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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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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누키의 역사
2.1. 고대2.2. 중세2.3. 근세
2.3.1. 쇼쿠호 ~ 에도 막부/이코마 시대
2.4. 카가와 현
3. 사누키의 성
3.1. 중세의 성
3.1.1. 카츠가 성3.1.2. 아마기리 성3.1.3. 토라마루 성
3.2. 근세의 성
3.2.1. 다카마쓰 성3.2.2. 마루가메 성3.2.3. 히케타 성
4. 여담

1. 개요

[ruby(讃岐,ruby=さぬき)]

고대 일본율령국. 오기칠도 중 난카이도에 속하며 지금의 카가와현으로 별칭은 산슈(讃州)이다.

시코쿠에서 혼슈로 건너가는 해로의 대부분이 사누키국에 밀집해있으며 야마시로국(山城国), 이즈미국(和泉国)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 중세, 근세 어느 때나 교통의 요지로 평가받는 중요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언제나 주요 전장이 되어 전쟁에 시달렸으며 역으로 해로를 이용해 타국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하였다.

2. 사누키의 역사

2.1. 고대

고대 부터 국가의 요소로 평가받아 방어의 목적으로 중요히 다루어져 성을 쌓아 방어거점으로 이용하였다.[1] 헤이안 시대에도 사누키를 중요 거점으로 취급하였으며 겐페이 전쟁 당시 주된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2.2. 중세

중세에 들어와서도 중요성은 변치 않았다. 사가미노쿠니에서 호족들이 우루루 몰려와 토착 세력화하였고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바다와 면접하기에 교통의 요지로 평가받아 항구도시가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 근세에는 이 항구도시들이 발전을 이루어 에도는 물론이고 조선동남아시아 일대에까지 무역선을 보내는 등 상업과 운송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2.2.1. 무로마치 시대

1336년, 아시카가 타카우지무로마치 바쿠후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타카우지는 아시카가 씨의 일문이자 개국공신인 호소카와 씨를 여러 지방의 슈고직에 임명하였는데 이 중 호소카와 아키우지(細川顕氏)를 사누키 슈고로 임명하여 사누키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사누키 슈고는 호소카와 씨가 역임하게 되었으며 체제가 어느정도 갖춰지자 호소카와 케이쵸 가문이 사누키 슈고를 세습하게 되었다.

오안(応安) 연간에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부름을 받아 야스토미 씨(安富氏)가 하리마노쿠니에서 사누키 미키군(三木郡)으로 건너왔다. 야스토미 씨는 미키 씨를 이어 히라키 성(平木城)에 들어갔다.

쵸로쿠(長禄) 연간, 야스토미 씨 당주 야스토미 모리나가(安富盛長)는 산가와군(寒川郡)의 츠루와(鶴羽), 카베(鴨部), 시도(志度) 3향을 산가와 씨로부터 분양받게 되었다. 이에 모리나가는 아마타키 성(雨滝城)을 쌓아 산가와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2.2. 전국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03년, 아와 슈고를 맡는 호소카와 요시하루(細川義春)의 차남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케이쵸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1507년, 마사모토에게 사관해있던 호소카와 스미유키(細川澄之) 파인 코자이 모토나가(香西元長)가 야쿠시지 나가타다(薬師寺長忠) 등과 모의해 그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누키에의 호소카와 씨는 단절되었으며 사누키의 지배권은 모토나가 일당을 제거한 아와 호소카와 씨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렇게 사누키에 아와노쿠니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자 사누키 슈고다이에 필적하는 이익을 뽑아내는 소고 씨의 당주 소고 카게시게(十河景滋)가 아와 호소카와 씨에 사관해있는 미요시 모토나가사남을 양자로 받아 가문을 잇게 하였다.

