년 10월 28일 ~ 1935년 2월 12일)

프랑스요리사다.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알프마리팀에 위치한 마을인 빌뇌브루베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셰프들의 왕, 왕들의 셰프[1]로 불렸다.

2. 상세

1846년 10월 28일 니스 근처 시골마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조각가를 꿈꿨으나 12살부터 니스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삼촌의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요리에 대한 재능을 알게 되어 19살에 파리로 상경해 요리사 견습생이 되었고, 얼마 안 가 군에 징집되어 7년간 군 생활을 했다. 보불전쟁 당시에는 프랑스 군부대의 주방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마리 앙투안 카렘의 고전 프랑스 요리를 끝내고 누벨 퀴진이라는 새로운 고전 프랑스 요리로의 변혁을 이끈 초기 위인 중 한 명이다. 그가 1902년에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한 르 귀드 퀼리네르(Le guide culinaire)은 프랑스 요리의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후에 천재적인 호텔 경영자 세자르 리츠와 같이 리츠 칼튼 호텔의 호텔 레스토랑의 기초를 닦았다. 1890년부터 파리의 리츠 호텔 외에도 런던의 사보이 호텔, 칼튼 호텔에서도 근무했다.

이 개혁이 어떠한 것이었냐면 기존의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기름지면서 고기 위주로 거창한 규모로 만들어진 음식과 무거운 디저트 위주의 남성취향인 프랑스 고전 요리 시대를 끝내고, 장식성이 비교적 덜하고 단순하면서 재료의 원형을 살린 요리와 허브, 가금류생선, 아이스크림 등을 사용해 상큼하면서 가벼워 여성층에게 어필하기 좋은 디저트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를 위해서 화학[2]을 비롯한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전투식량으로서 통조림이 중요함을 강조해 국가부터 군용 통조림 생산공장 설립을 촉구하였고, 농축 토마토로 시작하는 소스의 통조림 보존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까지 하였다. 덤으로 레시피의 저작권 문제에도 신경을 쓰기도 했으며, 손님이 코스 메뉴 외에도 원하는 대로 메뉴를 고를 수 있게 하는 알 라 카르트(a la carte)와 메뉴의 가격화[3]를 도입한 동시에 화려한 음식 진열과 정교한 장식을 제거하고 제공되는 코스 수를 줄임으로써 요리 예술을 단순화했다.

요리에 철학을 도입해 거창한 철학과 이름을 붙이는 일을 시작하는 등 프랑스 요리의 규칙과 제법, 정신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샌드위치 등 외국 음식을 가져와 새로운 메뉴로 만들었고, 영국, 미국 등 다른 여러 국가의 식당, 호텔들과 교류하며 주방 설계나 식당 운영 방식,[4] 요리사 직급[5], 요리사의 행동거지[6], 조리법 등에 영향을 크게 끼쳐 현대 주방 시스템-특히 전표 시스템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또한 요리사들의 청결과 꼼꼼함, 조용함을 강조하면서 술과 담배를 피할 것을 처음으로 권유한 것도 에스코피에고, 전세계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세계 요리대회인 '에피쿠로스 만찬'을 기획·개최함으로써 에스코피에의 소스와 요리 레시피는 더욱더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9년 시민 요리사로는 최초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되는 등 여러모로 거창하고 혁신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백포도주는 생선, 적포도주는 육류와 같은 규칙, 뼈를 구워 만드는 브라운 소스의 적극적인 도입과 제법을 확립하고 데미글라스 소스를 발명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향토 요리이던 뵈프 부르기뇽의 요리법을 정립했으며, 투르네도 로시니라는 스테이크 요리와[7] 피치 멜바, 멜바 토스트, 체리 쥬빌리, 스트로베리 로마노프, 크레페 수제트 같은 수많은 디저트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8년 세계조리사협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878년부터 5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델핀(Delphine)의 사망 2주 후인 1935년 2월 12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 과정에서 당대의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헌사하는 특별 메뉴들을 제공하며 인지도를 높여가던 중 빌헬름 2세[8]베니토 무솔리니 추종자 등에게도 아부를 떨 수밖에 없었고, 전장 요리사로도 나가야 했던 등 정치적으로 휘말린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9]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최고 호화 유람선이던 RMS 타이타닉의 1등석 메뉴들을 개발한 사람이기도 하다.[10] #1 2 #3 #4

그의 증손자 미셸 에스코피에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재단 및 박물관의 회장이다.

