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10 19:55:51

르네 판데레이컨

벨기에의 前 축구 감독
파일:René_Vandereycken.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르네 판데레이컨
René Vandereycken
출생 1953년 7월 22일 ([age(1953-07-22)]세)
벨기에 림뷔르흐주 스팔베이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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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3cm|체중 미상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 선수 스포르팅 스팔베크 (유스)
스포르팅 하셀트 (1971~1974)
클뤼프 브뤼허 KV (1974~1981)
제노아 CFC (1981~1983)
RSC 안데를레흐트 (1983~1986)
SpVgg 블라우바이스 베를린 (1986~1987)
KAA 헨트 (1987~1989)
감독 KAA 헨트 (1989~1993)
스탕다르 리에주 (1993~1994)
RWD 몰렌베이크 (1994~1997)
RSC 안데를레흐트 (1997)
1. FSV 마인츠 05 (2000)
FC 트벤터 (2002~2004)
KRC 헹크 (2004~2005)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2006~2009)
국가대표 50경기 3골 (벨기에 / 1975~1986)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및 특징4. 지도자 경력

1. 개요

벨기에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 1970년대 클뤼프 브뤼허 KV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클럽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이다. 에른스트 하펠 감독 하에서 벨기에 리그 3연패와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선수 시절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50경기에 출전하여 UEFA 유로 1980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은퇴 후 지도자로 전향하여 여러 클럽과 벨기에 국가대표팀을 지휘했다.

판데레이컨은 강인한 수비력과 정확한 패스를 겸비한 수비형 미드필더였으며, 거친 플레이와 상대방 도발로도 유명했다. 지도자로서도 혁신적인 전술과 강직한 성격으로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지만, 1991년 벨기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르네 판데레이컨은 림뷔르흐주의 작은 도시 스팔베이크에서 태어나 8세에 지역 클럽인 스포르팅 스팔베크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라운드 관리인으로 일하던 이 클럽에서 유소년 선수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8세가 되던 1971년 3부 리그 팀인 스포르팅 하셀트로 이적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하셀트에서 3시즌을 보낸 후, 1974년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 이끄는 클뤼프 브뤼허 KV로 이적했다. 하펠 감독은 판데레이컨을 즉시 주전으로 기용했으며, 그는 곧 감독의 전술적 파트너 역할을 했다. 때로는 감독의 실수를 지적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지만, 이로 인해 갈등이 생겨 한 차례 출전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1976년 판데레이컨은 클뤼프 브뤼허와 함께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1977-78 UEFA컵 결승에서 리버풀 FC와 맞붙었지만, 1차전에서 3-2로 패하고 2차전에서 1-1로 비기며 준우승에 그쳤다. 1977년에는 리그와 벨기에컵 더블을 달성했다.

1978년 클뤼프 브뤼허는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같은 해 유러피언컵에서 유벤투스 FC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리버풀에게 또다시 패했다. 1979년 벨기에 골든슈 후보에 올랐지만 장마리 파프에게 아쉽게 밀렸다.

하펠 감독이 떠난 후에도 1980년 한 흐레이전하우트 감독 하에서 마지막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후 팀의 주요 선수들이 떠나면서 성적이 하락했다.

1981년 판데레이컨은 이탈리아 세리에 A제노아 CFC로 이적했다. 수비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이탈리아 축구와 잘 맞아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2시즌 동안 28경기에만 출전했다.

1983년 벨기에로 돌아온 판데레이컨은 브뤼허의 라이벌 팀인 RSC 안데를레흐트와 계약했다. 루도 쿡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입된 그는 젊은 엔조 시포와 훌륭한 조합을 이뤘다. 1984년 UEFA컵 결승에서 토트넘 홋스퍼 FC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또 한 번의 아쉬운 준우승을 경험했다.

1985년과 1986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85-86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클뤼프 브뤼허 KV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판데레이컨이 실수로 장피에르 파팽에게 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에 자신이 직접 동점골을 넣어 만회했다. 그러나 경기 막판 시간 끌기 도중 심판에게 볼을 높이 던지는 행위로 퇴장당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안데를레흐트는 우승을 차지했고, 이것이 그의 안데를레흐트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986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갓 승격한 SpVgg 블라우바이스 베를린으로 이적했지만, 팀은 꼴찌로 강등되었다. 1987년 KAA 헨트로 돌아와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헨트에서도 강등을 경험했지만 즉시 승격에 성공했고, 1989년 4월부터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판데레이컨은 1975년 11월 15일 프랑스와의 UEFA 유로 1976 예선에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를 했다. 레몽 후탈스 감독 하에서 시작된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기 티 감독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UEFA 유로 1980에서 판데레이컨은 벨기에의 역사적인 준우승을 이끈 핵심 선수였다. 토너먼트 기간 중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잔카를로 안토니오니를 거친 태클로 부상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결승전에서는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선제골 이후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지만, 결국 서독에 1-2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82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따내어 에르빈 판덴베르흐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벨기에는 본선에 진출했지만 판데레이컨은 불가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해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UEFA 유로 19841986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팀 동료였던 엔조 시포프랑키 페르카우테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부상으로 조기 귀국하며 국가대표 경력을 마감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특징

