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8:23:08

래리 플린트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래리 플린트
Larry Flynt
파일:Larry_Flynt_2009.jpg
본명 래리 클랙스턴 플린트 2세
Larry Claxton Flynt Jr.
출생 1942년 11월 1일
미국 켄터키 레이크빌[1]
사망 2021년 2월 10일 (향년 78세)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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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배우자 메리 플린트(1961년 결혼, 1965년 이혼)
페기 마티스(1966년 결혼, 1969년 이혼)
캐시 바 (1970년 결혼, 1975년 이혼)
알시아 레저(1976년 결혼, 1987년 사별)
엘리자베스 베리오스(1998년 결혼)
자녀 2남 4녀[2]
학력 마고핀 카운티 고등학교 (중퇴)
종교 개신교 -> 무종교
직업 언론인
소속 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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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언론인으로 미국 성인 산업에서 역사적인 업적을 이뤄낸 인물 중 하나. 미국의 전설적인 하드코어 포르노잡지 허슬러의 창간자이며 수많은 성인 잡지와 비디오를 발행했는데 그것보다도 아래에서 설명할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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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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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시절

Flynt는 켄터키주 마고핀 카운티 의 Lakeville에서 소작농 인 Larry Claxton Flynt Sr.(1919 ~ 2005)와 주부인 Edith(혼전 성 Arnett, 1925~1982) 의 세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여동생 Judy(1947~1951)와 형제 Jimmy Ray Flynt (1948년 출생)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역에서 미군 으로 복무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플린트는 생애 첫 3년 동안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랐다. Flynt는 가난하게 자랐으며 대공황 기간 동안 Magoffin 카운티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였다고 말했다.

1951년, 플린트의 여동생 주디(Judy)가 4세에 백혈병 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죽음으로 인해 1년 후 그의 부모는 이혼하게 되었다. 플린트는 인디애나주 햄릿 에서 어머니 손에 자랐고, 남동생 지미는 마고핀 카운티에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2년 후, 플린트는 어머니의 새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버지와 함께 마고핀 카운티로 돌아왔다.

Flynt는 9학년 때 Salyersville 고등학교(현재 Magoffin 카운티 고등학교 )에 다녔다. 그러나 그는 가출하여 고작 15세임에도 불구하고 위조 출생 증명서를 이용해 미군 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가 포커 게임에 대한 열정을 키운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명예 제대 후 Flynt는 인디애나 에 있는 어머니에게 돌아와 General Motors 계열사인 Inland Manufacturing Company에 취직했다. 그러나 노조 주도의 부진으로 그는 불과 3개월 만에 해고됐다.

그 후 그는 켄터키에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잠시 동안 그는 밀매업자가 되었지만 시 의원들이 그를 추적하고 있단 걸 들은 후 중단하고 1960년 7월, 미 해군으로 입대했다.

그는 USS Enterprise 의 레이더 운영자가 되었다. 그는 존 글렌(John Glenn)의 우주 캡슐을 회수하기 위해 우주선이 배정되었을 때 근무 중인 운영자였고 그는 1964년 7월에 명예제대했다.

그는 스트립 바와 포르노 잡지 허슬러 등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허슬러는 '미국인의 성생활을 그대로 보여드립니다'라는 표어 아래 당시 기준으로는 하드코어한 정사신을 그대로 노출하였으며 기고되는 풍자글들도 극단적으로 직설적이라 등장인물들의 인격을 사정없이 뭉개고 모욕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보수적인 미국 법조계와 경찰에 의해 무수히 체포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으며 성을 너무 노골적으로 상품화한다고 종교인과 기타 등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자[3] 격분했다. 이후 허슬러는 미국의 복음 전도사이자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리더 격인 제리 폴웰(Jerry Falwell, 1933-2007)[4] 목사가 자신을 거론하며 비판한 것을 계기로 그를 표적으로 삼아 잡지에서 무수히 까기 시작했다.

그는 활동 중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되었는데 결국 1978년 3월 미국 조지아주 귀넷 카운티에서 인종차별주의 테러리스트였던 조셉 폴 프랭클린[5]에게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었다.[6] 참고로 이것은 허슬러의 흑인남과 백인녀 관계 묘사에 격분한 백인 우월주의자의 소행으로 위의 사건과는 무관하다. 아무튼 이쯤 되면 그만할 만도 한데 이후에도 병상에 누워 있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누가 봐도 삼류 야동 제작자에 불과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유명세에 오르게 되었다.

2.1. 허슬러 잡지 대 제리 팔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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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후

지금도 허슬러는 잘만 발간되고 있으며[7] 정치적 입지가 점점 강해진 그는 정치입문도 꿈꿨고 실제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다. 당 강령 중 하나가 침대 위에서의 자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전체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에는 포르노 영상물 제작자 조 프랜시스와 함께 포르노 사업에 대한 5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도 했다. 플린트 왈, "사람들이 너무나 낙담해 성적으로 위축돼 있다. 이는 국가로서도 매우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차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섹스 없이는 살 수 없다. 의회가 미국의 성적 욕구를 회복시켜야 할 때"라는 것이다. 2013년 10월에는 자신을 저격했던 테러범의 사형에 반대한다고도 밝혔다.

