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0:16:36

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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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위가 각각 이 항목인 미시시피회사 거품, 남해회사 거품 사태의 주역들이다.[1]
1. 개요2. 역사
2.1. 빚에 허덕이는 프랑스2.2. 존 로의 등장2.3. 미시시피 계획과 거품의 시작2.4. 거품경제 붕괴2.5. 결과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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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시피 거품(Mississippi Bubble) 또는 미시시피 포말(-)[2]18세기 프랑스 왕국에서 일어났던, 북아메리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미시시피강 개발과 관련된 거품경제 사건으로, 네덜란드 공화국튤립 파동, 그레이트브리튼 왕국남해회사 거품 사태와 더불어 고전 경제기 최악의 경제위기 중 하나로 꼽힌다.

2. 역사

범례
  • 미시시피회사(Compagnie du Mississippi)는 1717년부터 1719년까지는 서방회사(Compagnie d'Occident), 1719년부터 1721년까지는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라고 불렸다. 이하에서는 미시시피회사로 통일한다.

2.1. 빚에 허덕이는 프랑스

18세기 초 프랑스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는 루이 14세의 실책이 컸는데 당시 프랑스 최고의 회계사였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정부 회계 시스템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국가에서 노동자들을 이끌어 와 경제 부흥을 시도했으나 "짐이 곧 국가다" 라며 왕권신수설을 믿었던 루이 14세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등 사치를 부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등 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에[3] 재정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게다가 루이 14세는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인 신교도들을 불러모아서 잘 대해 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그들을 탄압하는 바람에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 죄다 국외로 빠져나가는 사태를 초래했다. 결국 72년 3개월 18일 동안이나 재위한 루이 14세가 아직 다섯 살에 불과한 증손자 루이 15세를 남겨두고 1715년 사망했을 때 프랑스 정부의 채무는 무려 30억 리브르에 달했다. 반면 연간 재정수입은 수입 1억 4500만 리브르에서 지출 1억 4200만 리브르를 뺀 300만 리브르로 이자조차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2.2. 존 로의 등장

국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패한 금융가들의 은닉 재산을 찾아내 세금을 늘리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 필리프 2세 앞에 나타났던 사람이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로(John Law, 1671~1729)였다. 존 로는 도박 거액을 잃은 적이 있었고 여자 문제로 결투를 하다가 살인을 저질러 사형까지 선고받았다가 암스테르담으로 도주한 범죄자였지만 통화 공급,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사용되던 금속화폐 대신 영란은행마냥 국가가 보장하는 지폐를 사용하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지폐는 금속화폐와는 다르게 찍어내기만 하면 나오기 때문에 공급량만 적절하게 조절해 주면 괜찮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을 꺼야 했던 필리프 2세는 결국 1716년 로가 제안한 은행, 즉 방크 제네랄 프리베(Banque Générale Privée)[4] 설립을 허용했다.

정부는 세금을 로가 설립한 은행이 발행한 지폐로만 납부하도록 했다. 자본금 600만 리브르로 설립된 프랑스 최초의 은행, 방크 제네랄이 발행한 지폐는 으레 인플레이션이 그랬듯이 대성공을 거뒀다. 하여튼 존 로는 프랑스의 경제를 살렸다는 공로로 재무총감의 자리까지 올랐다.

2.3. 미시시피 계획과 거품의 시작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데 놀란 필리프 2세는 로가 새로이 제시한 미시시피강의 개발과 운영에 관한 계획, 곧 '미시시피 계획'을 그대로 승인했다. 1717년 방크 제네랄의 성공으로 정부가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미시시피회사의 경영권을 획득, 이내 서방 회사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이런 저런 회사를 합병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에게 높은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로는 정부의 신뢰를 더욱 더 받았고 이윽고 담배 독점권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으며 중국 쪽의 회사와 인도 쪽의 회사 역시 승인을 얻어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tional-atlas-1970-1810-loupurchase.png
미국의 루이지애나 구입 이전 '프랑스령 루이지앵(루이지애나)'의 위치.

