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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7대 가문 중 하나인 고대-중세 이란의 대귀족 가문. 파르티아 제국 시기부터 사산 왕조 시기까지 샤한샤의 대관식을 맡았던, 이란 7대 가문 중 선두인 가문이다. 가문의 영지는 이란 남동부의 시스탄[1]이었다. 수렌-팔라비 가문이라고도 한다.2. 기원
수렌 가문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이란 출신 가문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스키타이 출신 가문이라는 설이다.전자는 수렌 가문이 직접 내세운 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왕 비슈타스파 휘하의 일곱 귀족 가문 중 하나의 후손으로, 신화 속 왕들에게 이란에서 귀족으로 군림할 권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해당 설에 따르면 그들의 영지가 시스탄이 된 이유도 그저 샤한샤의 명으로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스키타이인들을 격퇴하고 그 땅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후자는 수렌 가문의 본관이 되는 영지 시스탄이 유독 넓고 이질적이라는 사실에서 나온 설이다. 시스탄 지역은 일찍이 스키타이인들, 페르시아어로는 사카인들에게 점령된 땅이었다. 이 지역의 스키타이인들은 다하이족 출신인 파르티아에 복속되지 않고 항쟁을 이어갔는데, 그러다가 결국 반독립 지위를 인정받는 선에서 타협하고 파르티아 샤한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이 스키타이인들을 지배하던 주요 가문이 수렌 가문일 것이라 추정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샤한샤에게 시스탄의 지배자로 인정받아, 그 지위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맥락으로는 이 설이 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나, 맥락적 정황은 있어도 결정적 물증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어느 한쪽의 설로 확정할 수는 없는 단계이기는 하다.
3. 역사
이들은 파르티아 건국 초기부터 샤한샤의 대관식을 맡기 시작하여, 이것이 가문의 전통적인 주요 업무가 되었다.또 파르티아 시기부터 후대의 사산조 시기까지도 군사령관직에 유난히 수렌 가와 다른 가문인 메흐란 가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군사 업무도 가업으로 맡은 것으로 보인다. 변방의 막대한 영지에서 나오는 부와 군권을 배경으로 봉건정, 귀족정 성향이 강했던 파르티아의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첫번째 수렌 가의 인물은 바로 카르헤 전투의 영웅 수레나스이다. 수레나스라는 호칭 자체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2] 성씨로 불리는 것으로, 수렌 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53년에 로마 공화국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명예와 부를 위해 파르티아를 공격하자, 파르티아의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직접 출정하여 로마의 속국 아르메니아를 영격하는 한편으로 대장군이자 수렌 가의 당주 수레나스에게 크라수스의 본대를 막게 했다.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토이 1천 가량에 궁기병 9천 가량으로 이루어진 사병들과 1천 마리의 낙타 및 200대의 짐수레로 이루어진 치중대를 이끌고 나아가, 카르헤 땅에서 로마군을 대파하고 크라수스와 그 아들까지 죽여버렸다. 이 승리로 수레나스는 국가의 영웅이 되었는데, 문제는 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파르티아 정치문화 특성 상 대귀족 수렌 가문의 인물이 그렇게 큰 명예를 얻게 되면 곧장 샤한샤 후보로 올라설 수 있어서 황권의 큰 잠재적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스가 더 높은 인기를 얻게 되기 전에 그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해버렸다.
