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k, Infantry, Mk III, "Valentin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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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밸런타인 전차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2. 대전기
2.1. 제2차 세계 대전
2.1.1. 북아프리카 전역
보병과 함께 리비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영국 육군 소속 밸런타인 Mk. II |
중량이 높고 속도가 느린 마틸다 II와 달리 밸런타인은 무게가 훨씬 더 가볍고 속도가 빠르면서도 방호력은 이와 동등하였기에 독일 국방군의 대전차포와 2호 전차, 3호 전차 초기형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물론 8,8cm FlaK 앞에서는 마틸다와 마찬가지로 깡통이 되었지만, 8,8cm 포는 종전까지 주력으로 사용된 고관통, 고화력 포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1]
아무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사용된 밸런타인은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장포신을 갖춘 4호 전차 F2형, 그 악명 높은 6호 전차 티거까지 등장하며 더 이상 주력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크루세이더 전차 와 마찬가지로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은 M10 GMC와 M4 셔먼으로 대체되며 2선급 장비로 머물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의 자유 프랑스군 소속 밸런타인 Mk.V 네임드 차량 "설욕" 22152번차 |
2.1.1.1. 십자군 작전
십자군 작전 당시의 영국 육군 제8전차연대 소속 밸런타인 Mk. I 네임드 차량 "헤어포드" T27446번차 |
2.1.1.2. 엘 알라메인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전투를 치르는 영국 육군 소속 밸런타인 Mk. I |
특히, 밸런타인은 2차례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대활약을 했는데, 독일군을 상대로 끊임없이 압박하는 성과를 보여줘, 결국 독일군은 북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망실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어떤 밸런타인은 사막을 주파하며 독일군을 추격하며 약 4,800km의 거리를 큰 수리 없이 이동하는 것에 성공하여, 엄청난 신뢰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독일군 또한 노획한 마틸다 II와 함께 밸런타인을 최후의 발악으로 투입하였으나, 결국 패퇴하며 잔존 전차들을 모두 버리고 가, 해당 전차들은 다시 영국군으로 돌아왔다.
2.1.2. 마다가스카르 전투
마다가스카르 전투 당시 전투를 치르는 영국 육군 제6기갑사단 소속 밸런타인 전차 소대 |
그러나 비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해 다수의 밸런타인이 손상을 입었으며, 결국 밸런타인 전차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크게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일선에서 물러났다.
2.1.3. 독소전쟁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그물형 겨울 위장 도포 MK-III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 육군 소속 MK-III 운용 영상 |
2.1.3.1. 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MK-III |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대표적인 밸런타인의 활약은 다음과 같은데, 1941년 12월 20일, 독일 전차와 전투를 치른 3량의 밸런타인 전차 소대의 사례가 그 예로, 전차 소대 중 한 량은 37mm 포에 포탑이 피탄당했으며, 다른 한 량은 야포에 의해, 마지막 한 량은 측면에 5발을 피탄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역으로 반격하여 두 량의 독일군의 3호 전차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사례를 들은 소련 군부에서는 전반적으로 밸런타인이 강력한 무장과 우수한 기동 능력을 갖춘 전투 차량으로 적의 인력, 요새, 탱크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 공여받을 전차 중 하나로 선택하게 되었다.
공여된 밸런타인들은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활약했으며, 결국 독일군이 철군을 택하면서 모스크바를 방어해내는 데에 성공했고, 그 명성을 동부전선에서 이어가게 되었다.
2.1.3.2. 르제프 공방전
데미얀스크 전투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K-III |
이 시기부터, 2파운더를 장착했던 Mk.V 대신에 훨씬 더 화력이 강력한 OQF 6파운더 대전차포를 얹은 Mk. IX가 소련군에게 공여되면서 주력 전차인 T-34와의 화력 격차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했던 점은 무엇보다 대전차화력이 증강되며 5호 전차 판터나 6호 전차 티거도 어느 정도 거리만 좁힐 수 있다면 정면에서도 격파가 가능했기에 소련군은 크게 호평하였다.
