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초대 참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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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瓚熙[1]
1897년 1월 29일 ~ 1972년 4월 2일 (향년 75세)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독립운동가, 정치인.2. 생애
1897년 1월 29일 충청북도 진천군 북변면 하리(現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 75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서울특별시에 본적을 두었다.일본 도쿄도 와세다대학 경제학부[2]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고, 3월 2일부터 3월 3일 사이에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를 받아 곧 방면되었다.
이후 다시 도쿄도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도쿄도 유학생 조직인 학우회에서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항일운동을 하였다.
귀국 후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 기자로 근무하다가 1925년 동아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해 지방부장, 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말살하여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처분되자 퇴사하였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정보부장, 운동부장, 조사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해 5월 10일 치러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송필만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49년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해 당적을 옮겼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당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다시 당적을 옮겼고, 중앙상임위원을 역임했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2월 14일 신민당 창당에 참여해 당적을 옮겼고,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제5대 국회에서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1972년 3월 1일 파킨슨병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했으나 그해 4월 2일 오후 2시 15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역촌동[3] 135-42번지 자택에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충북 진천군)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4,925표 (19.06%) | 낙선 (2위)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진천군) | | 3,752표 (15.07%) | 낙선 (4위)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진천군) | 5,648표 (22.00%) | 낙선 (2위)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참의원) | | - | 당선 | 초선[4] |
[1] 사진으로 본 국회20년 -부록- 역대국회의원약력에는 朴讚熙로 기재돼 있다.[2] 사진으로 본 국회20년 -부록- 역대국회의원약력에는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3] 1979년 10월 10일 은평구가 서대문구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은평구 관할에 편입되었다.[4] 1960. 5. 16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