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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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62~261년 로마군과 고대 카르타고군이 아그리젠툼(오늘날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에서 맞붙은 전투. 로마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정복 전쟁에 착수한다.2. 상세
기원전 264~263년, 로마 공화국은 메사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여러 도시들을 복속시킨 뒤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칠리아 동부의 패권을 확보했다. 그들은 이 성과에 만족해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하고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4개 군단을 2개 군단으로 축소시키고 카르타고 정부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로마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예의주시했던 카르타고 정부는 이대로 로마의 동부 시칠리아 지배를 허용한다면 장차 로마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서부 시칠리아 마저 노릴 거라 여겼다. 이에 따라 로마인들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누미디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리구리아 등지에서 용병대를 대규모로 모집했다.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 측이 용병을 대규모로 모집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기원전 262년에 4개 군단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했다. 40,000명 가량의 로마군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의 지휘하에 시칠리아로 진입한 뒤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의 핵심 거점인 아그리젠툼으로 진격해 그 해 6월에 도착했다. 한편, 아그리젠툼 사령관 한니발 기스코는 로마군의 포위를 예상하고 아그리젠툼 주변의 많은 주민을 성내로 들여보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아그리젠툼의 인구는 50,000명으로 늘어났지만 수비대 자체의 규모는 적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성벽 1마일 앞에 숙영지를 세운 뒤 일부 병력만 숙영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아그리젠툼 주변 밭에 널린 곡식을 수확하게 했다. 이는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지난날 카르타고군이 메사나 전투에서 완패하고 로마의 동부 시칠리아 지배를 허용하는 등 야전에서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감히 성벽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니발 기스코는 적이 경계를 소홀히 하고 경작물을 챙기느라 바쁜 틈을 타 기습했다.
한창 수확하느라 비무장 상태였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급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카르타고군은 여세를 몰아 적 숙영지를 급습했지만, 소규모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한니발 기스코는 병력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손실을 크게 보면 좋지 않다고 여기고 성내로 철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적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한 병사들이 무장을 확실히 갖추고 경계를 늦추지 않게 했으며, 숙영지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한니발 기스코는 적의 방비가 예전보다 강해진 걸 눈치채고 두 번 다시 습격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아그리젠툼 같은 대도시를 무력으로 공략한 적이 없었기에 공성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봉쇄해 보급을 끊어버려서 적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게 만들려 했다. 로마군은 도시를 도랑으로 둘러싸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요새를 세웠다. 아그리젠툼은 바다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고원에 위치했고 항구가 없었기에, 로마군이 갖추지 못한 해군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간 포위전이 이어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 당국은 한노에게 대규모 병력을 맡겨 아그리젠툼을 구하게 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에는 50마리의 코끼리, 누미디아 기병, 리구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용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50,0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60마리였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마리였다고 한다. 한노는 먼저 아그리젠툼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진출한 뒤 로마의 공급 기지인 헤르베소스를 점령하고 로마군 보급물자들을 모조리 탈취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 장병들이 굶주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염병이 창궐했다.
한노는 적이 조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할 거라 예상하고 누미디아 기병에게 적 진영에 접근해 도발하라고 지시했다. 로마 기병이 진영 밖으로 뛰쳐나오자, 누미디아 기병들은 일부러 그들 앞에서 퇴각했다. 로마 기병들이 그들을 뛰쫓다가 카르타고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돌아서서 로마 기병들을 공격했고 다른 카르타고군도 가세했다. 로마 기병들은 이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 승리에 고무된 한노는 아그리젠툼의 로마 진영에서 1.5마일 떨어진 토로스 언덕에 새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을 압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아가 창궐하고 탈영병이 속출하자, 두 집정관은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라고 여기고 평원에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노는 이대로 끌고 가면 로마군이 알아서 무너질 거라 여겼기에 거부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군대는 2달 동안 서로 가까이 있었고 투창을 몇 차례 교환한 것 외에는 별다른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한니발 기스코는 성내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져 수비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속히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 한노는 이걸 보고 그제야 회전을 벌이기로 했고, 로마군 역시 기꺼이 응했다.
카르타고군은 전면에 보병대를 배치하고 양측면에 기병대를 편성했으며, 후방에 코끼리와 경보병대를 편성했다. 로마군은 관례에 따라 벨리테스-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 형태로 보병대를 편성하고 양측면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이후의 전투 양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양측 보병대가 장기간 격전을 벌인 끝에 로마군이 적의 전열을 뚫는 데 성공하자 나머지 카르타고군이 패주하면서 로마군이 승리했다는 내용은 전해진다. 카르타고군은 코끼리들을 후방에 배치해두기만 했고, 코끼리들은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가 적이 전열을 뚫은 뒤 투창을 퍼붓자 미친듯이 날뛰며 카르타고군 장병들을 짓밟았다. 카르타고군이 코끼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카르타고 기병대가 앞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던 로마 기병대를 격파했다는 내용도 없는 것을 볼 때, 이들 역시 전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던 듯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3,000명과 기병 200명이 전사하고 포로는 4,000명이었으며, 코끼리 8마리가 죽고 33마리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한편 로마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폴리비오스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한니발 기스코는 아군이 패배하자 전투 다음날 밤 용병들과 함께 도랑을 짚으로 채워 넣은 뒤 아그리젠툼에서 도주했다.[1] 다음날 아침 적이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된 로마군은 한니발 기스코를 추격했지만 뒤쳐진 적병 몇 명을 사살하거나 붙잡았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그리젠툼으로 돌아와 이렇다할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로마군은 오래도록 공성전을 치르느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린 것에 울분을 품고 있었기에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다. 이 잔혹행위는 그때까지 로마가 카르타고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려 온 것이라고 여기고 지지했던 시칠리아 도시들이 로마에게 반감을 품고 카르타고에 협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도시는 함락시켰지만 카르타고군 자체를 섬멸하는 데엔 실패했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로마 정부는 아그리젠툼 함락 후 비로소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로 뜻을 굳히고 전쟁을 꾸준히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