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26:23

아흐마드 샤 카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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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7대 샤한샤
아흐마드 샤 카자르
احمد شاه قاجار
파일:800px-AhmadShahQajar2.jpg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아흐마드 샤 카자르
احمد شاه قاجار
출생 1898년 1월 21일
카자르 왕조 타브리즈
사망 1930년 2월 21일 (향년 32세)
프랑스 오드센
재위 기간 카자르 왕조 샤한샤
1909년 7월 16일 ~ 1925년 12월 15일 (17년)
전임자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
후임자 레자 샤 팔라비
종교 이슬람 시아파
1. 개요2. 통치

[clearfix]

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7대이자 마지막 샤한샤.

2. 통치

1908년 페르시아에서는 입헌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를 내쫒았다. 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의회 세력은 본격적인 입헌군주정 도입을 하려 시도했다. 의회는 1909년 7월 16일 모하마드 알리 샤의 아들 아흐마드 샤 카자르를 새 샤한샤로 올리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의회 세력은 곧 심각한 난관에 부닥쳤는데, 입헌 혁명과 내전이 페르시아의 국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무역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망친 모하마드 알리 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황좌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입헌파의 모든 희망은 영국과 러시아가 대놓고 페르시아에 개입하며 허무하게 날라갔다. 영국은 페르시아 남쪽을, 러시아는 페르시아 북쪽을 영유권으로 삼고 중간에 완충지대를 두는 안에 양국이 합의해버린 것이었다.[1] 카자르 왕조는 이 합의로 인해 나라가 여러 조각 나버렸고, 거의 반쯤 무정부 상태가 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했다.

나이 어린 아흐마드 샤가 제위에 앉아 있었기에 왕실 최고 어른 아조드 알 물크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근대화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미국인 자문가 '모건 슈스터'를 재무부 장관으로 영입하는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모건 슈스터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 러시아의 영향권이 미치는 지방에 세리를 파견하자 러시아가 발끈했고, 결국 러시아와 영국이 힘을 합쳐 슈스터를 파면하라는 압력을 넣자 아흐마드 샤는 그대로 굴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슈스터 사건을 빌미로 타브리즈에 군대를 파견해 의회를 닫아걸었으며 주요 입헌파 인물들을 숙청했다. 1914년 6월에 이르자 러시아 군대는 거의 페르시아 북부 일대는 자신의 영토로 삼다시피 했고, 영국도 이에 질세라 남쪽의 부족들에게 독자적으로 충성 맹세를 받는 등 페르시아를 사분오열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페르시아는 여러 열강들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것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유럽과 휘말리기 싫었던 카자르 왕조는 즉각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반쯤 망한 상태의 왕조가 중립을 선언한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 발발 직후 카자르 왕조를 침공했다. 가장 큰 이유는 1910년부터 러시아 군대가 페르시아 북부에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서로 적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군대와 오스만 군대는 1917년까지 약 3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페르시아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이라면 치를 떨던 아시리아인아르메니아인 의용군들이 러시아의 편을 들어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졌고 더이상 대전쟁에 개입할 여유가 없어진 러시아는 모든 군대를 페르시아에서 철군했다. 러시아가 빠지자 살판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빈자리를 채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페르시아 북부를 실효지배했다. 이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만 군인들은 수없이 많은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들을 탄압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페르시아에서는 역대급 규모의 대기근이 일어났다. 영국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모든 식량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고, 심지어 러시아의 경우 러시아 군용식량이 아니면 모든 식량의 이동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밀 100kg의 가격이 20개의 금화를 주고 사야 할 정도로 비싸졌고 페르시아 내부의 식량 대부분은 영국과 러시아의 군용 식량으로 반출됐다. 1916년의 심각한 가뭄까지 겹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1918년부터는 대규모 기근이 돌기 시작했다. 테헤란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도시들에서 빵집과 제분소에 대한 약탈이 벌어졌다. 인플루엔자, 콜레라, 티푸스 같은 역병들도 창궐했지만 카자르 왕조는 이를 방어할 역량이 없었다. 이 기근으로 200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인들이 굶어죽었다.
파일:Reza_shah_uniform.jpg파일:Seyyed_Zia_and_Reza_Khan_among_others_during_the_1921_Persian_coup_d'état.jpg
레자 샤 팔라비 1921년 쿠데타 도중의 레자 칸과 사예드 자아웃딘 타바타바이
나라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영국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페르시아를 집어삼킬 생각만 가득했다. 그나마 러시아와 영국의 견제로 형식적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 허울마저 벗어던지려 시도한 것이다. 영국은 페르시아산 석유에 대한 독점권을 더욱 강화하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수급하기 위해 1919년 8월 아흐마드 샤를 협박해 '영국-페르시아 협정'을 체결했다. 사실상 페르시아를 영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이 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으며 영국은 이란 내 모든 유전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미국 등 여러 서구 열강들이 영국의 행태를 비판했고, 특히 이란 의회의 비준마저도 받지 않은 불법적인 조약이었으며 여론이 워낙에 안좋았기에 1921년 6월 22일에 슬그머니 폐기되어 버렸다.