1539년 10월, 호소카와 씨의 도움으로 아마고 아키히사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탈환할 수 있었던 하리마 슈고 아카마츠 마사무라가 다시 한 번 아와 슈고 호소카와 모치타카(細川持隆)에 지원 요청을 보내왔다. 이에 모치타카는 빗츄노쿠니로 진군할 수밖에 없게되어 사누키의 시로미네지(白峯寺)에 미요시 짓큐와 함께 킨세이를 발급하고 사누키에 군사를 집결시켰다.[2]

1558년, 미요시 씨는 쇼군을 등에 업게 되었고 짓큐도 이에 맞춰 사누키의 마지막 유력 호족 카가와 씨를 굴복 시키기 위해 카가와 씨의 본거지인 아마기리 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짓큐는 쇼코지를 항구 도시 노하라로 옮긴 다음 그들을 보호해주어 절을 거점으로 노하라를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짓큐는 이번 카가와 공략에 이요의 코노 씨와 해적들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전략에 만전을 가하였다. 이윽고 전쟁은 시작되어 서사누키는 이름있는 절이 불타버릴 정도로 격렬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카가와 씨의 당주 유키카게는 험준한 아마기리 성에 기대어 대항하였으나 짓큐가 압도적인 군세로 압박해 들어가자 결국 유키카게는 짓큐와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렇게 짓큐는 사누키의 유력 호족을 전부 굴복시켜 사누키를 미요시 세력의 산하에 넣는 것에 성공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않아 키나이로 진출한 짓큐가 전화에 말려들어 전사하였다. 짓큐의 키나이 진출 이후 사누키는 그의 가신인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통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짓큐가 사망하자 나가후사가 그 뒤를 이어 사누키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는 1564년, 지소지(地蔵寺), 난류지(南隆寺), 나베야게도죠(鍋屋下道場), 쇼츠지(聖通寺)에 각각 킨세이를 발급하여 주군 미요시 나가하루를 보좌하였다.

나가후사는 미요시 가문의 확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키나이 미요시 가문이 미요시 나가야스 세력과 마츠나가 히사히데 세력으로 분열하자 나가야스가 속하는 미요시 산닌슈를 지원, 사누키와 아와의 군세를 이끌고 모리 가문이 통치하는 산요와 키나이를 전전하기 시작하였다. 산닌슈의 세력은 실로 압도적이어 히사히데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키나이 진출로 인해 사누키 세력은 다시 한 번 큰 피해를 보며 키나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렇게 동 시코쿠의 세력이 약소해지자 산요모리 씨가 사누키국으로 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3] 당시 모리의 영지에는 미요시 세력에 항복했다 겐키 연간에 모리 씨를 의지해 도망쳐온 카가와 씨가 거처하고 있었는데 노부나가에 쫒겨나 빈고노쿠니에 정착한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카가와 씨의 사누키 복귀를 탄원하는 서장을 작성하였다.[4] 이에 당시 모리 씨의 당주 모리 테루모토가 요시아키의 의견을 받아 들였고 군사를 사누키로 출진시켰다. 모리 세력은 나가오, 하유카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며 카가와 씨를 아마기리 성에 입성시키는 것에 성공하여 카가와 씨 사누키 복귀의 임무를 완수하였다.[5]

한편 시코쿠로 쫓겨난 산닌슈와 나가후사의 선택은 항쟁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세를 이끌고 노부나가가 옹립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공격하였으며 이시야마 혼간지와 손을 잡아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가하여 나가후사는 다시 한 번 사누키의 군사들을 키나이에 들이 부었다.

이처럼 나가후사는 미요시 가문의 세력확장, 노부나가의 타도를 외치며 전형적인 주전파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와는 다르게 짓큐의 장남이자 그의 주군인 미요시 나가하루는 오다 가문과 손을 잡는 것이 미요시 가문의 후사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온건파였다. 이미 미요시 가문 내에서도 군사를 들이 붓는 나가후사의 전략에 회의감이 팽배하였기에 결국 나가후사는 나가하루에게 공격받아 사망하였다.

