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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크라/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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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000년3. 2001년4. 2002년5. 2003년6. 2004년7. 2005년8. 해체 후

1. 개요

샤크라의 활동 내역을 정리한 내용이다.

2. 2000년

같은 시대에 경쟁했던 걸그룹 라이벌들과 비교했을 때 누가 봐도 차별화된 확고한 콘셉트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샤크라의 존재감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여기에다 데뷔곡 '한'의 곡 퀄리티도 뛰어났기 때문에 가요 차트를 차례차례 정복하기 시작했다. 무대 의상이나 악세사리도 오히려 다소 심플했던 초기 활동보다[1] 뒤로 갈수록 굉장히 화려해지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확실히 그 해의 신인들 중에서 눈에 띄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1군 걸그룹만 섭외된다는 여러가지 CF도 많이 찍었다.

그리고 무려 데뷔 65일차에 지상파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했다. 당시 걸그룹 3대천왕이라 불렸던 S.E.S., 핑클, 베이비복스의 기록을 모두 넘어서는 기간이다.[2] 음반 판매량도 16만 장으로, 베이비복스의 4집보다 많이 팔리며 신인으로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3] 당시의 이들이 얼마나 단기간에 파급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 곡의 키는 굉장히 높으며 후렴 부분에서 수시로 3옥타브 솔을 찍어대고[4], 후반부에서 1키 올라가서 전조되기 때문에 최고음은 무려 진성 3옥타브 라♭(!). 가성 최고음은 려원의 파트의 3옥타브 시다. 물론 라이브 영상은 찾아볼 수 없다 그걸 어떻게 불러


그 뒤 '한'의 인기를 이어 신나는 댄스 후속곡인 'Hey U'도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SBS SBS 인기가요에선 차트 최고 4위, KBS 뮤직뱅크에선 3위까지 랭크되었다.

연말에는 캐롤 앨범 'Lonely Christmas'를 발표하면서 1집의 인기를 이어갔다. 반응이나 퀄리티도 꽤 괜찮았고, 겨울 시즌 이벤트성 깜짝 활동으로 팬들의 호응을 얻었다. 봄에 데뷔해서 겨울까지 한 해 동안 연이어 왕성한 활동을 하며 히트치는 데 성공했고, KBS 가요대상을 제외한 MBC 10대가수 가요제, SBS 가요대전, 골든디스크상, 서울가요대상, 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KMTV 가요대전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으며 2000년 신인가수상을 휩쓰는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를 했다.


3. 2001년



제각기 있기 였기 때문이기 사랑했기 때문이기 하루지기 이야기 이야기 잊지않기 제각기 이기적이었기 때문이기 사랑했기 때문이기 영원지기 이야기 이야기 제각기 있기 였기 때문이기 우리의 이야기 이야기
- 샤크라 2집의 타이틀 곡, <끝>의 도입부 랩이다. 지금도 샤크라의 팬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랩이다.

1집이 인도동남아 사이의 컨셉이었다면 2집은 아프리카 컨셉을 들고 왔다. 황보에 따르면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을 찾다가 아프리카 컨셉을 발견했다고 한다. 2집의 타이틀곡 <끝>은 SBS 인기가요에서 4월 마지막주 1위를 차지했고, ‘뮤직뱅크’와 ‘생방송 음악캠프’에선 1위 후보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SBS 인기가요’ 상반기 결산에도 출연하면서 그 인기를 이어갔다. 특히 황보의 랩 파트인 ‘야끼! 야끼!’[5] 파트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끝> 이외에도 <아니야>, <주연은 너와 나> 등의 상당한 명곡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서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앨범이다. MBC 음악방송에서는 타이틀곡 제목인 '끝'이라는 단어가 너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심의에서 반려되어 영어 제목인 'END'로 활동했다.[6]

다만, 원주민 의상이라는 컨셉 탓에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해외에서 뒤늦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2020년대 기준으로 걸그룹 티아라의 'Yayaya'나 MC몽의 Indian Boy와 더불어 '문화적 전유(도용)', '인종 차별'이라며 유튜브에 게재된 뮤직비디오나 당시 음악방송 클립 댓글에서 외국인들에게 "지금 나왔으면 세계적으로 논란이었을 앨범"이라며 눈초리를 받고 있기도 하다. 정치적 올바름 예민한 해외 네티즌들의 분위기 탓이다. 일례로 셰어 역시 70년대에 발표했던 Gypsys, Tramps & Thieves같은 음반들이 문화점유라며 종종 욕을 먹는 상황이니...


