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12:03:05

양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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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연재2.2. 이민과 사망
3. 특징4. 국내에 나온 양우생 작품

1. 개요

梁羽生 (1924.04.05, 중화민국 광시성 멍산현~ 2009.01.22, 호주 시드니)

홍콩무협 작가. 본명은 진문통(陳文統). 절필하기 전까지 총 35편, 천만자에 달하는 무협 소설을 집필했다. 중화권에서는 신파(新派) 무협의 시조로 공인받아 김용급 위상을 자랑하며, 팬들에겐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이란 칭송도 듣는 인물이지만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2. 생애

넉넉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이미 삼백수를 암송했을 정도로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한다. 1943년 광주의 학자 몇몇이 난을 피해 왔을 때, 저명한 사학자인 간우문(簡又文)에게 역사학을 배웠다.

1949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장의 소개로 홍콩 신문사 대공보(大公報)에 입사해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양우생은 이듬해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긴다. 이 때 같은 신파무협의 작가이자 언론인 김용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둘은 기자 시절 같은 책상을 썼으며 바둑 친구였다고 한다. 김용에게 무협소설을 쓰라고 권한 인물도 양우생.[1]

2.1. 연재

1954년, 오파 태극권 오공의(吳公儀)와 백학문 진극부(陳克夫)가 공개 비무[2]를 벌이면서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그러자 신만보(新晩報) 편집장 나부(羅浮)는 이에 편승하고자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을 쓰던 진문통에게 무협 소설 원고를 청탁했지만 거절당한다. 진문통은 역사와 시서화에 해박한 교양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칼럼니스트였고, 하물며 대학 시절 전공이 국제경제학인 만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3]

하지만 사측은 가볍게 무시하고 신문지상에 "내일 양우생이라는 사람이 무협 소설을 연재한다"고 광고를 때려버린다. 심지어 시놉시스까지 멋대로 적었다. 결국 그는 울며겨자먹기로 하루밤만에 이야기를 짜내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 난다.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의 성공 이후 진문통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아예 양우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삼아 전업작가로 나서서 1956년 칠검하천산(七劍下天山), 1957년 강호삼여협(江湖三女俠)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1959년 평종협영록(萍踪俠影錄) 등 연이어 대작 무협 소설들을 발표하며 신파무협의 거두로 자리잡는다. 양우생 본인이 꼽는 대표작은 평종협영록, 여제기영전(女帝奇英傳), 운해옥궁연(雲海玉弓緣)이다.

2.2. 이민과 사망

1983년 무당일검(武當一劍)을 끝으로 절필하고, 1987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이민을 갔으며 2006년 말 홍콩에서 활동 도중 중풍에 걸려 요양생활을 이어가다가 2009년에 시드니에서 타계했다.

3. 특징

"무협 작가는 중국 시사(詩史)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도 보이다시피, 양우생의 소설은 곳곳에서 중국 고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역사무협물이다.

상당수 작품이 연대기적 구성을 띄고 있어, 작중 사건과 인물이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능한 시대순으로 읽는 편이 좋다. 예를 들어 화청지(당), 명황성(명), 백발마녀전-강호삼여협-운해옥궁연(명말·청초)이 서로 이어지는 작품들이다.

주먹제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유명해서, 그의 작품은 특히 후기 갈수록 청대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4] 이에 대해 양우생은 "의 등장이 권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들이 국내 무협 독자들 취향에는 잘 맞지 않았는지 양우생은 한국에선 인지도가 낮은 작가로 머물고 있다.

4. 국내에 나온 양우생 작품


[1] 근데 양우생은 필명으로 정체를 감추고 김용 작품이 서구적이며 음탕하다고 깐 적이 있다고 한다. 김용의 작품이 매우 예술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고룡도 언급했듯이 서양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적나라한 묘사를 은근히 많이 구사했다. 다만 김용은 노루표 무협지처럼 대놓고 외설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일관되게 지양했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건 의외로 남녀간 애정보다 사내들의 우정을 훨씬 중시했던 고룡의 작품이다.[2] 그 유명한 '중국 무술 실전대결' 동영상의 바로 그 비무. 정작 비무는 3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훗날 양우생은 농담삼아 "3분 비무 때문에 나는 30년 동안 무협을 썼다"고 말했다.[3] 양우생은 전업 작가로서 무협 소설을 쓰는 와중에도 양혜여라는 이름으로 칼럼 기고를 계속했다.[4] 초기에는 청대 배경으로도 많이 썼지만 졸작이 많아 잘 기억되지 않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