나가후사를 토벌한 나가하루는 노부나가에게 화친의 문서를 보냈으나 노부나가는 오히려 이를 기각, 미요시 가문을 적대 세력으로 취급하게 되면서 미요시 가문은 고립되었다. 이런 사누키의 정세 속에 호족들은 몰락해 가는 미요시 가문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 나가후사의 보좌없이 시코쿠를 관리하던 나가하루마저 사망하게 되자 사누키는 본격적으로 외세의 침공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가하루 생전에도 사누키를 침공하며 간을 보던 테루모토는 대놓고 군사를 파견하여 모토요시 성(元吉城)을 먹어버렸다. 이후 사누키의 호족들이 군사를 파견하여 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또한 시코쿠 통일을 노리는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본격적으로 사누키에 진출하여 서쪽에서 부터 차근차근 영지를 점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하루의 후임은 사카이에 거처하고 있던 그의 동생인 소고 마사야스가 맡게 되어 사누키, 아와 양 쿠니를 통치하게 되었다. 마사야스는 이런 침략에 사누키와 아와의 호족을 결집시켜 싸워나갔으나 명백한 열세가 계속되었다. 유키카게는 모토치카의 차남을 양자로 들여 항복하였으며 서, 중앙 사누키의 호족과 그 가신들은 대부분이 모토치카에게 굴복하였고 소고 씨의 본거지인 소고 성에 위협이 될 정도로 사누키는 모토치카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마사야스는 결국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연줄을 놓아 우방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581년 시와쿠에 분고국의 배가 입항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오다 가문 휘하에 있는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최후의 생존자인 미요시 야스나가가 노부나가에게 중용받고 있었던 데다 야스나가 또한 히데요시와 연줄이 있었기에 이 소식은 빠르게 노부나가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노부나가는 모토치카와 연합하여 미요시 가문과 모리 가문을 쓸어버릴 생각이었으나 모토치카의 진군 속도가 자신이 생각했던 타이밍과 맞지않아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마사야스의 지원에 동의하여 기존의 오다 - 쵸소카베 연합 체제를 뒤엎고 사누키에 야스나가를 파견하여 오다 - 미요시 연합을 구성하였다.

이 사건으로 모토치카와 노부나가는 극도의 대립 관계가 되었고 모토치카가 미요시 공격에 소극적인 제스쳐를 취했음에도 노부나가가 시코쿠 정벌을 공표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삼남이자 야스나가의 양자가 된 오다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하는 압도적인 군세를 파견하기로 했으며 사누키에 노부타카를 총괄자로 임명하여 동 시코쿠와 키나이를 오다 친족으로 구성하는 정치 계획을 실행할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 계획은 쵸소카베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한 모반에 의해 실행되지 못한채로 끝이 났다.

사누키에 오기로 예정돼있던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포섭하여 미츠히데를 토벌하러 갔으며 야스나가 또한 이런 급박한 정세의 영향으로 인해 키나이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사누키는 모토치카의 공격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다.

예상대로 모토치카는 사누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모토치카의 차남 카가와 치카카즈를 총대장으로 하는 사누키 정벌군은 코자이 씨를 굴복시키고 소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공성전은 치카카즈의 군세가 우세함을 가져갔으나 소고 씨의 분가인 마에다 씨의 다방면에 걸친 사보타주 공격으로 소고 성을 구원하여 치카카즈의 군세를 철퇴시켰기에 겨우겨우 낙성만은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사누키를 통치하는 마사야스가 모토치카에게 패배하게 되어 쇼즈이 성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결국 마사야스는 아와를 버리고 사누키로 달아나 토라마루 성을 본성으로 하여 본격적인 농성체제에 들어갔다. 또한 마사야스는 아버지가 노하라로 옮겼던 절을 소고 성 주변으로 옮기게 했으며 야스나가가 히데요시의 조카를 양자로 받고 미요시 요시츠구의 가신단을 인계받아 천하인의 보좌관이자 미요시의 정통을 표방하자 마사야스는 키나이 미요시 가문의 돌림자인 요시를 써 자신의 이름을 요시카타로 개명하는 것으로 대응해 현재 시코쿠에 있는 미요시 가문이야 말로 미요시 가문의 정통이라고 표방하였다.

