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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모춘

정묵촌에서 넘어옴
파일:정목춘.jpg
왕징웨이 정권 절강성장 겸 중앙정치위원
본명 <colbgcolor=#ffffff,#1f2023>딩레이성(丁勒生)
정체 丁默邨
간체 丁默村
한국식 독음 정묵촌
영문 Ding Mocun
출생 1901년
청나라 호남성 상덕
사망 1947년 7월 5일 (향년 46세)
중화민국 난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유신정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호남성립 제2사범학교
직업 관료,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한간의 길2.3. 최후
3. 매체에서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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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이자 중일전쟁 때의 친일 한간.

원래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으나 중국국민당으로 전향했고, 이후 친일 괴뢰 왕징웨이 정권에 부역하면서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1년, 호남성 상덕에서 태어났다. 1920년 호남성립 제2사범학교에 들어가 학생회 활동을 했으며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청년소조를 조직했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중국국민당 당적을 가지게 되었으며, 1925년 광저우로 이주했다.

1926년 국민당 중앙조직부 조사과에 들어감으로써 첩보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산당과 단절하자 이 소동 중에 잠시 첩보직을 은퇴하여 1930년, 상하이의 민광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는데 이때 그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정핑루였다. 1934년, 극우 반일 단체인 CC단의 지도자였던 천리푸가 그를 스카우트하면서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일명 '군통') 3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군통의 최고 간부에 이르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초기에는 항일전을 수행하여 1938년,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우한특별시 참사, 국민정부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2.2. 한간의 길

하지만 한간이었던 리스췬과 대본영 특무부장 도이하라 겐지의 포섭으로 국민정부를 버리고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후 일본 제국에 투항하여 중화민국 유신정부에 합류, 리스췬과 함께 괴뢰 특무기관인 76호를 조직하여 임시수도 충칭으로 피난간 국민정부의 군통과 대결했다. 이로 인하여 저우포하이의 신임을 받았으나
상하이의 도살자, 권총왕, 암살왕, 살인마, 왕징웨이힘러
등의 악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이력으로 국민정부의 분노를 사게 되어 수차례 그를 암살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39년에 발생한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었다. 이때 딩모춘은 특유의 기민함으로 살아남았으며, 자신을 죽이려 한 정핑루를 살려주었으나 아내였던 자오후이민의 반발로 결국 1940년에 그녀를 총살형에 처했다. 이때 76호 내부의 정적들로부터 처신을 잘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76호에서 축출되었다.

허나 1940년 3월, 왕징웨이의 괴뢰 난징 국민정부 수립과 함께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어 왕징웨이 정권이 붕괴되는 순간까지 재직했고 군사위원회 위원, 행정원 사회부장을 거쳐 1941년 8월 교통부장, 1943년 사회복지부장, 1945년 5월 절강성장, 절강성 보안사령관, 절강성 당부주임, 항주 수정공서 주임으로 임명되는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말기에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력과 군사력으로 인해 일본 제국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천리푸와 접촉하여 다시 국민정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국민정부는 마오쩌둥 휘하의 홍군이 대도시 상하이와 옛 수도 난징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딩모춘을 절강성장에 재임명했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신속히 왕징웨이 정권의 잔재를 제거하면서 곧 국민정부가 파견한 관료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일제 패망 이후인 1945년 9월, 육군총사령관 허잉친이 '한간 체포령'을 하달함에 따라 '죄질이 중대한 자'로 분류되어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한간을 활용하고자 했던 다이리의 계획으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나 1946년 다이리가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한간을 처벌하자는 '숙간운동'이 벌어지면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악명높은 딩모춘의 재판을 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이 운집했고, 딩모춘은 재판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에 대항했으며, 친일 활동도 민중을 위해 부득이하게 한 것이었다고 변명했다.
"반공은 본인의 평생 숙원이다. 비록 괴뢰 측에 있었지만 반공 공작을 적극 책동하면서 조금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또한 본인이 전후에 맡은 괴뢰 직은 모두 사회와 민중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에 힘을 기울여 공산당의 활동이 동남지역에서 발전할 수 없게 했다. 일본의 투항 이전에 공산당은 동남에서 비록 군중을 쟁취하고자 노력했지만 효과가 없었으니 본인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고, 본인의 부하들도 이에 대해 많은 협조를 했다."

