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ffff,#e0e0e0>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 Stanley Tookie William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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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 3세 Stanley Tookie Williams III |
| 출생 | 1953년 12월 30일 |
| 미국 루이지애나 슈리브포트 | |
| 사망 | 2005년 12월 13일 (향년 51세) |
| 미국 캘리포니아 샌퀜틴 센퀜틴 주립교도소 | |
| 국적 | |
| 신체 | 163cm, 136kg[1] |
| 부모 | 아버지 스탠리 윌리엄스 주니어 어머니 루이지애나 윌리엄스 |
| 배우자 | 보니 윌리엄스 (1981년 결혼) |
| 자녀 | 장남 트래븐 윌리엄스 (1997년생) 차남 스탠리 윌리엄스 4세 장녀 줄리안 알퐁스 윌리엄스 |
| 학력 | 조지 워싱턴 예비 고등학교 (퇴학) |
| 종교 | 기독교 |
| 직업 | 작가 |
| 소속 | 크립스 |
1. 개요
미국의 범죄자이자 갱단 두목. 1970년대부터 LA에서 악명을 떨친 양대갱단 중 하나인 크립스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다.그는 1979년 4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최종 사형을 확정받고 복역하던 중, 반폭력운동가가 되어 노벨평화상 후보로 5번이나 올라가 사면 탄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사형 집행을 앞두고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사면 거부로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다.
2. 생애
2.1. 갱단 설립
루이지애나 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작 돌 때 아버지가 가족들을 버리고 집을 나갔으며, 1959년 어머니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갔다. 불안정한 가정 환경 속에서 범죄의 늪에 빠져들었고, 청소년 시절부터 각종 강도짓 및 싸움을 벌여 소년원을 밥먹듯이 들락거렸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갱단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그러던 1971년 18세의 나이에 그는 친구들과 LA을 기점으로 한 악명높은 갱단 크립스를 조직했다.[2] 크립스를 결성한 뒤 보스가 된 그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며 각종 범죄행위에 가담하며 미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79년 2월, 스탠리는 강도를 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가 직원을 등 뒤에서 총으로 살해했고 3월 초에는 한 모텔에서 대만인 가족 3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100달러를 훔친 뒤 도망쳤다. 스탠리는 대만인 3명을 살해한 뒤 시체를 바라보며 'Buddhaheads' 라는 동양인 비하발언을 하며 조롱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3]
재판에 넘겨진 그는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했으나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사형집행시설이 있는 캘리포니아 주 샌퀀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감형받지 못한 이유는 사람을 무려 3명이나 살해했던 것이 컸다.[4]
2.2. 비폭력 운동가로의 전환
윌리엄스가 수감 초기부터 고분고분 죄를 뉘우친 것은 아니었다. 탈옥을 시도한 적도 있으며 동료 죄수와 다툰 적도 있었다. 탈옥을 시도하거나 동료 죄수들과 수시로 싸움을 벌여 징계를 받는 등, '잃을 것 없어 무서운' 사형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불량스러운 수감생활을 했다.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윌리엄스는 개심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는 수감생활 중 2권의 책을 썼는데, 내용은 자신의 청소년기와 갱단 시절의 범죄 및 방탕한 생활을 후회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대충 요약하면 청소년들에게 "나처럼 갱단짓 하지 말고 똑바로 살아라. 그리고 갱단에 환상가지지 마라"가 주요 메세지이다. 비슷한 활동을 했던 조양은과 김태촌이 '난 권력의 하수인이었을 뿐' 이라고 말하는 등 완벽한 개심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줬던 반면 윌리엄스는 진정으로 자신의 지난 삶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때 LA 양대 갱단의 두목까지 지냈던 거물급 갱인 그의 활동은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5]
윌리엄스의 지지자들은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하기도 했으며, 그의 감형 및 사면을 강력히 호소하며 성명운동까지 진행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배우 제이미 폭스, 수잔 서랜던,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실제 주인공 헬렌 프리진 수녀 등도 윌리엄스의 사면을 지지하며 사면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과거 크립스의 일원이었던 그의 부하들 중에서도 갱단 활동을 그만두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윌리엄스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윌리엄스의 지지자들이 그가 갱단을 만들어 사회에 온갖 해악을 끼친 사실을 무시한 채 그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찮았다.[6]
2.3. 최후
지지자들이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사면은 최종적으로 기각, 2005년 12월 13일 새벽 0시 1분에 독극물 주사 투여로 사형되었다. 캘리포니아의 12번째 사형집행이다. 당시 그가 사형을 면하게 해달라는 청원서가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에게까지 올라갔으나 슈워제네거는 최종적으로 기각시키고 그의 사형을 집행했다.여기에 덧붙혀진 에피소드가 있다면 슈워제네거는 당시 기준으로 거의 40여년 전에 사형을 공식적으로 폐지한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 윌리엄스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이후 오스트리아 내에서 슈워제네거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쓴 스타디움의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을 정도다.
[1] #[2]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최대의 흑인 갱단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운 크립스에는 아시안 보이즈를 포함한 동양인 파벌들이 다수 존재하고, 그와 크립스의 초창기를 함께한 OG들 또한 동양인 파벌들을 정식 파벌로 인정했다.[4] 더군다나 고의적이었으며, 돈까지 뺏었기 때문에 1급 살해 혐의가 적용되었다.[5] 갱단이나 범죄의 유혹을 느끼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실제 거기에 몸 담아봤던 어른의 조언만큼 효과적인 교육이 없다.[6] 무엇보다 그가 단순 갱단원이 아니라,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까지 지냈을 정도로 사회적 악명이 높았고 사람을 무려 4명이나 살해한 극악한 죄질의 범죄 때문에 그의 이런 활동도 크게 의미가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