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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나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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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長可
(1558년 ~ 1584년 5월 18일)

1. 개요2. 생애3. 기타4. 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장수로 오니 무사시(鬼武蔵)[1]로 불린 오다 가문의 무장. 아내는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 이케다 센.

2. 생애

1558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모리 요시나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참고로 모리 란마루는 삼남으로 나가요시의 동생이 된다. 1570년 아버지 요시나리와 맏형 요시타카가 전투 중 전사하는 바람에 13세의 나이로 모리 가문의 가독을 잇고, 미노 카네야마성의 성주가 된다.

1573년 이세국의 2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 오다 노부타다의 부대로 참여해 첫 출진을 한다.

1574년 3차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에도 노부타다 휘하로 참전해 많은 무공을 세운다. 이후에도 노부타다의 요리키[2]로써 나가시노 전투, 미노국 이와무라성 공격, 셋츠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 미키 전투 등에 참전해 많은 무공을 세운다.

1582년 오다 가문은 다케다 가문을 없애기 위해 코슈 정벌(甲州征伐)을 시작하고 나가요시는 노부타다의 휘하로 참전해 다케다 가문의 마츠오성, 이이다성, 다카토성 공격 등에서 큰 활약을 한다. 코슈 정벌은 성공을 거둬 다케다 가문은 멸망당하고, 나가요시는 코슈 정벌의 활약에 대한 보상으로 다케다 가문의 영지였던 시나노(信濃)의 카와나카지마 4개군(郡) 20만석과 가이즈성을 받는다. 이때 기존의 영지와 카네야마성은 동생 모리 나리토시[3]에게 돌아간다. 같은해 노부나가는 기세를 몰아 우에스기 가문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고 군을 움직인다. 시바타 카츠이에 등의 무장들은 엣츄(越中) 방면에서 우에스기 가문의 우오즈성을 공격하고, 나가요시는 시나노에서 북진해 우에스기 가문의 중심지인 에치고(越後) 방면으로 침공을 시작한다.

다케다 가문 정벌 중 '병사 10점, 여자 어린이 3점, 여자 1점, 노인 꽝'이라고 점수를 매기고 학살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나가요시는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공략은 포기한 채 자신의 영지인 시나노로 회군한다. 혼노지의 변 소식을 접한 시나노의 호족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영지 내에서 잇키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가요시는 새로이 받은 시나노의 영지를 보전하기는커녕 본인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진 상황이 되어 시나노의 영지를 포기하고 비교적 안전한 옛 영지 미노 카네야마성으로의 귀환을 선택한다. 이때 영지의 안정을 위해 잡아두었던 시나노 호족 가문들의 인질들과 반란, 잇키 세력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쳐내며, 성공적으로 미노 카네야마성에 귀환한다. 이 일로 나가요시는 오니무사시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후 장인 이케다 츠네오키와 함께 역적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부하가 된다.

1584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가 일어난다. 전년해의 시즈가타케 전투로 시바타 카츠이에와, 오다 노부타카를 제거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돌연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든 것이다. 이때 나가요시와 이케다 츠네오키는 히데요시 편으로 가담하나, 이에야스의 공격으로 나가요시는 여러 차례 패퇴하고 히데요시의 본진에 합류한다. 이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 군을 움직이지 않아 양군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이케다 츠네오키가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사위 나가요시의 이전 패퇴도 만회할 겸 히데요시에게 나카이리(中入り)[4]를 제안하고 허락을 받는다. 출진 전 나가요시는 가신에게 유언장을 남긴다. 나카이리 부대는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총대장으로 해 선봉은 츠네오키가 맡고 나가요시는 2번 부대 대장을 맡아 출진한다. 허나 이를 간파한 이에야스의 역공에 당해 나카이리는 실패하고, 나가요시는 적이 쏜 철포에 미간이 뚫려 즉사 한다. 향년 26세. 이때 함께 출진한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목숨을 건져 달아났지만, 이케다 츠네오키는 나가요시와 함께 전사한다.