폴웰 목사는 나중에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유죄 판결은 받은 후 저 세상으로 갔다. 그 뒤를 이은 꼴인 팻 로버트슨 목사[8][9]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반전이 있는데 폴웰과 플린트는 사건으로부터 한참 후 아래에 서술된 영화가 개봉했을때 해당 사건이 다시 회자되자 함께 래리 킹의 토크쇼에 초청을 받은 것을 계기로 사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어찌보면 이 사건에서 판결 다음으로 최대의 반전이다. 이 토크쇼 이후 폴웰이 플린트를 찾아와서 자신과 함께 대학생들 앞에서 공개토론을 여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하고 플린트가 이에 응하면서 연이 닿아, 가치관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이래저래 자주 붙어다니게 되면서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폴웰이 플린트네 집에 자주 놀러오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서로 교환하는 등 발전하여 폴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 둘의 친분이 유지됐다. 폴웰 사후 플린트가 그에 대한 기억과 회한을 담은 글을 신문사에 기고했는데 여전히 폴웰의 사상이나 도덕관에 공감하지는 못하겠고 폴웰이 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과 친구가 되고자 한 건진 여전히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대중도, 나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궁극적인 결말은 바로 우리 두사람이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란 글을 통해 폴웰을 기렸다.

빌 클린턴이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저질렀다는 약점을 잡았을 때 반대세력들은 클린턴을 백악관에서 내칠수 있다고 100% 확신했다. 한편 이 사실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이런 무례한 놈들!" 이라고 분개했으며 본인 자신이 몸담은 "업계"의 정보통을 사용해서 공화당 지도부부터 시작해서 빌 클린턴을 공격하던 모든 세력들의 성적인 스캔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공화당의 큼지막한 비리를 캐 오는 사람한테 현상금으로 한화 1억원 정도를 걸었으며 그 결과가 매우 놀라웠다는 소문도 있다.

아주 소문만은 아닐 수도 있는데 유명한 워싱턴의 포주였던 마담 데보러 진 팰프리 사건 때도 마담께서 고객 "1만명"의 리스트를 공개하겠다고 하자 워싱턴의 높으신 분들 상당수가 잠도 못 잤다는 얘기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트럼프 탄핵에 1천만 달러를 걸 정도였다.

이후 로봇 치킨이나 사우스 파크 같은 패러디물에서 실존인물들을 인격적으로 오체분시하고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호머 심슨은 그와 스티븐 호킹을 구분하지 못한다.

2021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심부전#

3. 이 항목의 인물을 다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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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2] 그의 딸들 중 1명은 201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 허슬러의 선구자이자 미국 성인 잡지계의 선두주자인 플레이보이가 처음 발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심지어 골수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플레이보이를 가리켜 거의 사탄 취급을 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개방적이고 문란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복음주의 기독교 문화가 굉장히 강해서 보수적인 부분도 많다.[4]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리버티 대학교, 신학교의 설립자이다.[5] 미국의 연쇄살인마이자 테러리스트로 주로 다인종 커플들에 대한 살인 행각과 버논 조던 같은 흑인 인권운동가에 대한 테러, 인종차별을 목적으로 한 총기난사, 폭탄 테러 등 인종차별적 범죄로 악명이 높았다. 1980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고 2013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6] 이때 범인인 조셉은 잡지 못하고 수사에 난항을 겪다가 1980년 조셉이 연쇄살인으로 체포된 후 수사하는 과정에서 레리와 버논 등에 대한 테러도 밝혀졌다.[7] 다만, 판매부수는 하락하는 중이다. 사실 온라인으로 쉽게 야동을 접하는 시대가 왔으니 더 이상 포르노 잡지를 돈 주고 사서 보기에는 시기가 지나가도 한참 지났다. 물론, 이를 인지하고 온갖 야동도 장르별로 신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사실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 등은 포르노 온리가 아니고 책에 실리는 각종 유명인 인터뷰, 소설, 각종 르포, 흥밋거리 저술 등도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보이는 심각한 적자로 매각설이 끊이지 않고 결국 누드를 싣는 것을 포기했다.[8] 이집트 출신으로 미국 이민 와서 개신교 목사가 된 가브리엘 아사드는 제리 폴웰과 팻 로버트슨을 같은 목사로서 쓰레기급이라고 악평하면서 차라리 래리 플린트가 더 낫다. 비록 변태적이고 꼭 좋은 건 아니지만 목사로서 가진 이중적 모습과 타종교(역시 둘 다 이슬람을 매우 혐오했기 때문에 무슬림이었던 아사드로선 더 보기 안 좋았을 듯)에 대한 점으로 치자면 플린트가 선구적이라고 견줘 호평한 바 있다.[9] 팻 로버트슨과 사이좋은 대통령이 바로 조지 워커 부시였기 때문에 아랍권에서는 또라이 개독 목사의 사주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아냥까지 있을 정도다. 로버트슨은 우고 차베스가 사탄이라느니 비난하며 그를 암살하든지 미국이 남미에도 이라크 전쟁과 같은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을 하여 비판을 많이 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