이후 2집 후속곡이었던 <Oh My Boy>[7], 당시 야구선수에서 방송인으로 막 전향해 인기를 쌓기 시작하던 강병규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SBS 인기가요 기준 최고 8위까지 오르며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허나 당시 소속사에 재정난이 있었는지 음악 방송에서의 샤크라의 의상 퀄리티도 무대를 오를수록 점점 떨어지는 등 예산 부족으로 추정되는 행보를 계속 보여줬다.[8] 이런 과정에서 2집 앨범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팀의 맏언니이자 리더였던 이니가 유학을 선언하고 팀에서 탈퇴했다.

여담으로 끝 뮤직비디오는 나인 인치 네일스The Perfect Drug 뮤직비디오를 대놓고 표절한 것이다. 다만 그 당시에는 국내에서 NIN가 그리 인지도 있는 뮤지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다.

4. 2002년


2002년부터 황보로 리더가 교체되었으며, 새로운 메인보컬 멤버인 보나(본명 최현정)[9]가 합류했다.[10]

이후 3집을 통해 <돌아와>[11]를 발표했으나, 가창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발라드를 냈던 터라 결과는 참혹했다. 그래도 곡 자체는 호평을 받았고 가사 역시 이상민이 작사했다.

뮤직비디오도 해외 로케를 진행하긴 했으나, 퀄리티 자체가 조악하기 그지 없어 혹평을 받았다.해외에는 왜 간 건지 전체적인 콘셉트를 동남아쪽 베트남을 모티브로 잡아 무대 의상도 올블랙 드레스에 시뻘건 고추장 립을 하고 올랐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립스틱 색은 점점 연해졌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고, 당시 트렌드에 맞지 않았을 뿐 현재는 강렬한 레드립이 유행인지라 최근 반응들은 이 때의 메이크업이 예쁘다는 평이 많다. 또한 1, 2집 활동 때는 립싱크만 했다면, 3집부터는 라이브도 시도했다.

3집의 후속곡으로는 데뷔곡을 다분히 의식해 만든 듯한 수록곡 <다>라는 인도풍 댄스곡으로 아주 짧게 활동했다. <한 (Come A Come)>과 같은 인도풍의 곡이었으나, 곡과 무대 자체가 리즈 시절보다 못해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5. 2003년


2003년엔 4집 <TOMATO>의 타이틀곡 <난 너에게>[12]로 활동했다. 4집에선 기존의 독특한 오리엔탈 컨셉트에 얽매여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일절 배제해 친근하고 대중적인 모습으로 나왔었다[13] . <난 너에게>는 어느 정도 히트는 했다고 평가받았지만[14], 이전의 히트곡들인 <한 (Come A Come)>, <끝 (End)> 때의 뜨거운 반응은 얻지 못하고 활동을 접었다. 또한 기존 멤버들의 계약 만료기간이 임박했던 것 때문에 후속곡 활동도 없었다.

샤크라는 1집 때 A&B 엔터테인먼트[15] 소속이였으며 이 회사가 윈섬미디어, 천일기획과 합병한 뒤 사명을 Jam 엔터테인먼트로 바꾼 다음 3집 앨범까지 발표하고, 4집부터 키스엔터테인먼트라는 신생 기획사로 넘어가게 됐는데 이게 문제였다.[16] 이곳엔 DSP미디어와 계약이 종료되어 넘어온 비슷한 신세의 클릭비도 샤크라와 같이 넘어왔지만 클릭비도 계약 문제로 고생을 했을 정도로 체계가 안잡힌 회사였다[17].