카자르 왕조의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새로 들어선 소련이 이란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해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도록 도와주는가 하면[2] 곳곳에서 내란과 반란,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흐마드 샤는 무능했고 몸도 병약했으며 의회 역시 나약하고 오합지졸이어서 이를 해결할 가망이 없었다. 이쯤 되자 카자르 왕조는 수도 테헤란 부근 외에는 통치력이 미치는 곳이 아예 없었으며 카자르 왕조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카자르 왕조 내의 유일한 근대식 군대는 코사크 여단 뿐이었는데, 이 여단의 지휘자가 바로 레자 칸 장군이었다. 레자 칸 장군은 19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고, 그해 2월 18일 별 저항 없이 수도 테헤란에 입성했다.

레자 칸은 아흐마드 샤를 그대로 샤한샤 자리에 둔 채로 기존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사예드 자아웃딘 타바타바이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신정부를 꾸린 레자 칸은 1921년 소련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소련의 지원을 잃고 그대로 진압당했다. 레자 칸은 원하는대로 총리를 갈아치우며 사실상의 절대 권력자로 행세했다. 당연히 레자 칸에 대해 반대하는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레자 칸에게 모두 진압당했다. 아흐마드 샤는 건강상의 이유로 1923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쫒겨난 것에 더 가까웠다. 레자 칸이 장악한 의회는 1925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아흐마드 샤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레자 샤 팔라비라는 이름으로 새 로 추대했다.[3] 이로써 132년에 걸친 카자르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페르시아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가 시작된다.

아흐마드 샤는 프랑스에 거주하다가 1930년 파리 외곽 오드센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이라크 카르발라에 있는 카자르 왕조의 지하실에 안장된다. 카자르 왕가의 수장직은 그의 형제이자 카자르 최후의 왕세자였던 모하마드 하산 미르자가 물려받았다. 그가 죽을 당시 카자르 왕가의 개인 재산은 약 7,500만 프랑 수준이었다.

왕비 바드르 알 몰루크는 1940년대까지 레바논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카자르 왕조 구성원의 귀국 승인 후에는 이란으로 돌아와 1979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테헤란에서 여생을 보냈다. 팔레비 왕조의 몰락은 물론 이란 이슬람 공화국 출범까지 지켜보았다.


[1] 영국-러시아 협정이라고 해서 오랜 분쟁지역이던 아프가니스탄티베트 등의 영토 문제를 마무리지으며 서로 화해했는데 여기에는 카자르 왕조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2] 1921년 소련과 카자르 왕조와의 관계가 진전되며 소련이 페르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끊자 공화국은 부질없이 멸망한다.[3] 아흐마드 샤는 그렇게 유럽 여행길이 그대로 망명길이 되어버렸다. 그는 5년을 더 살다가 193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동생이자 옛 왕세자였던 모함마드 하산 미르자가 카자르 왕통의 계승을 주장하지만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