아와를 정복한 모토치카는 자신이 직접 사누키로 향하여 소고 성을 낙성 시키는 것으로 마사야스의 제스쳐에 대응하였다. 이렇게 모토치카는 사누키의 주요 거점이던 아마기리 성, 카츠가 성, 쇼츠지 성, 소고 성을 먹게 되었으며 마사야스는 미요시 가문의 본거지였던 아와를 잃어버리고 사누키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이제 마사야스는 농성밖에 수가 없었다. 아와의 토사도마리 성에서 농성하는 칸 씨와 연합하여 모토치카의 공세를 최대한 막는 쪽으로 전략의 가닥을 잡았고 옛전에 연줄을 놓을 히데요시에게도 연락을 넣어 최소한의 방비를 끝마쳤다.

이윽고 모토치카는 동 사누키에 군사를 진격시켰다. 마사야스의 지원 요청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아와지노쿠니를 영지로 하는 센고쿠 히데히사를 파견하여 사누키 세력을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히데히사는 모토치카에 의해 격파 당했으며 동 사누키의 유력 호족이었던 산가와 씨와 야스토미 씨마저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였다. 결국 모토치카는 사실상 사누키 정복을 성공하였고 이름만 남은 국주 소고 마사야스의 토벌을 위해 토라마루 성을 포위했다.[6]

이후 모토치카가 어떻게 사누키를 통치하려 했는지는 지금에 와선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남겨진 문서도 없고 무엇보다 시코쿠를 통일한 직후 1년도 되지않아 시코쿠에 히데요시의 군세가 들이 닥쳤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토쿠가와 이에야스같은 쟁쟁한 상대들을 제압했으며 전국 통일의 첫 발로 센고쿠 시대 무역의 거점이던 동 시코쿠 - 키나이의 완전제패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히데요시는 야스나가의 양자였던 그의 조카, 미요시 노부요시를 히데츠구로 개명 시켜 자신의 가문으로 복귀시켰다. 이는 곧 야스나가를 히데요시 정권에서 배제한다는 뜻으로, 사실상 미요시 가문의 시코쿠 복귀 명분을 없애버렸으며 시코쿠 정벌의 총대장은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가 맡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3방면에서 쳐들어 오는 압도적인 전력과 상대하게 되었다. 사누키 방면을 담당하는 하시바군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쿠로다 요시타카라는 엄청난 거물들이 맡았고 사누키의 쵸소카베 군의 총대장은 헤와 치카타케가 맡게 되었다. 결과는 역시 하시바군의 압승. 헤와의 작전은 하시바군에게 쉽게 간파당하였고 총대장이 관리하기 힘든 요소요소를 떨어뜨리는 전략을 펼처나가 하시바군은 쉽게 사누키를 정복하였다.

시코쿠가 쉽사리 함락당하자 모토치카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평정 이후 쵸소카베 가문으로 전환하여 사누키를 공격하였던 카가와 씨와 코자이 씨는 카이에키 당했으며 야스토미 씨는 후에 들어오는 센고쿠의 가신이 되어 중세 사누키와 키나이를 호령했던 호소카와 4천왕은 몰락하였다.