또 윈섬미디어 소속이던 파파야 역시 활동 내내 그 회사에서 급여도 못받았다가 윈섬미디어가 천일기획, A&B와 합병하며 소속사 사장이 두 명인 상태가 되자 내부 분란이 생겨 결국 해체됐다고 밝힌 적이 있어서 이 회사들과 연관된 스타들은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한 듯하다.

6. 2004년

가장 먼저 팀을 이탈한 것은 려원. 연기자로서 전향하기 위해 활동을 위해 팀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4집 활동을 너무 뜬금없이 활동을 종료해 팬들 사이에서 ‘려원이 재계약을 하지 않고 연기자로 돌아서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많이 돌았다.

당시 려원이 4집 활동을 병행하며 시트콤 등지에서 개인 활동을 시작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엔 지금처럼 그룹 안에서 개인 활동을 허락치 않는 대중들의 암묵적인 룰이 있었고, 4집이 나올 쯤엔 그런 분위기가 점차 완화되는 시점이었다. 그 뒤 2010년에 ‘슈퍼스타 K 2’에 참여했던 멤버 보나가 “샤크라 해체 이유에 려원의 연기자 선언 때문에 그런 얘기가 많이 있던 것을 알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게다가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개인을 위해 팀에서 잘 나온 셈.

이후 공식 해체가 되기까지의 약 1년여간, 남은 멤버들은 셋이서 정말 눈물의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위에 서술했듯 이 키스엔터테인먼트는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줬는데[18], 안타깝게도 려원을 제외한 3인의 멤버가 단기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앨범을 내고 어떻게든 활동을 시켜줘야 했는데, 회사 재정난의 문제로 앨범조차 내지 못했다. 보나가 후에 밝힌 바에 따르면 막바지 1~2년간은 정산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7. 2005년

파일:external/dimg.donga.com/a03.jpg

2005년에는 섹시 컨셉으로[19] 당시 유행하던 모바일 화보를 촬영했는데, 콘텐츠 제공업체가 이걸 마치 성인용 누드화보처럼 홍보하는 바람에[20] 막대한 이미지 훼손을 겪었고, 이때 샤크라가 누드화보를 찍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소속사는 제공업체에게 법적대응을 했으나, 해당 업체는 '관례적인 마케팅'이라고 응수했다.

악재가 겹치며 멤버들은 이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고, 대중들은 이 3인조로 바뀐 샤크라의 행보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배 걸그룹들인 쥬얼리슈가가 뒤늦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약진하고 있었고, 선배 & 동료 걸그룹은 해체하거나 일찌감치 대중의 관심에서 뒤쳐지는 등의 풍토 속에 있었다. 결국, 이들 역시 공식해체를 선언하면서 가요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1][22]

8. 해체 후

많은 사람들이 샤크라의 해체 년도가 2005년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확히는 2006년이다. 2005년 11월에도 샤크라는 해체는 없다며 남은 2명의 멤버를 통해 팀을 재건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샤크라 '해체는 없다' 이후 2006년 6월말 황보가 팀을 탈퇴하자 자연스럽게 샤크라도 해체되었고# 2006년 10월말 작성된 기사에서는 샤크라를 '해체된 그룹'이라 표기하기에 이른다. 자료

정려원이나 황보 등은 각자 배우, 가수, 예능인으로서 기존 인지도를 활용해 왕성한 개인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막내 이은 역시 잠시 연기자로 모습을 잠깐 보였다가 곧바로 연예계 은퇴 후 재벌가 며느리로 입성했다. 그러나 보나는 유일하게 키스엔터테인먼트에 남아 재계약을 하며 눈물의 행보를 이어갔다.

