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청동기시대 토기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입니다. 토기 바닥에 편평한 굽이 붙고 바리, 대접, 접시, 항아리, 독, 굽 달린 접시, 시루 등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사용되는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선무늬나 구멍무늬가 있거나, 토기 표면에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칠한 토기도 있습니다.
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은 다소 거친 흙으로 빚어 한뎃가마(露天窯: 천장 구조가 없는 노출된 가마)에서 구운 토기입니다. 보통 갈색이나 적갈색 계통으로,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민무늬 토기 또는 무문토기(無文土器)는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와 랴오닝성 일대에서 등장한 토기이다. 시대적으로 보자면 빗살무늬 토기의 뒤를 잇는 유물이다. 민무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은 다소 거친 흙으로 빚어 한뎃가마(露天窯: 천장 구조가 없는 노출된 가마)에서 구운 토기입니다. 보통 갈색이나 적갈색 계통으로,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2. 역사
민무늬토기는 기원전 15-13세기경 한반도 청동기시대(무문토기시대)에 등장한 토기이다. 기원전 300년경까지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한국사의 시기를 민무늬토기 시대라고 하며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쓰인다. 민무늬토기는 일본의 야요이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3. 반도 일본어설과의 관계
최근 한반도 선사시대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집단들이 원시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대표적인 학자로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있다. 그는 기원전 1500년경 요동반도에서 한반도로 논농사가 도입되면서 원시 일본어가 들어오고,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입하면서 수많은 유이민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원시 한국어가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원시 일본어족의 경우 논농사를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기원전 300년경 이들 집단이 일본 규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열도로 원시 일본어가 확산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반도의 원시 일본어의 경우 기원전 300년경에 도입된 원시 한국어로 인해 소멸된다고 보았다.
휘트먼은 이러한 원시 일본어족 문화의 지표 유물을 바로 이 항목의 민무늬 토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들의 문화는 대체로 송국리식 토기의 유적 문화와 일치하는데, 송국리식 토기는 이 민무늬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고조선과 그에서 파생된 삼한 등 고대 한국인들의 문화는 십이대영자 문화로 대표되는 이중구연토기, 점토대토기가 지배적으로, 민무늬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를 정리해보면 한반도 청동기시대 = 원시 일본어 / 초기철기시대 이후 = 원시 한국어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관점은 최근의 고고학계에서는 별로 통용되지 않는 주장이다. 휘트먼의 가설에서는 한국어족의 지표로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을 제시하지만, 한국 청동기시대 연구자인 김장석과 박진호는 이 무렵 유입된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 집단은 비교적 소수에 그쳐 토착사회를 해체하거나 대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세형동검문화 집단이 재지 토착사회에 언어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다고 본다.[1]
근래의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점토대토기 단계의 이주민들이 기존 민무늬토기 사회의 주민을 대체했다는 주민교체론이나, 이들이 일방적으로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예속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다. 오히려 점토대토기사회 단계의 늦은 시기까지 송국리사회를 위시한 토착 민무늬토기 사회가 존속하고 있었던 반면에 점토대토기사회의 생활유적은 비교적 빈약한 편이므로 점토대토기 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재지 민무늬토기 사회가 해체, 와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2] 또 대체로 이들 양 사회는 무력갈등이 있었다기보다는 상호 호혜적인 교류 속에 빠른 시간 안에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3]
아직까지 이 무렵 이주민과 토착민 중 누가 사회의 주도권을 가졌는가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는 이주민은 비교적 피난민에 가까운 소수였으며,[4] 토착민 역시 이주민이나 외래집단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좀 더 극단적인 입장이나 이 시기의 변화가 요동 및 서북한 지역과의 교류망을 통해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토착민들이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습득한 것이며, 이주민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입장도 나타나고 있다.[5]
또한 민무늬토기문화권은 송국리문화가 확산된 지역 뿐 아니라, 천전리유형 및 검단리유형권까지 포괄하는 개념인데, 이들은 송국리문화와 생계경제 양상부터 점토대토기 및 세형동검집단에 대한 대응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인 측면이 적지 않게 존재하나,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상기한 반도 일본어 가설의 도식론에서 전제하는 민무늬토기사회 후반기의 상황은 고고학계에서 인식하는 것과는 다소 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4. 사용 용도
- 주로 곡식을 담거나 저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5. 여담
- 현재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1단원에서 빗살무늬 토기 이후의 토기로 나온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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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ngsuk Kim-Jinho Park, Millet vs rice: an evaluation of the farming/language dispersal hypothesis in the Korean context, 202[2] 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 2009[3] 김승옥, 만경강 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4] 주로 초창기 점토대토기 사회의 취락은 재지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 고지성취락이며, 규모나 수에서 재지집단과 명백한 열세에 있었다.(이형원, 청동기시대 갑천유역의 유적 분포양상과 그 의미, 2016) 또 가경지 자체가 확보가 안 되어 수렵-채집의 비중이 높았던 상황이므로 이들은 적극적으로 재지민과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이형원, 충청서해안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유입과 문화변동, 2016)[5] 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 김현식,남한 청동기시대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출현의 정치·사회적 의미,2023 / 이러한 입장들은 대체로 이 당시 점토대토기 문화의 유입과 같은 물질문화의 변화상이 종래에 알려졌던 바와는 달리 그다지 단시간에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