또한 딩모춘은 자신이 76호의 책임자로 있는 동안 국민당의 군통 요원들을 도와주고, 비밀리에 석방시키기도 했다면서 자신이 항일을 오히려 도왔다고 주장했다. 저우포하이처럼 딩모춘은 일제 패망 이전에 국민정부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한 정황이 있었고, 실제로 반공을 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억제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정부 측은 딩모춘을 일단 살려두기로 결정했다.

2.3. 최후

재판정은
"괴뢰 중앙정치위원회는 괴뢰 조직의 최고 기구로서 모든 정치, 경제, 외교 및 군사 등 괴뢰의 국책은 그 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피고가 그 회가 성립할 때부터 반역자 왕자오밍에 의해 위원으로 지목되어 승리할 때까지 지속했다. 피고가 그 위원회에서 여러 해 재임했던 것은 피고가 스스로 인정하는 바로 그 위원회에 대한 일체의 결의한 모든 결의는 마땅히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
고 판결함으로써 딩모춘이 왕징웨이 정권의 요직에 있었던 것 자체가 그에게 반역의 공동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단지 피고가 비록 작은 공을 세웠지만 그 죄악이 극에 달하여 이로움과 해를 따져 보면 그 죄악의 10,000분의 1도 보상하기에 부족하다.”
라면서 딩모춘의 과가 공보다 크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으나 그의 신병 치료를 이유로 수감 중 외출을 허용하는 등 나쁘지 않게 대우했다.

하지만 딩모춘은 치료를 이유로 외출했음에도 병원만 다녀오지 않고, 상하이 길거리를 쏘다니며 유람을 즐긴 탓에 국민적인 분노를 샀다. 《중앙일보》는 딩모춘의 유람을 보도했고, 이 때문에 장제스도 격노하여 그를 다시 수감할 것을 지시했다. 1947년 7월, 딩모춘은 난징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3. 매체에서

작가 루쉰의 동생으로 일본에 협력한 죄로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던 주작인은 감옥에서 딩모춘의 죽음을 전해듣고, 그의 죽음은 군중심리 때문에 영웅을 죽인 일로 여겨 딩모춘을 추모하는 칠언전구시를 지었다.
영웅의 죽음이야 심상한 일이지만
오월의 처형은 잘못된 일
중생들의 박수갈채 들으며
몸을 바쳐 야후를 키운 일을 후회했겠지요.
(英雄一死尋常耳, 午月終凶事或誣
嬴得衆生齊拊掌, 投身應悔飼耶呼)

영화 <색, 계>에서 양조위가 딩모춘을 모델로 창작된 악역인 이모청을[1] 맡아 품위있으면서도 잔인한 모습을 잘 연기했다. 이 때문에 1978년 원작 《색, 계》와 이안의 영화 <색, 계> 모두 한간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가 있으며, 원작자였던 장아이링역사적인 악인이 스스로를 악마로 생각하면서 살았을리 없다고,[2] 그들의 내면을 묘사한 걸로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며 반박했다.

4. 참고문헌

  • 《중국, 대만 친일파재판사》, 마스다 야스이치, 한울.
  • <색계로 본 장애령의 친일문제>, 이강범, 한선애, 《중국어문학논집》 104집, 중국어문학연구회.
  • <전후 한간 재판과 한간의 대일 협력론>, 박상수, 《중국근현대사연구》 47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영화 색계의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 연구>, 신명주,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周作人과 『老虎橋雜詩』Ⅱ - 「往昔」과 「丙戌丁亥雜詩」를 중심으로>, 김미정, 《중국현대문학》 66호, 한국중국현대문학회.


[1] 이름부터 딩모춘의 와 <색, 계>의 원작자인 장아이링의 남편이었던 친일파 관료 후란청의 자를 따와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2] 그 나치 부역자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친일반민족행위) 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였다"라는 궤변을 하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