반데레이켄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며 뛰어난 수비 능력과 정확한 패스 능력을 겸비했다. 하지만 거친 플레이 스타일과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동으로도 유명했으며, 현역 시절 "더러운 선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 지도자 경력

1989년 4월 선수 겸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판데레이컨은 헨트를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었다. 이어서 1부 리그에서도 중위권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에르빈 판덴베르흐를 영입하고 에릭 피스할, 프랑크 다우번, 디르크 메드베트 등 젊은 선수들을 잘 활용했다.

1991년에는 벨기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혁신적인 전술 시도와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 기자들의 라커룸 출입을 금지하고, 아약스와의 1991-92 UEFA컵 8강전에서 리베로 2명을 동시에 기용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1993년 3월 1일 결국 경질되었다.

아리에 한 감독의 후임으로 스탕다르 리에주를 맡았지만 유럽 대회 진출권 확보에 실패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1994년 RWD 몰렌베이크의 감독이 되어 또다시 에르빈 판덴베르흐를 불러들였다. 첫 시즌에는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1995-96 시즌에는 4위를 차지하며 UEFA컵 진출권을 얻었다. 1996-97 시즌 UEFA컵에서는 베식타스 JK에게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리그에서는 RSC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97년 요한 보스캄프의 후임으로 안데를레흐트 감독에 취임했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전 소속팀 RWDM에게 0-2로 패하는 등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선수들과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티보르 셀리메시는 교체 투입을 거부했으며 플로리안 우르반과 제임스 데바는 공개적으로 감독을 비판했다. 11월 28일 클뤼프 브뤼허에게 1-2로 패한 후 11월 30일 경질되었다.

3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2000년 독일 2부 리그 1. FSV 마인츠 05를 맡았다. 하지만 4연패와 컵 대회 조기 탈락으로 11월에 경질되었다.

2002년 네덜란드 FC 트벤터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초반 4경기에서 1승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구단의 신임을 받으며 시즌을 마쳤다. 2003-04시즌에는 전반기에 아약스페예노르트를 연파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겨울 이적시장에서 콜린스 존의 이적을 둘러싸고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떠났다.

2004년 KRC 헹크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오를란도 엥헬라르, 쾰른 다르던, 케빈 판덴베르흐[1], 스티븐 드푸르 등을 지도했다. 16세의 드푸르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다. 심판진과 자주 충돌하고 동료 감독들을 비판했으며, 구단주 요스 파센과도 갈등을 빚었다. 스탕다르 리에주와의 경기에서 연속으로 페널티킥 판정을 받지 못하자 벨트를 풀어 흔들며 항의하는 퍼포먼스로 화제가 되었다. 시즌 종료 후 스탕다르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유럽 대회 진출권을 확보했음에도 계약이 해지되었다.

2005년 12월 23일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아이메 안트뇌니스 전 감독의 부진한 성과를 만회하고 UEFA 유로 2008 본선 진출이 목표였다. 스테판 드몰을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예선에서 벨기에는 A조에 편성되어 포르투갈, 폴란드 등과 경쟁했지만 18점으로 5위에 그쳐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007년 12월 벨기에 축구협회는 21명의 투표를 통해 10대 11로 판데레이컨의 연임을 결정했다.

2010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초반 좋은 출발을 보였다. 에스토니아를 꺾고 터키와 무승부를 거두었으며, 아르메니아도 제압했다. 하지만 스페인에게 1-2로 아쉽게 패한 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게 연속으로 패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2009년 4월 7일 결국 경질되었다.

판데레이컨의 재임 기간 중 왈롱 지역 언론과의 관계 악화가 문제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어권 벨기에 라디오텔레비전과의 갈등으로 인해 인터뷰를 거부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어쨌든 판데레이컨은 지도자로서도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전술을 즐겨 사용했으며,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인해 구단 임원진, 심판, 언론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전술적 이해도와 선수 기용 능력으로 여러 클럽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 에르빈 판덴베르흐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