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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도에 촬영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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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안장된 왕릉. 당시 고려 행정구역 상 개경 송악산 서쪽 언덕(松嶽 西麓)에 있으며 현 북한의 행정구역상 개성시에 위치해 있다.현종은 1031년 5월 본궐 중광전(重光殿)에서 붕어했다. 같은 해 6월, 태자 덕종이 왕릉에 안장했고 제사절차를 마쳤다.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선(宣) 자는 한자 의미론 베풀다란 뜻이 있고 시법 상으론 '선하고 성스러우며 견문이 넓은 경우를 선이라 한다.(聖善聞周曰宣)'라고 한다. 현종은 국가를 중흥시킨 임금이니 宣 자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1]
2. 유적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당시 구조를 추측한다면, 선릉은 총 4층으로 구성돼있었으며 한 층마다 문인석 1쌍이 마주보고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무덤은 병풍석에 둘러싸여 있고 병풍석엔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현 능역 앞은 옥수수밭이다. 위 사진을 보면 초라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현종의 선릉은 북한 치하의 고려왕릉 중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공개된 자료사진이나 위성지도로 찾아보면 북한의 부실한 문화재 보존 인식 때문에 여기보다도 훨씬 열악한 고려왕릉이 많다.
3. 진짜 선릉의 유적인가?
이 무덤이 정말로 현종의 선릉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조선 세종 때까지만 해도 현종의 선릉은 수호인이 있어 어느 정도 관리가 되었던 것 같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선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 대부분이 관리가 소홀해졌다.조선현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이미 봉토는 다 훼손되었고, 사면석물은 대부분 매몰되어 어느 것이 현종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라고 할 정도.
이후 순조 때와 고종 때 무덤에 왕릉 표석(表石)을 세우고 산지기를 두어 관리했지만, 여러 차례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광무 9년(1905년) “고려 현종(顯宗) 선릉(宣陵)의 산지기가 보고하기를, ‘음력 정월 14일 밤에 알지 못할 어떤 놈이 능을 허물었습니다’라고 하기에 즉시 달려가 봉심하니 능이 허물어 진 곳이 3분의 1이나 되고 앞면의 판 곳은 깊이가 3, 4자 가량 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제1릉을 현종의 선릉으로 새로 파악한 것은 조선후기였고, 발굴된 유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제1릉을 선릉이라고 확증하기는 어렵다는 것.
선릉군 제1릉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제2릉이 자리 잡고 있고, 제1릉에서 남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제3릉이 있다. 제2릉과 제3릉은 현재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다. 선릉에 비해 제2릉과 제3릉이 규모 면에서 조금 작은 편이다. 현종의 제1비인 원정왕후가 1018년(현종 9) 죽은 뒤 화릉(和陵)에 장사지냈는데, 현종의 무덤에 가깝게 조성됐다는 점에서 두 능 중 하나가 화릉일 가능성이 있다.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2], 제4비인 원혜왕후[3]의 무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