3. 기타

'인간무골人間無骨'이란 유명한 창의 소유자. 상대의 뼈가 없는 듯이 날이 잘 들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모리 요시나리와 맏형 요시타카, 나가요시 본인은 전투 중에 전사하고 남동생 3명은 혼노지의 변에서 주군 노부나가를 보호하다 죽는다. 아버지와 본인 그리고 형제들은 모두 제명에 못살고 일찍 죽는 불운이 있었지만, 다행히 막내 동생인 모리 타다마사(森 忠政, 1570 ~ 1634)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들어서 쓰야마번(津山藩) 18만석 다이묘가 되어서 65세에 사망한다.

나가요시 본인에게는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되는 무시무시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 창작이 의심되는 일화 외에도 그 성격을 증언하는 실제 사료상의 근거도 많다. 적, 인질을 마구잡이로 수천명이나 학살하거나 군율을 위반해 경고를 받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방침을 어기거나 군기를 위반하는 등 마구잡이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에게 약간의 경고만 받았을 뿐 근신 처분이나 감봉 등의 무거운 처벌들은 받지 않았는데, 노부나가의 개인적 총애뿐 아니라 아버지인 모리 요시나리의 대부터 세운 큰 공의 영향도 있다.

모리 나가요시가 생전에 인질 수천명을 학살했다는 댓가인지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랬는지 후손인 5대번주 모리 아츠토시(森 衆利, 1673 ~ 1705)가 번정(蕃政)[5]에서 악정(惡政)[6]과 바쿠후의 정치에 대해서 비방해서 쓰야마 번은 다른 다이묘인 에치젠 마쓰다이라가(越前松平家)에게 빼앗기고 아코번(赤穂藩)으로 2만석으로 삭감 전봉되어서 소(小)다이묘로 추락, 메이지 유신때 실질 석고 부족으로 남작 작위이었지만 무진전쟁공적이 있어서 자작으로 겨우 임명받았다고 한다.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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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그저그런 C급 무장이었으나 창조 PK에서 신일러를 받았다. 그리고 추가 시나리오 천왕산(야마자키 전투)에서 시나노의 다이묘로 등장한다.

Fate 시리즈 스핀오프작 제도성배기담에서 등장한다. 모리 나가요시(Fate 시리즈) 참조.

센고쿠(만화)에서는 오니 무사시라는 이명을 지닌 맹장으로 나와 이케다 츠네오키와 함께 도쿠가와군과 코마키 나가쿠테 합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명과 달리 별다른 활약도 못하고 패배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재차 전투를 벌이나 도쿠가와군에게 헤드샷을 당해 전사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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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叉武蔵、推参!
I'm Yashamusashi, I'm here!
야샤무사시, 간다!

바사라 2에는 마에다 토시이에 스테이지 2번째 중간보스로 등장. 후와 미츠하루를 쓰러뜨리면 튀어나온다. 포격형 메카를 몰고 나오는데, 바주카 공격에는 보라색 탄이 섞여 있기 때문에(하드모드 기준) 모아베기로 막으려가다는 죽게 된다. 따라서 대각선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

전국연희에서도 TS되어서 등장했다. 모리 나가요시(전국연희) 참조


[1] 세타 다리에서 통행인 검문을 하는 같은 오다군의 아시가루가 자신을 감히 막아선 것이 건방지단 이유로 단박에 찔러 죽인 뒤 근처를 싹 불질러버리겠다고 위협해 통과했고, 이를 들은 노부나가가 처벌하기는커녕 깔깔 웃으며 '너는 (비슷하게 세타 다리에서 횡포를 부린 것으로 악명높은)무사시보 벤케이같으니 향후 무사시노카미라고 이름붙이겠다!'라고 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2] 일종의 파견무장[3] 모리 란마루로 유명[4]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일종의 우회 기습[5]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 업무[6]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그르치는 나쁜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