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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瑩
(? ~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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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의 인물이자 손오의 문관으로 설종의 아들, 설후의 동생, 자는 도언(道言).2. 생애
처음에는 비부중서랑을 지내다가 252년에 손량이 즉위하자 위소, 화핵, 주소, 양광과 함께 오서를 편찬하기 시작했으며, 258년에 손휴가 즉위하자 하소, 왕번, 우사, 곽탁, 만욱, 누현과 함께 산기중상시로 임명되지만 몇 년 후 병을 이유로 사직한다.264년에 손호가 즉위하자 좌집법, 선조상서을 거쳤다가 태자로 세워졌을 때는 소부를 겸임했으며, 271년에 손호가 설영의 부친 설종의 시를 읽고 감탄하며 설영으로 하여금 시의 뒤를 이어 쓰게 했다. 같은 해에 하정이 성계를 뚫어 장강과 회수를 연결하자는 건의를 해 설영이 1만명을 이끌고 나아갔지만 큰 돌이 너무 많아 시공이 어려웠기 때문에 공사를 멈추고 돌아왔으며, 지방으로 나가 무창좌부독이 된다.
후에 하정이 주살되자 손호는 엉뚱하게 성계의 일을 조사해 설영은 투옥되었다가 광주로 유배되었으며, 화핵이 상소를 올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좌국사가 된다. 후에 무위라는 자가 설영에 집에 머물다가 체포되자 설영은 이번에는 자신이 스스로 광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조정에서 그가 출발하기 직전에 불러 돌아오도록 해 복직한다.
당시 법령과 정무에는 오류가 많으면서 취한 정책은 복잡하고 가혹했는데, 설영은 항상 편리하고 타당한 건의를 했다. 형법을 느슨히 해 부역을 간단히 할 것을 진술함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고 양육하려고 노력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의견 가운데 일부는 손호가 채택해 시행하자 그 공으로 광록훈으로 승진했다.
280년 진나라의 정벌군이 오자 사마주, 왕혼, 왕준의 제의에 따라 손호가 항복할 때 설영은 투항 편지를 만들었으며, 낙양에 도착했을 때 사마염이 직접 불러 장려한 다음 산기상시로 임명했다. 그때 한 유명한 질문이 사마염이 왜 손호의 오가 망했느냐고 묻자 폭정을 일삼아 망했다라고 한 것이다.[1] 설영이 질문에 답하거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모두 조리가 있었으며, 282년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신의 8편과 후한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