2.1.3.3. 북캅카스 전선
북캅카스 전선 당시 모즈도크의 소련 육군 제5근위전차여단 소속 MK-III |
9월 29일, 제5근위전차여단은 아르칸크-우르트 계곡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세넬코프" 대위가 지위하는 밸런타인이 전차 5량, 자주포 1문, 트럭 1량, 총 25명을 사살하는 쾌거를 달성했다.[3]
10월 5일부터 며칠간 이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됐는데, 말고베크 전투에서 제5근위전차여단은 총 38량의 전차와, 자주포 1문, 대전차포 24문, 박격포 12문, 독일군 1,800여명 사살 등의 전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제5근위전차여단 역시 만만치 않은 손실을 입었는데, T-34 2대와, 소유하고 있던 밸런타인 중 25량이 경미한 피해를 입고, 8량이 완전 격파되었으며, 26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음은 북캅카스 전선의 한 일화로, 밸런타인의 활약 중 하나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독일군 야포의 포격에서 내가 지휘하던 밸런타인은 급하게 농장의 어느 집에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명백히 그건 행운이었다! 한숨 돌리고 난 뒤, 나는 아군 전차들이 어디있나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관측창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우리 소대 소속의 영국 전차를 지휘하던 "폴로즈니코프"와 "보론코프"의 전차가 우리 차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대 내에 있었던 KV-1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낙오되었거나, 혹은 이미 당했을 가능성도 어느정도 있었다. 물론 보병들은 야포에 이미 당했지만 말이다..
도중에 적의 기관총 배치와 벙커를 파괴하면서 우리 전차소대는 공터에 진입했으며, 그 곳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었다. 나는 무전기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 명령없이 사격하지 마! 탄약을 아껴, 얼마나 이럴지는 알 수 없으니깐 일단 이동하고 보자고."
내 휘하의 전차장들은 다들 대답했다. 그 사인은 분명 이해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경비 중대 사령관 막시모프 중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연락은 실패했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는데, 그 때 내 무전기에 잡히는 방송은 독일어였으며, 장교가 휘하 인원들에게 꼬장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독일놈들은 자신들의 방어선을 우리가 돌파했다는 것에 매우 큰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정찰을 실시하는 주력 부대가 적진의 뒤에서 홀로 이탈하고 탄약과 연료가 바닥난 상황이니, 이대로라면 포위되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도중에 독일 대전차포를 부수고 우리 소대는 다시 빠져나왔는데, 정말 웃긴 상황을 마주했다.
우현으로 30~40m 떨어진 보론코프네 탱크에 도망치던 독일군들이 그쪽에 있던 것이다.
웃기게도 그 놈들은 밸런타인을 자기들네 장비로 착각하고 탱크를 계속 두들겼으며, 왜 전차병들이 대꾸하지 않는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나는 보론코프에게 무전기로 독일군이 12명까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관총으로 다 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연막 유탄 발사기(영국 탱크에만 있던 물건인데, 정말 유용했다.)를 발사하고, 연막으로 위장하여 재빨리 빠져나와 부대 위치로 돌아왔다.
"고르노베셀리" 주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아까 내 예상대로, KV-1들은 격파되어 있었다. KV-1들 중 하나는 포탑이 날아간 상태였으며, 잔해에서 살아남은 전차병은 절명한 포수를 땅에 묻어주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KV-1에는 아직 살아 있는 전차병들이 있었는데, 독일군에 대항하여 권총으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밸런타인을 끌고 가, 주포와 기관총을 마구 쏴대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들을 밸런타인에 실어 구출해내었다.
MK-III 전차장 G.P. 폴로신의 회고
나는 관측창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우리 소대 소속의 영국 전차를 지휘하던 "폴로즈니코프"와 "보론코프"의 전차가 우리 차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대 내에 있었던 KV-1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낙오되었거나, 혹은 이미 당했을 가능성도 어느정도 있었다. 물론 보병들은 야포에 이미 당했지만 말이다..
도중에 적의 기관총 배치와 벙커를 파괴하면서 우리 전차소대는 공터에 진입했으며, 그 곳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었다. 나는 무전기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 명령없이 사격하지 마! 탄약을 아껴, 얼마나 이럴지는 알 수 없으니깐 일단 이동하고 보자고."
내 휘하의 전차장들은 다들 대답했다. 그 사인은 분명 이해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경비 중대 사령관 막시모프 중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연락은 실패했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는데, 그 때 내 무전기에 잡히는 방송은 독일어였으며, 장교가 휘하 인원들에게 꼬장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독일놈들은 자신들의 방어선을 우리가 돌파했다는 것에 매우 큰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정찰을 실시하는 주력 부대가 적진의 뒤에서 홀로 이탈하고 탄약과 연료가 바닥난 상황이니, 이대로라면 포위되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도중에 독일 대전차포를 부수고 우리 소대는 다시 빠져나왔는데, 정말 웃긴 상황을 마주했다.
우현으로 30~40m 떨어진 보론코프네 탱크에 도망치던 독일군들이 그쪽에 있던 것이다.
웃기게도 그 놈들은 밸런타인을 자기들네 장비로 착각하고 탱크를 계속 두들겼으며, 왜 전차병들이 대꾸하지 않는지 초조해 하고 있었다.
