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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댜틀로프

파일:아나톨리 댜틀로프.jpg

Анатолий Степанович Дятлов[1]
Anatoly Stepanovich Dyatlov
1931년 3월 3일 ~ 1995년 12월 13일 (향년 64세)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소련의 원자력 공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1986년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부수석 엔지니어로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2. 생애

아나톨리 댜틀로프는 1931년 시베리아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출신으로 14살 때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공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콤소몰레스크 주의 잠수함 조선소에서 원자력 잠수함 원자로 설치 등을 맡았다. 그러다가 1973년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로 부임했고 원자로 4기가 가동하는 것에 모두 참여했다. 초기 체르노빌 건설 당시 원자로 제작과 운영에 참여했던 기술진들이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났고, 소장인 빅토르 브류하노프나 부소장 니콜라이 포민 모두 본래 원자로 부문 기술자가 아니었다는 점[2][3]에서 볼 때 체르노빌에서 그보다 더 원자로에 정통했던 인물은 없었던 셈.

1986년에 그는 포민의 주재 하에 기획된, 원자로 가동이 비상 정지되거나 냉각수 펌프 등의 보조 설비 전원이 차단되었을 때 잔여 증기 및 터빈의 관성으로 얼마만큼 전기를 생산해낼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실험을 강행했다. 원자력 발전소는 화력이나 수력 등 기타 다른 발전 방식과 달리 설비 특성상 바로 정지할 수가 없다. 기타 다른 발전 방식도 설비의 보호 차원에서 그냥 전자기기 코드 뽑듯이 바로 정지하는 게 아니라 일련의 절차를 거쳐 정지하는데, 원자력은 핵분열을 이용하는 만큼 더욱 더 조심스럽게 정지하며 정지에 걸리는 시간도 길다. 따라서 비상시에는 별도의 비상 발전기를 돌려 원자로를 정지하기 위한 보조 설비의 전력을 공급하게 되는데, 비상 발전기도 바로 기동되자마자 전력을 공급할 수는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을 원자력 메인 발전기가 남은 증기로 버틸 수 있냐 없냐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실험의 목적도 체르노빌 제4원자로의 안정성을 실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결국 원자로가 폭발했다.

그리고 1986년 4월 26일 대참사 당일, 대부분의 발전소 직원들이 피폭방사선 화상으로 즉사하거나 몇 주 내에 죽은 것과 달리 그는 사고 당시 3.9 시버트의 피폭을 당했으면서도[4] 살아남았고 이후 소련 정부는 청문회 끝에 그를 구속 수감했다. 위 사진이 청문회 당시 그를 찍은 것이다. 소련연방법원은 그에게 중과실치사 혐의로 10년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5년 후인 1990년에 형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독일 뮌헨으로 이송돼 연명 치료를 받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소련 공산당 정권은 RBMK의 결함을 숨기기 위해 사고를 인재로 조작했다. 댜틀로프가 순전히 자기 독단으로 규정을 싸그리 무시하고 비상제어장치를 껐고 제어봉도 거의 빼냈으며 엔지니어들의 반대와 컴퓨터 분석 결과를 무릅쓰고 안전장치가 거의 해제된 원자로 출력을 올리라고 명령했다는 게 소련의 공식 입장이었다. 사실상 전 지구적인 원자력 사고를 고의적으로 일으키려고 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그는 재판 당시에도 발전소 기술자들은 잘못하지 않았으며 원자로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요지[5]로 적극적으로 자기 변호에 나섰고, 뮌헨에서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에 대한 책인 《Chernobyl. How it happened》이나 죽기 1년 전인 1994년에 남긴 인터뷰 영상에서도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와 함께 발전소에서 일했던 기술자들 또한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할 만큼의 통솔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매체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오만하면서 난폭하고 악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려깊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군사 연구소 출신이다 보니 현장에서 군 체제 특유의 강압성을 보이던 건 사실이라고 한다.



비록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또한 결국 사고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하고 방사능 피폭으로 설사, 구토, 무기력증 등을 앓고 폐인으로 여생을 살다가 1995년 12월 13일에 독일 뮌헨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의 원인 역시 피폭의 후유증으로 추정된다.

3. 여담

원자력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성과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집착했다는 말도 있는데 체르노빌 사고가 나기 몇 년 전 자신의 뒤를 이어 원자력 분야 일을 했던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고 나서 더더욱 광적으로 원자력으로 성과를 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14세 때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면서 아득바득 공부해서 기술자가 되고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2019년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이 인물을 맡은 배우는 영국 배우 '폴 리터'. 2021년 4월에 뇌종양으로 작고했다.


[1] 발음은 자틀로프에 가까움. 한국에서는 '아나톨리 디아틀로프'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2] 빅토르 브류하노프는 체르노빌의 건설 및 확충과 프리피야트의 관리로 정신이 없었고 포민의 경우 부임 후 통신 강좌로 핵물리학 지식을 터득했다.[3] 이런 인사구조가 된 이유는 사회주의식 인사정책 때문인데 원래 사회주의 국가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원이 '정'을 담당하고 해당 분야 전문가가 '부'를 담당하는 매우 이상한 방식이라 이렇게 된 것이다.[4] 이 정도도 치사율 50%의 상당히 심각한 피폭량이다.[5] 그 또한 RBMK(흑연 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의 결함을 몰랐을 것이며, 소련 당국에서 이를 숨기고자 ECCS를 끄라는 실험 지시를 그의 독단으로 내렸다고 조작했기에 그의 억울한 심정은 어느 정도의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