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15:39:53

백인철(권투)

파일:백인철 권투.jpg
백인철 (白仁鉄, Baek In-Chul)
출생 1961년 12월 20일 ([age(1961-12-20)]세), 전남 고흥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78cm
종목 복싱
전적 50전 47승 (43KO) 3패
수상 OPBF[1] 전 슈퍼 웰터, 미들급 챔피언
세계 복싱 협회(WBA) 前 슈퍼 미들급 챔피언
링크 Boxrec
1. 개요2. 권투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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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1961년생 前 권투 선수이다. 고흥군 출신.

WBA 슈퍼 미들급 세계 챔피언을 지냈다. 박종팔과 함께 아시아권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던 미들급-수퍼 미들급 체급임에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이다. 활동 시기는 1980-1990년으로 그야말로 1980년대의 간판스타라 할 만한 선수.

거의 동시기에 활약했던 또다른 미들-수퍼미들급 간판스타 박종팔, 황준석과의 라이벌리로도 유명했다. 이 둘과 라이벌전도 가진 바 있는데 모두 백인철이 승리했다.[2] 박종팔과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한다.

50전 47승 (43KO) 3패라는 엄청난 커리어를 남겼다[3]. 특히 국내 선수에게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3패를 모두 서구권 선수에게만 당했는데, 공교롭게도 딱 원정경기에서만 모두 패한 셈이다. 서구권이 아닌 지역으로 원정을 나간 적은 없다.

이후 2011년경 간경화 투병 사실이 알려져 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 그동안 해왔던 사업 등이 잘 되지 않아 금전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데,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한 뒤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2. 권투 경력

극동 프로모션에서 전 세계챔피언 유제두 등 유명 지도자들에게 조련을 받다가 1980년에 프로복싱에 데뷔했다. 이후 무패행진을 벌이며 주목받다가, 1981년말 이상호를 꺾고 공석이던 슈퍼웰터급 동양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이 때는 데뷔 2년도 안 됐을 때였는데 저 동양 타이틀매치가 커리어 15전째였다! 엄청난 강행군이었지만 아무튼 데뷔부터 동양 챔피언에 오르게 된 저 경기까지 상대를 전부 KO로 압살해버리면서 해당 체급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데뷔 후 연속 KO행진은 이후에도 아래 서술된 션 매니언전 직전까지 무려 26연속 KO승으로 이어진다.)

당시 WBA 슈퍼웰터급 세계 챔피언은 갓 챔피언이 된 미하라 타다시였는데, 백인철을 지명방어전 상대로 점찍어놓고 있다가 이상호를 KO로 꺾은 저 경기를 보고 마음을 바꿔 경력이 일천한 다른 선수(미국의 데이비 무어. 그 때까지 프로 8전을 치뤘다.)를 지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데 미하라가 그만 그 데이비 무어에게 져버렸다. 이 때 백인철이 도전 상대로 결정되었으면 백인철의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인철의 첫 세계 타이틀매치는 1987년에 가서야 열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양 챔피언을 따내고 방어전도 전부 KO로 압살해버리던 그에게 첫 제동이 걸린 것은 1983년이었다. 미국으로 첫 원정을 나갔다가 아일랜드출신의 션 매니언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한 것. 이 경기를 이겼으면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패하면서 무산되었다. 경기 후반을 담은 영상을 확인해보면# 백인철의 펀치력은 남아있지만 그 전까지 판정까지 가는 장기전을 해보지 않은 탓인지 풋워크가 무뎌져 있어 많은 수의 유효타를 허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자력으로 챔피언으로 향하는 기회를 한 번 놓쳤지만, 동양 타이틀을 계속해서 지켜내고 라이벌 황준석도 꺾어내는 등 4년간 절치부심했다.


황준석 전.

