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빌리발트 슈마우스 (Willibald Schmaus) |
생년월일 | 1912년 6월 16일 |
사망년월일 | 1979년 4월 27일 |
국적 | 오스트리아 |
출신지 | 빈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1] |
소속팀 | 피르스트 비에나 FC (1930-1942) |
국가대표 | 15경기 0골 (1935-1937 / 오스트리아) 10경기 0골 (1938-1942 / 독일) |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슈마우스는 피르스트 비에나 FC에서 데뷔하자마자 ÖFB-컵 우승을 커리어에 추가했다. 1930년 5월, 피르스트 비에나는 FK 아우스트리아 빈을 결승전에서 만나 1대0으로 승리했고 이것이 슈마우스의 첫 우승 타이틀이었다.이어진 1930-31년의 1부 리그에서도 피르스트 비에나는 첫 우승을 차지했고 슈마우스는 13시즌동안 피르스트 비에나 소속으로 1942년의 가울리가를 포함한 리그 우승 3회, 준우승 2회의 성과를 남겼다.
피르스트 비에나는 1931년, 국제 컵대회인 미트로파 컵에서도 데브레체니 보슈카이, AS 로마, 비너 AC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국내는 물론 유럽대륙 에서도 실력이 통함을 입증했다.
이듬해에도 피르스트 비에나는 미트로파 컵 4강에까지 진출했지만 이탈리아의 AGC 볼로냐에 패하며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반대쪽 4강 대진에서 SK 슬라비아 프라하와 유벤투스 FC의 팬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주최측에서 두 팀을 모두 탈락시켜 버렸고 피르스트 비에나는 어부지리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피르스트 비에나 역시 가울리가에 편입되었고 1942년에는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우승하여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 축구계 최강팀이던 샬케에 발목을 잡혀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2.1.2. 국가대표팀
클럽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슈마우스는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마이슬감독은 슈마우스를 출전시키지 않았고 팀이 4위를 차지하는 것을 벤치에서 지켜보았다.슈마우스의 대표팀 데뷔는 1935년에서야 이뤄졌고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1937년까지 15경기를 뛰었다. 슈마우스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에도 참가했고 오스트리아는 2대0으로 독일에 승리했다.[3]
슈마우스는 두 번째 월드컵에 독일 대표팀으로 참가했고, 스위스와의 개막전에서 1대1로 비겼다. 하지만 1차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재경기에서 제프 헤어베어거는 슈마우스 대신 야코프 슈트라이틀레를 선택했지만 독일은 스위스에 2대4로 패했다.
슈마우스는 1942년까지 독일 소속으로 10경기에 참가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피르스트 비에나의 원 클럽 플레이어이자 첫 전성기의 주역이다.4. 수상
4.1. 클럽[4]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2회: 1930-31, 1932-33
-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1회: 1941–42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1
- ÖFB-컵 우승 2회: 1929–30, 1936-37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2회: 1931-32, 1935-36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42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2
- ÖFB-컵 준우승 1회: 1935–36
4.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5-37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다만 이 경기가 공식 A매치로 분류되지는 않는다.[4] 슈마우스는 피르스트 비에나 FC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