2008년에는 김상혁의 당시 소속사였던 아스틴 엔터테인먼트가[23] '샤크라 노바'라는 이름으로 2기 멤버를 뽑는다고 당시 유행하던 UCC 오디션을 개최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인기가 꽤 많았던 그룹인데다 <한 (Come A Come)>의 파급력이 꽤나 크다보니, 멤버들이 단골로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샤크라 재결합 질문이다.[24] 막내 이은은 “언니들이 한다면 한다”고 말했으나, 황보와 정려원은 “재결합은 없다”고 발언했다. 특히 황보는 여러 매체를 통해 “절대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등 어지간히 싫은 듯하다. 첫 솔로 앨범을 내기 직전의 기간에는 심경 인터뷰를 통해 2기도 내며 팀명을 지키고 싶어했었을 정도로 애착과 미련이 커 멤버들이 팀을 탈퇴할때도 만류할 정도로 유지시키고 싶어했었으나 점점 본인이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심경의 변화가 온 것으로 보인다.[25][26] S.E.S.부터 핑클, 베이비복스, 디바, 쥬얼리가 공식 혹은 비공식으로 재결합 무대를 보여준 것에 대조되어 안타까운 부분.


[1] 골든힛트쏭이라는 방송에서 데뷔 초기 활동 영상을 방영하며 착장을 조롱한 적이 있다.[2] S.E.S.는 86일, 핑클은 127일, 베이비복스는 761일이 걸렸다. 베이비복스는 여기 끼기엔 너무 길긴 하지만... 이 기록은 이후 2, 3세대 걸그룹을 모두 다 합쳐도 미쓰에이 22일, 2NE1, BLACKPINK 13일, 씨야, ITZY(11일)뿐일 정도로 흔치 않은 기록이다. 이 중에선 ITZY가 최단 기간 데뷔 1위며 어떤 걸그룹도 현재까지 깨지 못하는 타이 기록이다.[3] 이 해 걸그룹 중에는 S.E.S.의 4집이 가장 높은 판매량이었다.[4] 소찬휘 'Tears'와 같은 음이다.[5] ‘이야기’를 세게 발음한 것이다.[6] 같은 일례로 베이비복스의 7집 타이틀곡 'Xcstasy'가 마약류 이름과 같아서 SBS에서 심의 불가되어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변경해 활동하기도 했다.[7] 룰라의 곡을 다수 맡았던 이상민 사단의 작곡가 신상근(95년 데뷔한 혼성그룹 '루키' 출신)과 이상민이 만든 곡이다. 황보 파트에 이상민 목소리를, 려원 파트에 채리나 목소리를 넣으면 그대로 룰라 곡이 될 정도로 이상민의 색이 강한 레게풍 댄스곡. 실제 모 방송에서 룰라의 채리나는 이상민을 향해 '우리가 녹음했던 노래중에 샤크라한테 넘어간거 있지 않나'란 말을 해 이 곡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 가사에 '6 Root of Reggae six(6집) 앨범이었어'가 뜬금없이 나온 것이 그 증거. 룰라의 정규 6집은 99년에 나왔다.[8] 연말 시상식 무대에도 올랐으나, 정말 무성의함과 저예산의 심각함을 느낄 수 있다.[9] 소속사가 주관한 오디션으로 합격했다.[10] 2018년 모 유튜버 방송에 나와 밝혔는데 당시 이니 탈퇴 후 3인조로 가기로 멤버끼리 합의가 됐었는데 소속사측에서 멤버들에게 고지 없이 자신을 합류 시켜 기존 3인의 멤버는 자신에게 무관심했고 어색함이 감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점차 활동하며 서로 마음을 열었고 4집부터는 친해져 의기투합 해보려던 찰나...회사가 망했어요라고...영상은 아래 '보나' 카테고리에 링크.[11] 맨 마지막의 “그대만큼 나도 슬퍼요. 하지만...” 내레이션은 배우 권상우가 담당했다.[12] 과거 안성준 사장이 작곡해 피아노 3집 앨범에 올린 <체념>을 리메이크했다.[13] 다만 '이미지 변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1집 시절부터 샤크라는 꾸준히 '컨셉이 강한 곡' + '발랄한 댄스곡' 두가지 조합으로 나왔다. 예를 들어 인도풍인 '한'의 후속곡으로 'Hey you'를 내놓는 식. '난 너에게' 또한 'Hey you'나 'Oh my boy'같은 곡들의 연장선에 있다.[14] 3집보다는 확실히 나은 성적이며, 당시 유일하게 지상파 차트제를 운영했던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10위권에 들 정도로 선전했다.