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17:50:25

에릭스 산 전투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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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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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44~241년,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이 점령하고 있던 에릭스 산을 기습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

2. 상세

기원전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는 시칠리아에 소규모 용병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당시 시칠리아의 상황은 카르타고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대다수 지역은 로마에게 복속했고, 오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 시만 여전히 카르타고를 따랐다. 다만 로마군이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두 도시 공략에 실패한 데다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에서 로마 해군이 완패한 뒤 해상 운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세등등했던 로마군의 기세는 한 풀 꺾였고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하밀카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용병군으로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면 반드시 패할 테고, 이 이상의 패전은 카르타고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유격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이탈리아 본토 최남부의 로크리와 브룬디시움을 기습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서 북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헤렉테 산(오늘날 몬테 펠레그리노)에 강력한 요새를 세운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로마군 보급부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로마군은 당연히 그의 존재를 거슬려 했고 헤렉테 산에 몇차례 파견했지만, 하밀카르는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가 "교전국 사이에서 매일 일어난 상호 매복, 공세, 및 공격의 모든 동기와 세부 사항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독자들도 지겨워할 게 분명하니 언급하지 않겠다"라며 이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역사가들도 하밀카르의 활약상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하밀카르와 로마군간의 전투 상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폴리비오스는 아래의 설명을 덧붙였다.
하밀카르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적 속임수, 특별한 용기와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정적인 전투는 불가능했다. 로마군 진영 역시 그처럼 강력한 요새를 갖춰서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두 숙영지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매우 짧았다. 소규모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면서도 승부를 낼 수 없었던 주된 이유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투 자체에서 죽었고, 재빨리 퇴각한 모든 사람은 참호 뒤에 숨어 위험을 벗어나려 했다.

하밀카르는 헤렉테 산에서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치고 적 보급로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카타나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쿠마에까지 해상 공격을 벌였다. 비록 로마군에게 점거된 도시를 한 개도 탈환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계속 물고 늘어져서 로마군의 자원을 계속 소모시켰다.

그러던 기원전 244년, 하밀카르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드레파나 인근의 에릭스(현재 몬테 산 줄리아노) 산에 은밀히 이동하여 그곳의 산비탈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에릭스 시는 기원전 249년 로마군에게 점령된 뒤 드레파나를 공격하는 로마군의 후방 보급 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뒷편의 에릭스 산 정상에는 소규모의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에릭스 시를 기습하여 공략한 뒤 그곳에 있던 모든 식량과 무기 창고를 파괴한 후 산 정상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해 적이 진영을 접수하는 것을 막아냈고, 그 사이에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에릭스 산으로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이 역포위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하밀카르는 로마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면서도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양자는 3년간 소규모 전투를 연이어 치렀지만 승부를 쉽게 내지 못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한 번은 보도스토르라는 부하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하밀카르의 지시를 거부하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약탈하다가 로마군의 역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하밀카르는 로마군 진영에 사절을 보내 아군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싶으니 일시적인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집정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가 냉소적으로 답하며 거부했다.
"너희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휴전을 요청해야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이번에는 푼다니우스가 카르타고 진영에 사절을 보내 하밀카르와 같은 요청을 했고, 하밀카르는 이렇게 답하며 받아들였다.
"나는 오직 살아있는 자와 싸운다. 죽은 자들은 이미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로마군이 하밀카르를 상대로 피해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하밀카르의 군대 내부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적지에서 고립된 것에 불안감과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1,000명의 켈트족 용병들이 아군 진영을 로마군에게 내주기 위해 로마군과 접촉했다가 하밀카르에게 발각되어 집단 처형된 사건이 벌어졌다. 하밀카르는 용병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해 군심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하밀카르가 시칠리아로 온 이래 6년간 소모전만 벌어질 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로마 공화국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하나는 이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고 카르타고와 협상해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카르타고를 재기 불능으로 삼은 뒤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하밀카르를 제압하는 것은 수년간의 소모전이 보여주듯 요원했으니, 남은 길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해안 도시인 두 요충지를 공략하려면 해상 봉쇄가 필수적이었고, 그러려면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쳐야 했다.

당시 로마 해군은 기원전 255년 카마리나 해상 사고와 기원전 253년 파이누르 해상 사고로 인해 막대한 인력과 함대를 상실했고, 뒤이어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 참패와 카르타고 해군의 연이은 이탈리아 본토 습격으로 인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전함이 얼마 되지 않았다. 로마의 이같은 사정을 파악한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하고 시칠리아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며,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국고는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에게 부과될 배상금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배 한 척을 건조할 자금을 대출받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은 앞다퉈 사재를 털어 정부에 기부했으며, 돈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은 직접 함선 제작에 뛰어들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약 200척의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가 건조되었고, 기원전 241년 릴리바이움을 해상 봉쇄하려는 로마 해군과 이를 막으려는 카르타고 해군이 조우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아이가테스 해전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