두번째로 역사에 이름을 떨친 수렌 가의 인물은 곤도파레스, 페르시아어로는 곤다바르이다. 곤도파레스는 별명으로, 옛 페르시아식 인명인 비다파르나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추정된다. 곤도파레스는 시스탄 일대를 토벌하여 세력권을 굳힌 후,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인더스 강을 넘어 인도-스키타이 소왕국들을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의 영토는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인더스 강 유역 전역에 미쳤다. 기원후 19년에는 파르티아를 상대로 독립을 선포하고 칭왕하여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수도는 탁실라였다. 이 때문에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수렌 왕국으로도 불린다. 곤도파레스는 46년까지 강력한 통치를 이어가다가 사망했다. 곤도파레스 사후에 왕국의 동부 및 남부는 아들 곤도파레스 2세에게, 서부 및 북부는 조카 아브데가세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하지만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애초에 곤도파레스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로 세워진 왕국이었던 만큼, 범용한 후계자들과 그들 간의 내전으로 왕국은 금세 약해져 2세기~3세기 경에 쿠샨 왕조에 정복당해 멸망하였고, 수렌 가문은 다시 본거지 시스탄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레나스도 처형되고 독립국도 망했지만 여전히 가문은 굳건했다. 이후 수렌 가는 파르티아 황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파르티아가 멸망할 때까지 비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그러다가 파르스의 호족 아르다시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에게 협조하여 사산 왕조의 건국에 기여하였다. 그 후 사산 왕조의 대귀족으로 남았다. 이후 수렌 가문의 인물이 역사 기록에 나올 때마다 샤한샤의 친척이라는 부연설명이 꼭 붙어있어, 황후도 계속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
가문의 다음 걸물은 기독교 성인인 성 그레고리오 계몽자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인물로, 그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 귀족 파르티아인 아나크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산 왕조의 유혹에 당해 아르메니아 국왕 호스로프 2세를 시해했다가 되려 다른 귀족들에게 멸족당했고 그레고리오 본인만 탈출했다. 이후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어 아르메니아를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그와 평생에 걸쳐 얽힌 인물 티리다테스 3세 문서에 나와있다. 또 그레고리오로부터 아르메니아 수렌 분파가 부흥하여[3], 아르메니아 총대주교직을 세습하며 많은 성인들을 낳았고 아르메니아 서부에 큰 영지를 경영했다. 그레고리오의 수렌 분파는 428년, 마지막 남계 후손 성 이삭이 딸만 남기고 사망하여 단절되었고 딸 사하카노이쉬가 가문의 재산을 남편 하마자습 마미코니안[4]에게 상속하며 마미코니안 가로 계승된다.
네 샤한샤를 모신 대재상 메흐르 나르세 역시 수렌 가 사람이다. 나르세는 독특하게도 시스탄이 아닌 파르스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사산 왕가의 본향인 파르스에 수렌 가의 영향력이 닿아있을 만큼 수렌 가가 강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르세는 5세기 초에 재상직에 앉았다. 취임 직후부터 기독교 탄압 및 조로아스터교 후원을 시작했으며, 422년에는 종교 문제로 로마 제국과 싸웠다. 샤한샤 바흐람 5세가 백훈족을 치러 친정을 나가자 섭정을 맡기도 했다. 그는 세 아들까지 모조리 국가의 주요 인사로 만들었다. 장남 주르반다드는 고위 사제, 차남 마흐구쉬나습은 재무장관, 삼남 카다르는 군사령관직에 앉혔다. 이들은 수렌 가문 권세의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또한 장남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르반 숭배를 선호하여 이를 조로아스터교의 주류로 만들고자 움직였으나, 주르반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선에서 샤한샤와 기존 종단에게 가로막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아르메니아에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려다 반란으로 살해당한 치호르 비쉬나습, 호스로 2세의 대 로마 전쟁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운 샤힌 바흐만자데간 등이 수렌 가문의 인물이었다.
이란의 전승에 의하면, 이란 7대 가문은 이슬람 정복 이후 자취를 감췄으나 수렌 가만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현재 수렌 가는 성씨를 누리로 바꾸었고, 그 종가는 시스탄에 여전히 거주하며 막대한 수렌 가문의 보물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카자르 왕조 시대에 카자르 샤가 그들에게 수렌 가문의 보물을 내놓으라고 겁박했으나 그들은 꿋꿋이 버텼다. 1950년대에 이란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미국 탐사대를 초빙하여 아케메네스조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빼앗기지 않고 숨겨놓은 보물을 찾으려 했는데, 이 탐사대가 시스탄 누리 가문의 당주를 만난 후 보물의 상당 부분이 수렌 가문에 흘러 들어갔고 이를 누리 가문이 물려받아 지키고 있으며 이들이 보물을 내놓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탐사를 중단했다는 소문도 유명하다.
참고로 야즈드게르드 3세를 죽인 암살자가 메르브를 다스리던 수렌가문의 마르조반 마호이의 사주를 받아서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되면 이들이 멸망시킨셈이 된다
4. 대중 매체
크킹2 769년 시나리오에서 시르잔 지역에서 등장한다. 다만 족보 구현이 안 돼있는 흠이 있다. 그래도 수렌 가문이라는 상징이 있으니 문장 교체기로 바꾸고 한번 해보자.[1] 헬레니즘 시대에는 드란기아나로 알려진 곳이다.[2] 이란인들은 그가 샤나메에 나오는 영웅 루스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추정해 그를 루스탐 수렌이라 부르기도 하나, 당대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3] 성 그레고리오는 결혼 후 출가하였기 때문에 자식이 있었다.[4] 마미코니안 가문은 당대 아르메니아를 양분하는 대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