나는 보론코프에게 무전기로 독일군이 12명까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관총으로 다 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연막 유탄 발사기(영국 탱크에만 있던 물건인데, 정말 유용했다.)를 발사하고, 연막으로 위장하여 재빨리 빠져나와 부대 위치로 돌아왔다.
"고르노베셀리" 주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아까 내 예상대로, KV-1들은 격파되어 있었다. KV-1들 중 하나는 포탑이 날아간 상태였으며, 잔해에서 살아남은 전차병은 절명한 포수를 땅에 묻어주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KV-1에는 아직 살아 있는 전차병들이 있었는데, 독일군에 대항하여 권총으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밸런타인을 끌고 가, 주포와 기관총을 마구 쏴대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들을 밸런타인에 실어 구출해내었다.
MK-III 전차장 G.P. 폴로신의 회고
이 회고록에서 알 수 있듯, 밸런타인은 고품질의 무전기등, 기존의 소련 전차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소프트스펙과 높은 신뢰성으로 북코카서스에서 소련군의 승리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2.1.3.4.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K-III "028번차"[4] |
2.1.3.5.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K-III |
2.1.3.6.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당시 강을 도하 중인 소련 육군 소속 MK-III |
2.1.3.7. 우만-보토샤니 공세
루마니아 보토샤니에 진입한 소련 육군 제6전차연대 소속 MK-III[5] |
2.1.3.8. 바그라티온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빌뉴스의 소련 육군 제3벨로루시전선군 소속 MK-III[6] |
2.1.3.9. 베를린 공방전
베를린 공방전 당시 베를린 근교의 소련 육군 소속 MK-III |
베를린 공방전 이후에도 독일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4월 30일 경 해자를 무너뜨리는 용도로 1량이 투입된 기록이 남아있다.
2.1.4. 서부전선
2.1.4.1. 마켓 가든 작전
마켓 가든 작전 당시 네덜란드에 유기된 영국 육군 소속 밸런타인 Mk.XI |
2.1.5. 태평양 전쟁
2.1.5.1. 그린 섬 전투
그린 섬 전투 당시 섬에 상륙한 뉴질랜드 제3기갑사단 소속 밸런타인 Mk.V |
이 당시 그린 섬에서의 밸런타인은 매우 큰 활약을 했는데, 뉴질랜드 육군 보병대대를 지원할 목적으로 투입된 밸런타인은 정글을 개척하고 일본군의 기습을 막아내는데에 일조하였으며, 그 결과 뉴질랜드 육군 사상자 12명, 일본군 사상자 120명 전원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로 뉴질랜드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대활약하였다.
3. 냉전
3.1. 키프로스 위기
키프로스 위기 당시 리마솔의 키프로스 방위군 소속 밸런타인 장갑차 |
당시 밸런타인 장갑차가 배치되었던 리마솔 시에서는 키프로스 위기의 여파가 닥치면서 리마솔 전투가 발발하였고, 당시 튀르키예령이었던 리마솔은 그리스계 키프로스군의 공격을 받고 많은 튀르키예인들의 재산이 파괴되고 추방되며 리마솔은 키프로스 령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튀르키예 키프로스인들은 분노하여 민병대를 결성해 그리스계 키프로스군에 대항하기에 이른다. 2월 9일, 2월 10일에는 인근 마을에서 산발적인 전투로 약 1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동월 13일과 14일에 거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1964년 3월, 그리스계 키프로스군 측에서는 기갑장비의 투입이 급하다고 판단하여 밸런타인 장갑차가 투입되며 튀르키예계 키프로스 반군을 몰아내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들은 항복하면서 이렇게 키프로스 위기는 일단락되었으며, 동년 4월 1일에 열린 리마솔 열병식 당시에도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으로 참가하였다.
리마솔 열병식 이후로는 리마솔 경찰서 창고에 치장물자로 배치되었는데, 이는 밸런타인 장갑차의 노후화와 신형 T-34-85CZ의 도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2호, 3호, 4호 전차나 6호전차 티거도 영국군의 8,8cm FlaK 급의 포인 오드넌스 QF 3.7인치 대공포 앞에서는 깡통이 되었다.[2] 당시 여단은 밸런타인 40량, T-34 3대, BT-7 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3] 현재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소련군 소속 밸런타인 에이스"이다.[4] 1942년 5월 촬영된 사진으로, 오른편에 지나가고 있는 전투차량은 1호 자주포이다.[5] Mk. IX 형식으로, 1944년 촬영된 사진이다.[6] 1944년 7월 촬영된 사진으로, VII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