3. 여담

1898년 사보이 호텔을 떠난 후 5년간 작업하여 1903년 출간했던 『요리 가이드』를 수정 보완하여 사망 1년 전인 1934년에는 그동안 만든 레시피들을 집대성한 『Ma Cuisine』을 출판했는데, 934페이지에 5000여종의 레시피가 담긴 이 책은 2016년 한국에 <나의 프랑스 요리> <나의 프랑스 디저트> 2권으로 분할되어 번역 출간되었고, 2020년에는 <에스코피에 요리책>으로 합쳐져 번역 출간되었다. 전자는 절판되었지만, 후자는 아직도 구매할 수 있다. 저술 목적은 후세대 요리사 양성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요리 학교에서 요리 교과서로 널리 쓰이고 있을 정도로 명저서로 평가받는다.

네이버 웹툰 요리GO에서 등장인물 중 헨리와 아멜리아의 조상으로 언급된다.

호치민이 리츠 칼튼 호텔 주방에서 접시닦이로 일할때 그와 인연이 있었다. 항상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모아 굶주린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호치민을 보고는 그를 특별히 칼튼 호텔 베이커리 부서로 옮겨 주었다고 한다.

일본의 황실 요리사이던 아키야마 토쿠조(秋山 徳蔵, 1888~1974)가 에스코피에의 제자다.

157cm의 단신이라 키높이 구두를 신고 종래의 요리사 모자보다 약 30cm나 높은 모자를 쓰고 일을 했다고 한다. 이는 세간에 요리장으로서의 위엄을 돋보인 모습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4. 참고 사이트

4.1. 에스코피에의 메뉴판

4.2. 관련 글

4.2.1. 한국 사이트

4.2.2. 외국 사이트


[1] 빌헬름 2세 독일 황제의 평[2] 당대에는 MSG 등 화학 조미료에 편견이 없었고, 에스코피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연구했다.[3] 정확히는 최소 4인용 고정 가격 메뉴[4] 참고자료[5] 일명 요리 여단(Brigade de cuisine). #1 #2 #3) 이는 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6] 음주와 흡연을 금하고 조용히 있는 요리사도 에스코피에르가 제안한 거라고 한다.[7] 다만 이 요리는 선배인 마리 앙투안 카렘이 발명했다는 말도 있고, 미식가로도 유명했던 로시니 본인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8] 빌헬름 2세는 그의 요리가 어지간히 인상깊었는지 "나는 독일의 황제지만 당신은 요리의 황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9]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그의 차남 다니엘이 보병 중위로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아픔을 겪은 바가 있다.[10] 훗날 폴 보퀴즈콩코드 여객기(티켓 가격이 웬만한 비행기 일등석 이상 수준으로 비쌌던 만큼 초호화 서비스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기내식 개발에 참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교통수단에 걸맞는 식사 개발에 당대 최고의 요리사가 참여한 것이니...[11] 이하 2005년 출판된 에스코피에 전기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의 서평이다.[12] 메추라기 콩소메, 솔 빅토리아(랍스터 덩어리가 듬뿍 들어간 맛있는 가자미 조각에 트러플 샤빙을 듬뿍 얹은 요리), '허브 파인'에 말아 만든 양고기 누아제트, 치즈(작성자는 패스했다), 피치 멜바(에스코피에의 원 레시피대로 내놓았다) 등으로 구성된 6코스 메뉴를 72.5파운드(약 13만 원)에 제공했다. 참고로 인터넷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당시 메뉴 평이 해당 링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