그리고 1987년 마침내 공석이 된 WBA 수퍼웰터급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의 줄리안 잭슨과 격돌했지만 이번에는 TKO로 패배했다. 줄리안 잭슨은 이후 미들급까지 2체급을 석권하고 커리어 55승중 49번을 KO로 이기는 등 세계적인 강자가 되는 선수. 백인철은 또 다시 세계와의 격차를 절감하며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잭슨 전. 1회부터 백인철이 강한 정타를 허용하며 당황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후 백인철은 미들급으로 체급을 바꾼 뒤 또다시 동양 챔피언 자리를 차지하며 다음 기회를 노렸고, 수퍼 미들급으로 또 한 번 체급을 올린다. 이후 동체급의 또다른 간판스타이자 전 WBA 수퍼미들급 챔피언인 박종팔과의 라이벌전마저 승리로 이끈다.


박종팔 전. 평소 각자 스타일대로 박종팔은 끝까지 날카롭게 한 방을 노리는 경기운영을 했고, 백인철도 그의 스타일대로 대미지를 누적시키는데 성공, 경기 중후반부터 박종팔의 안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경기 이후, 박종팔에게 세계 무대와의 격차를 절감케 하며 두 번이나 KO승을 거둔 천적 풀헨시오 오벨메히야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일전을 치른다. 이 때는 백인철이 20대 후반이 된 1989년이었다. 비록 오벨메히야스가 30대 중후반에 접어드는 노장의 나이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현역 세계 챔피언이기도 했고, 그 때까지 세계구급 강자들에게 번번히 가로막히던 백인철이었기에 승산이 높지는 않아 보였으나, 이 경기에서 백인철은 오벨메히야스를 다운을 여러 차례 빼앗아가며 TKO로 꺾어 버린다. 그리고 그가 박종팔을 누르고 가져갔던 WBA 수퍼미들급 타이틀도 곧바로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백인철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오벨메히야스전.

챔피언 등극 이후 미국의 론 에셋, 일본의 타지마 요시아키를 차례로 꺾으며 2차 방어까지 성공했는데, 이 때까지가 백인철의 리즈시절.

그러나 1990년 3차 방어전으로 프랑스 원정을 나가게 되고, 여기서 크리스토프 티오조에게 패배하며 챔피언 벨트를 내주고 말았다. 티오조가 백인철보다 7cm이나 더 장신이라 공격이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했겠으나, 아래에 언급된 분쟁때문에 거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링에 올랐다고 하니 애초에 이기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아무튼 2/3라운드에 각각 다운을 1회씩 당하더니 6회 종료직전에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려 주심이 경기를 중단해 버렸고 이 것이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티오조전.[4] 5회까지는 그런대로 잘 버텼으나 6회들어 준비부족 때문인지 발이 급격히 느려졌고, 6회를 마치기 직전에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펀치를 연속으로 허용하기 시작하자 주심이 바로 경기를 중단시켰다. 조금 일찍 경기가 중단된 감은 있으나, 그대로 속행되었어도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경기를 이겼으면 토마스 헌즈와 대결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얘기가 있고 관련 기사도 존재하는데#, 사실이라면 매우 아쉬운 일이었을 듯. 한편 박종팔도 1981년 오벨메히야스를 꺾었으면 마빈 해글러와 대결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둘 다 동 시기를 대표하는 빅네임과 대결할 기회 바로 직전에서 좌절한 셈이다. 아무튼 경기는 이렇게 끝나버렸고, 백인철은 만 30세의 나이에 그대로 은퇴한다.

재기전도 없이 30세의 나이로 은퇴한다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티오조와의 타이틀 방어전 당시 파이트머니 문제로 매니저와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 그렇다면 그대로 은퇴해버린 것도 납득할만한 여지가 있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이 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한다. 마지막 패배 당시 신문 기사에서 딱히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은퇴 확률이 높다고 표현했던 것을 보면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던 모양. 그런데 같은 경기를 놓고 자기관리 실패로 기량저하가 뚜렷하여 어차피 커리어를 이어나가기 힘든 상대였으므로 높은 대전료를 받을 수 있는 원정경기를 선택했다는 얘기도 있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2.1. 플레이 스타일

90%가 넘는 KO율에서 알 수 있듯이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스타 선수였다. 그러나 한 방을 노리기보단 뛰어난 핸드스피드와 정확하고 묵직한 타격으로 대미지를 누적시켜 어느 순간 상대를 캔버스에 눕히는 타입. 그 덕에 얻게 된 별명이 '침묵의 도살자'이다.