그후 이어진 시코쿠 쿠니와케(四国国分)에서 사누키의 최대 영지는 히데이에나 요시타카가 아닌 히데히사가 받게 되었다. 야스나가는 이 시코쿠 쿠니와케 당시 미요시의 본거지인 아와가 아닌 카와치노쿠니를 받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그가 기록에 나타나는 일은 더이상 없게 되었다.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한 마사야스 또한 아와나 사누키를 할양받지 못하고 사누키의 최대 영주인 센고쿠 히데히사 휘하 사누키의 소고 마고로쿠로(十川孫六郎)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부터 이어진 호소카와 - 미요시 가문의 사누키 지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누키로 들어온 히데히사는 자신의 거점을 쇼츠지 성이 있던 우타즈로 정하였고 새롭게 히라야마 성을 쌓아 사누키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마사야스는 자신의 본거지였던 소고 성이 있는 야마다에 다시 정착했으리라 추측한다.[7]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의 다음 목표는 규슈였다. 분고노쿠니오토모 소린에게서 직접 원군 요청을 받은 히데요시는 사누키의 히데히사를 총대장으로 하여 제압한지 1년도 안된 사누키와 토사의 군세를 규슈로 파견한다. 호기롭게 규슈에 도착한 히데히사는 오토모 세력이 낙성의 위기에 처했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헤츠기가와에서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히데히사는 이에히사에게 완전히 압도 당하여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장에서 이탈해 곧바로 규슈에서 퇴거하였다. 히데히사를 따라 사누키 세력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마사야스는 총대장의 부재하에 분전하였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사누키 세력은 이 전투로 다시 한 번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으며 카즈마사의 대두 이후로 약 40년의 시간이 지나 다이묘로서의 소고 씨는 멸망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누키로 돌아온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에 의해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되어 유배지로 보내지게 되었다. 히데히사의 뒤를 이어 시코쿠 평정에서 활약한 비토 토모노부가 사누키군의 총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토모노부 또한 군사적 실책의 책임을 물어 유배지로 보내지게 되었다. 후임으로는 하리마노쿠니이코마 치카마사가 들어오게 되었다.

2.3. 근세

2.3.1. 쇼쿠호 ~ 에도 막부/이코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에 성공하였다. 이코마 치카마사는 사누키 부임을 발령받아 히케타 성을 거쳐 센고쿠 히데히사 쌓은 히라야마 성에 들어갔다.

치카마사는 히라야마 성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와 인접한 항구 도시인 노하라의 지명을 타카마츠로 개명한 다음, 이코마 가문의 거점이 될 성의 축성을 시작한다. 이윽고 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치카마사는 이름을 타카마츠 성으로 명명하고 거처를 옮겨 본격적으로 타카마츠를 중심으로 한 사누키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또한 사누키를 통치하기 위해 서부의 마루가메 성의 축성과 동부의 히케타 성의 개수를 진행하였다.

한편 다이묘로서 멸망한 소고 씨에 소고 마사야스의 아들 소고 센마츠마루가 남아있어 이를 치카마사가 보호하며 키워주었는데 어느 날 센마츠마루가 급사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으로 사누키 소고 씨의 적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후 치카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르며 각지를 전전하였다. 분로쿠의 역 당시에도 사누키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여 조선반도를 전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도 서군에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었던 이코마 카즈마사는 동군에서 속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며 군공을 올렸다.

세키가하라는 결국 동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고 카즈마사의 공으로 인해 이코마 씨는 계속해서 사누키 통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코마씨는 1640년 도호쿠 데와국 야시마의 1만석 소규모 다이묘로 감, 이봉되었고 고산케 미토 번도쿠가와 미츠쿠니의 형 마쓰다이라 요리시게가 타카마츠에 들어왔다. 요리시게 등 미토계 마쓰다이라 가문이 타카마츠를 근거지로 동부 사누키를, 야마자키 가문과 그 뒤를 이은 교고쿠 가문이 마루가메 성을 본성으로 서부 사누키를 다스리게 되었다.

2.4. 카가와 현

3. 사누키의 성

중세에 많은 호족들이 난립했기 때문인지 엄청 작은 영토를 자랑하는 사누키에도 많은 성들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3.1. 중세의 성

3.1.1. 카츠가 성

코자이 가문의 방어를 위한 (詰の城)이자 본성이였다.

