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류기필(柳基馝) |
본관 | 전주 류씨[1] |
출생 | 1924년 3월 1일[2] |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 주진동 삼산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3][4] | |
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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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조부는 독립유공자 유창식(柳昌植)[5]이며, 외증조부가 독립유공자 이면주(李冕宙)이다. 사촌 형인 유기만(柳基萬)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류기준은 1924년 3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후면(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서 아버지 류원희(柳遠熙)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용필(李瑢弼)의 딸[6]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해 1941년 3월 만주 안동중학교(安東中學校)를 졸업했으며, 1944년 10월경 북경 신민학원(新民學院) 1학년을 중퇴하고 조선의용군에 자진 입대했다가 그해 1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그 뒤 광복군 제3지대에 차출되어 정치공작 간부교육 및 3개월 간의 정훈교육, OSS 특수 공작교육, 안휘성 입황(立煌)[7]지구 공작대 파견 훈련 등을 이수한 뒤 국내 잠입을 준비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1945년 8월 15일 광복군 제3지대에서 일제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의 안전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특파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김남영(金南榮)과 함께 산둥성 칭다오 및 장쑤성 쉬저우 등지에 파견되어 교민 보호 및 상황 정리에 주력하다가 수개월 뒤에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앞서 그만두었던 학업을 지속하기로 결심하고 연희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하였다. 연희대학교 졸업 후에는 OSS 특수 공작반에 복무할 당시 친분이 있었던 영국군 장교의 주선으로 영국 유학에 올랐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류기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