3. 여담

  • 지능적인 플레이도 잘 했다는 평이 있는데, 바둑과 당구에도 능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타입이었고, 애주가 운동선수였으면서도[5] 상대의 강함에 따라 음주량을 조절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 술을 좋아한 탓인지 이후 간경화에 걸려 큰 고생을 하기도 했고, 술 때문에 연습을 게을리한 부분을 지적하는 자료가 많은 것, 그리고 고작 30세에 은퇴해버린 것을 보면 자기 관리에는 조금 소홀한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 데뷔 후 26연속 KO승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복싱 인기를 감안하면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 2002년 PIA탐정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 '이름이 백인철이라 백인에게 저히 약했다'는 말이 돌기도.. 하지만 속설과는 달리 3패를 모두 백인에게만 당한 것은 아니었고, 백인철이 백인들(호주 선수들)을 제압한 경기들도 있다. 3패의 공통분모는 상대의 피부색보다는 원정경기. 홈에서는 전부 이겼고 원정에선 전부 졌다. (...) 그런데 이게 복싱에서는 딱히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홈에서는 전승에 원정에서 패배 후 커리어를 접은 선수들은 너무나 많다. 그만큼 원정경기는 복싱 선수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백인철은 동서양 선수의 피지컬 차이가 커지기 시작하는 미들급에서 활약했고 원정도 서구권으로만 나갔으니..
  • 동세대 동체급 라이벌 박종팔과 비교되는 일이 잦다. 비록 맞대결에서 백인철이 이겼고 박종팔을 두 번이나 제압한 오벨메히야스를 백인철은 TKO로 꺾었다는 확실한 비교우위가 있으며[6] 한 가지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플레이 스타일도 백인철 쪽의 완성도가 더 좋다는 평도 있지만, 반대로 세계무대에서의 업적은 두 기구를 거쳐 두 차례나 세계챔피언에 올랐고, 경량급을 제외하면 한국 최다 기록인 세계 타이틀 8차 방어 기록(IBF)도 보유하고 있으며, IBF 챔피언 등극 당시 한국 남성 복싱 유일의 미국 원정 승리 기록까지 가지고 있는 박종팔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화끈하게 한 방을 노리는 경기 스타일도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졌다. 게다가 박종팔 쪽이 백인철보다 시기적으로도 훨씬 앞서서 수퍼미들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기 때문에[7] 마치 박찬호처럼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이미지까지 있다. 반면 백인철 쪽은 앞서 소개한 일화대로 성실하지 못한 이미지가 없지 않았기 때문인지 현역 때나 은퇴 뒤에나 인지도와 인기는 박종팔 쪽이 훨씬 높다. 박종팔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꽤 출연했지만 백인철은 미디어 노출 자체가 적다. 간경화 투병때문에 대외 활동이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1] 아시아, 태평양 복싱기구[2] 박종팔은 백인철과의 라이벌전에서 패한 뒤 은퇴했다.[3] 27전째 션 매니언에게 미국에서 판정패 하기 전까지 전적은 26승(26KO) 무패였으며 37전째 호주의 트로이 워터스에게 판정승하기 전까지 전적은 35승(35KO) 1패 였다[4] 영상 자체에 음성이 누락되어 있다. 스피커 고장이 아니니 참고.[5]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상하게 생각되겠으나, 허재, 선동열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특별히 드물거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6] 단, 박종팔은 해당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고 오벨메히야스도 당시 36세의 노장이었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었다.[7] 박종팔은 1984년 IBF챔프에 등극했다. WBA끼리만 비교해도 박종팔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