표고 약 350M의 살짝 험준한 지역에 쌓아진 성으로 언제나 코자이 가문 최후의 방어선의 역할을 담당하는 코자이 가문의 아이덴티티. 거관으로 사료 성(佐料城)을 두어 코자이 가문이 대대로 사용하였지만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사누키로 침공해 오자 코자이 요시키요(香西佳清)가 표고 약 80M의 후지오 성(藤尾城)을 축성하고 그곳을 본성으로 지정하여 코자이 가문의 본성 타이틀을 후지오 성에 넘겨주게 되었다.

요시키요가 항복하자 쵸소카베 가문에게 넘어갔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시코쿠 정벌 이후에는 폐성되었다.

3.1.2. 아마기리 성

카가와 가문의 방어를 위한 성이였다.

표고 약 380M의 산에 쌓여진 성이며 상당히 험준한 지형을 자랑하는 성 중 하나이다. 아와노쿠니를 통치하는 미요시 짓큐가 사누키의 절반을 포섭하고도 물리적 공략에 실패할 정도.

유키카게가 모토치카에게 항복하여 쵸소카베 가문의 성이 되었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시코쿠 정벌을 완료한 뒤에는 폐성되었다.

3.1.3. 토라마루 성

소고 마사야스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침공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성.

3.2. 근세의 성

사누키에서 근세적 요소를 띄고 있는 성은 세곳이 존재한다.

3.2.1. 다카마쓰 성

이코마 지카마사가 사누키를 본격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쌓은 이다.

바다를 이용하여 혼슈와 교류과 많았던 사누키의 특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인지 바다와 맞닿은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단순한 나와바리도 특징이라면 특징.

성에 대한 내용은 다카마쓰 성(사누키)를 참조.

3.2.2. 마루가메 성

이코마 치카마사가 사누키 서쪽을 관할하기 위해 축성한 이다.

이후 일국일성령과 이코마 가문의 전봉으로 그 기능이 영구히 정지될 운명이었으나 야마자키 이에하루가 마루가메 번을 새로 창설하게 되며 성 전역에 고 이시가키를 두른 웅장한 모습으로 멋지게 부활하였다.

성에 대한 내용은 마루가메 성을 참조.

3.2.3. 히케타 성

전쟁과 정략을 통하여 쵸소카베 가문이 최종적으로 히케타 성을 점거하였으나 히데요시시코쿠 정벌 이후 이코마 치카마사가 사누키로 들어오게 되어 이코마 가문의 성이 되었다.

치카마사는 타카마츠 성의 축성을 시작하며 히케타 성또한 근세의 으로 전환시켰다. 사누키 동쪽을 관할할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일국일성령으로 인해 폐성되었다.

성에 대한 내용은 히케타 성을 참조.

4. 여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누키 우동(讃岐うどん)의 유래이기도 하다. 현 카가와현도 우동으로 유명하다.


[1] 이 고대의 조선식 성곽들은 지금도 유적으로 잘 남아있다. 카가와 현에 남아있는 이 성의 이름은 야시마 성(屋島城).[2] 군키모노인 난카이치란키(南海治乱記)에서는 이 사누키 집결이 이요국의 코노 씨를 토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써져있으나 若松和三郎는 빗츄 출병의 준비가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戦国三好と篠原長房」[3] 「戦国末期讃岐国元吉城をめぐる動向」 多田真弓의 견해.[4] 「겐키 3년 음력 정월 13일 요시아키 서장」[5] 多田真弓의 견해.[6] 마사야스가 과연 모토치카의 군세를 막아냈을지, 아니면 막아내지 못하고 히데요시에게로 달아났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추세다. 막았냈다는 측은 모토치카가 사누키를 통치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모토치카가 토라마루 성을 낙성시켰다는 문서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며 막아내지 못했다는 측은 토라마루 성의 나와바리에 쵸소카베 가문의 특징인 우네죠 카라보리(畝状空堀)가 확인된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7] 군키모노에선 토라마루 성주로 임명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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