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1:30:47

푸란도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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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35대, 43대 샤한샤
Pūrāndokht | 푸란도흐트
파일:푸란도흐트금화.jpg
제호 한국어 푸란도흐트
페르시아어 Pūrāndokht
영어 Boran, Buran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632년 6월
재위 기간 630년, 631년 ~ 632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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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35대, 43대 샤한샤. 사산 왕조의 첫번째 여제이다.

2. 생애

프랑스 역사가 필리프 기누에 따르면, '푸란(Pūrān)' 또는 '보란(Bōrān)'이라는 이름은 '많은 말의 소유자(Beuraspa)"라는 의미의 축약어라고 한다. '도흐트(Dokht)'는 페르시아어로 소녀라는 뜻의 접미사로, 영어 daughter와 같이 인도유럽조어에서 갈라져 나온 동원어이다. 그녀의 재위 시기에 주조된 주화엔 Bōrān이라고 적혀 있다. 14세기의 역사가 알리 발라미는 그녀를 투란 도흐트(Turan Dokht)라고 불렀다. 투란도트를 연상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호스로 2세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딸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형제자매로 카바드 2세, 아자르미도흐트, 파루카자드 호스로 5세가 있었다. 628년 6월 23일 귀족들의 정변 덕분에 감옥에서 빠져나와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자신을 박대한 아버지를 처형했고,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마르단샤를 비롯한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그녀는 아자르미도흐트와 함께 카바드 2세를 비난했고, 그는 결국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다고 한다.

628년 9월 6일, 카바드 2세가 재위 2개월만에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후 7살의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즉위했지만, 630년 4월 29일 미흐란 가문의 수장이며 유력한 장군이었던 샤흐르바라즈의 반란으로 시해되었다. 샤흐르바라즈는 수많은 귀족을 처형하고 샤한샤에 올랐지만, 재위 40일만에 이스파부단 가문의 수장 파루크 호르미즈드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샤흐르바라즈의 무리를 축출한 뒤, 630년 6월 말 푸란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이로써 그녀는 사산 왕조 최초의 여성 군주가 되었다.

그녀는 샤한샤에 오른 뒤 파루크 호르미즈드를 제국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으며, 공정한 법을 시행하고,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세금을 줄이고, 주화를 주조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파르스, 쿠제스탄, 마드, 아바르샤르 지방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이 출토된 것을 볼 때, 그녀는 이 지역으로부터 샤한샤로 인정받은 듯하다. 그러나 얼마 후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인 샤푸르 샤흐르바라즈가 아버지를 따랐던 무리를 수습한 뒤 크테시폰으로 쳐들어왔고, 푸란도흐트는 폐위되었다. 이후 샤푸르 샤흐르바라즈가 샤한샤를 칭했지만, 파르시그 가문의 피루즈 호스로가 그를 재차 폐위시키고 아자르미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이에 맞서 샤한샤를 자칭했지만, 곧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자신이 속한 이스파부단 가문과 파르시그 가문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아자르미도흐트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미흐란 가문 귀족인 시아바흐쉬의 도움으로 그를 살해했다. 당시 호라산에 주둔하고 있던 파루크 호르미즈드의 아들 로스탐 파로흐자드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 아자르미도흐트를 붙잡은 뒤, 먼저 실명시킨 후 죽였다. 그 후 631년 6월 푸란도흐르트를 샤한샤에 복위시켰다. 푸란도흐트는 제위에 오른 뒤 로스탐을 국가의 지도자이자 군 사령관이라고 선언하며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 아랍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로스탐에게 10년간 통치권을 맡기되, 그가 남자 후손을 갖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통치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푸란도흐트는 동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여호수아 2세를 비롯한 페르시아 교회 장로들이 포함된 사절단을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보냈다. 이라클리오스는 이들을 환대해줬고, 양자가 앞으로도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632년, 크테시폰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로스탐의 섭정에 불만을 품은 파르시그 가문이 파르시그 가문 출신 장성이며 푸란도흐트의 복위 후 해임되었던 바흐만 야두야를 앞세워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리하여 푸란도흐트는 체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루즈 호스로에 의해 교살되었다. 이후 로스탐과 피루즈 호스로는 크테시폰에서 시가전을 벌였지만, 다른 귀족들이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겠다"며 압력을 가하자 교전을 중단했다. 그 후 두 사람은 협의 끝에 푸란도흐트의 조카 야즈데게르드 3세를 옹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