[15] 샤크라의 소속사 사장이 이상민으로 알려져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이상민이 대표 프로듀서이자 룰라 시절 스탭들을 모아 만든 회사가 A&B엔터였고 대표 역시 룰라 매니저 출신이 대표 이사였다.[16] 3인조 보컬 그룹 '피아노'의 메인보컬로 활동하던 안성준이 세운 기획사.[17] 황보가 무한걸스 '예능의 여왕'특집에서 '샤크라 시절 회사를 옮기고 나서 정산은 못 받았는데 리더라고 세금폭탄을 맞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팬들은 그게 이 시기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보나 역시 샤크라 막바지 1~2년간 정산을 못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18] 2005년 클릭비 해체 당시 김태형의 법률대리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2004년 9월부터 약 1년 간 개런티를 받지 못했고, 그 결과 모 멤버는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클릭비가 저 정도였으니 샤크라가 어떤 사정이었을 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사장이라는 작자는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 국회의원 보선에 공천을 신청하고, 당시만 해도 이명박의 심복으로 통했던 정두언을 4집 앨범 가수로 만들어주는 등 정치놀음에 여념이 없었다.[19] 컨셉이 섹시했을 뿐이고, 일반적인 잡지화보 정도 수준이다.[20] 모바일 인터넷 시장이 태동하던 2000년대 중순에는 이러한 여자 연예인의 누드화보 열풍이 일었었다. 비슷한 시기 클레오도 소속사의 누드화보 제안 때문에 큰 내홍을 겪었다.[21] 정확히는 2005년에 막내 은마저도 탈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샤크라는 황보, 보나 2명만 남게 되었고, 2006년에 황보까지 탈퇴하게 되면서 해체되었다.[22] 공교롭게도 베이비복스 역시 2004년에 심은진이, 2005년에 윤은혜까지 탈퇴하게 되면서 베이비복스도 김이지, 이희진, 간미연 3명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에 김이지, 간미연도 탈퇴하게 되면서 샤크라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23] 키스엔터는 샤크라 해체 직전인 2005년 미국 롭슨사에 인수되어 '롭슨 코리아'로 사명을 변경했다. 샤크라라는 상표권만 넘어간 듯.[24] 특히 ‘무한도전’에서의 토토가 이후 이런 질문이 많았다.[25]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샤크라가 1위까지 했던 인기 걸그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멤버들은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 이름으로 된 통장이 있었으나 회사가 가지고 있었고, 그 회사가 사기를 치면서 세금이 수 천만원까지 나와 오랫동안 빚을 지고 살았다고 한다. 또 그 뒤로 수천만원을 황보가 리더라는 이유로 혼자 몇억을 10년 동안 갚았다고 한다. 다만 샤크라라는 그룹이나 황보 개인이나 워낙 거쳐간 소속사가 많아 어느 회사가 문제를 만든 건지는 불명확. 다만 보나의 인터뷰로 미루어 보면 키스엔터테인먼트 시기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26] 이때 소속사 사장이 이상민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상민은 사장이 아니라 프로듀서였다. 황보도 딱히 이상민에게 나쁜 감정은 없는지 아는형님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었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 CEO는 빚이 좀 있어야 한다며 위로해주었다고 언급하는 등 사적으로 잘 교류하고 지내는 듯. 려원미우새에 출연해서 예전 상민오빠보다 지금이 훨씬 멋지다며 응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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