뜬금없이 미시시피가 튀어나오는 이유를 살펴보자면 거품 당시의 미시시피 일대는 미국이 건국되기 전이었고 '루이 왕의 땅' 이라는 이름이 붙은 프랑스 왕국령의 '루이지앵'이었다. 이 토지가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 미국에 양도되면서 영어 명칭인 루이지애나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미시시피회사의 주가도 날로 치솟았다. 식민지 건설은 곧 부의 축적으로 인식되던 시절인 데다 로가 왕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을 가지려고 안달이 났다. 1718년 액면가 300 리브르로 시작한 주가가 1719년 2만 리브르까지 치솟았다. 미시시피회사의 발행 주식의 양은 1720년 50만주 정도였으니까 주가를 1만 5천 리브르로 잡으면 당시 미시시피회사의 시총은 무려 75억 리브르였다.

주식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타났고 백만장자라는 단어도 탄생했으며 곱사등이가 자기 등을 서명대로 내주고 큰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헛소문이었지만 당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2.4. 거품경제 붕괴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718년 프랑스 정부가 방크 제네랄을 인수해 이름을 방크 로얄로 바꾸었다. 여기까지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필리프 2세가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통화량의 증가를 명한 것이었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당연히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그에 대해 물가가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로의 주가도 주가지만 물가도 만만찮게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빵과 우유 등 기본 식량이 6배, 의복류는 3배나 올랐다. 거기에 물가가 더 오를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차츰 미시시피회사 주식과 로의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을 부동산이나 정화(正貨), 즉 금화나 은화와 바꾸기 시작했다. 화폐는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신뢰를 기반으로 가치를 가지는데 경기가 너무 과열되고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의심하고 이윽고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1720년 1월 어느 한 왕자가 주식을 팔아 금과 은으로 바꾸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에 자극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환을 요구하자 주가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거기에다가 교환을 요구할 경우 내줄 금이나 은이 지폐 발행고의 2퍼센트에 불과한 상황에서 로는 지폐를 유일한 법정화폐로 지정하고 100리브르 이상의 금과 은 거래를 제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재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일이 터질 때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과 화폐가 너무 과도한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되자 그것들을 평가절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결국 1720년 6월 일이 터졌다. 미시시피회사의 주가가 500 리브르까지 떨어졌고 화폐가치는 더욱더 떨어졌으며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섭정은 어쩔 수 없이 로를 재무총감 자리에서 해고했다. 두 달 뒤에는 정부의 조사보고서가 나오자 모든 책임은 외국인이었던 로에게 돌아갔고 로는 베네치아로 도망가 1729년에 그곳에서 객사했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영국에서 남해회사 거품 사태가 절정에 이르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2.5. 결과

미시시피회사 덕분에 프랑스의 부채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재정의 건전성은 맛이 가 버렸고 화폐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져 물가의 폭등을 야기해 서민들을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로 이후 프랑스는 역대 재무총감들이 세금제도를 개혁해 재정난을 피하려고 했지만 귀족층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면서 계급 간 위화감이 깊어지고 결국은 프랑스 혁명까지 일어났다.

버블이 꺼지면서 미래의 가능성도 같이 사라졌다.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는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도 없고 오히려 손해만 입힌 땅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결국 프랑스는 1803년에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 버렸다.

로의 실험이 안긴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흔적이 남아 있는데 프랑스에는 은행인데도 방크(Banque)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곳은 거의 없고 소시에테(회사)나 크레디(신용)가 은행 이름으로 대신 쓰인다. 방크라고 불리는 곳은 위에 나온 '방크 제네랄', '방크 로얄'의 후신인 중앙은행 '방크 드 프랑스'와 외국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200여 년 전의 쓰라린 기억이 은행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단, '은행의'라는 형용사 bancaire는 그대로 쓴다.

3. 관련 문서


[1] 1위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4위는 사우디 아람코다.[2] 포말은 한자어로 거품을 의미한다.[3] 사실 궁전 건축 비용이나 왕실의 사치 비용은 막대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왕국 전체의 풍요와 세액을 감안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루이 14세가 일으킨 전쟁비용이 실로 막대하였고 프랑스 구체제의 비효율적이고 불평등한 세제와 맞물리다 보니 재정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로 인해 임시로 특권계급도 과세되는 인두세가 신설되기도 했었다.[4] 직역하면 '일반은행'이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