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1 07:10:33

다카츠카사 카즈코


鷹司和子, 1929년 9월 30일 ~ 1989년 5월 26일(향년 만 59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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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성장3. 약혼4. 불행한 결혼생활 및 사별5. 친정으로 돌아가다6. 사망

1. 개요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3녀. 아키히토 덴노와 마사히토 친왕의 셋째 누나이다. 미혼 시절의 이름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

2. 출생과 성장

1929년 9월 30일,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3녀로 태어났다. 카즈코 공주의 위로는 1925년생인 큰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1927년생인 작은언니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가 있었으나, 사치코 공주는 카즈코 공주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28년에 불과 생후 6개월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다. 덴노 내외는 큰 충격에 빠졌고, 특히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만한 크기의 베개를 안고 다닐 정도였다.

카즈코 공주는 이렇게 큰 슬픔 끝에 새로이 찾아와 준 아기였다. 그러나 일본 황실일본 정부로서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스러웠고, 나가코 황후도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나가코 황후는 다섯째이자 장남인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을 낳기 전까지 '온나바라(女腹)', 즉 '딸만 낳는 여자'라며 숱한 비난과 시집살이를 당했고, 황실과 정부는 후궁 제도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2]

일본 황실화족 사회의 전통대로, 카즈코 공주도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성장했다.[3] 언니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 여동생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구레타케(烏竹) 기숙사에서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1936년 4월, 카즈코 공주는 여자 가쿠슈인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학제가 바뀌어, 여자 가쿠슈인은 오늘날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 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48년 3월, 카즈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졸업한다.

3. 약혼

패전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일본 황실화족(귀족)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전락(신적강하)하여, 황족의 범위가 대폭 줄어들었다. 방계 황족에게 시집가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했던 맏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와 달리, 시게코의 여동생들은 황실 밖에서 신랑감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혼하면 황족 신분을 잃게 되었다. (시게코도 패전 후 평민으로 떨어졌다.)

카즈코 공주는 1948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졸업한 후 前 시종장 햐쿠타케 사부로(百武三郞)의 거처에서 1년 정도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11월 23일 이종사촌 오빠인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4]와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오오타니 가문에서도 적극 환영했으나, 이건 파혼되고 1950년 1월에 6살 연상인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의 약혼이 정해졌다. 도시미치의 아버지 다카츠카사 노부스케(鷹司信輔)는 옛 공작[5]이자 메이지신궁신관이었다. 패전 후 처음인 공주의 결혼에, 신랑감이 옛 공작 가문의 아들이지만 일반 직장인이라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다카츠카사 가문은 후지와라 고셋케 중 한 가문으로 후지와라 씨족이기도 하다.

약혼 기간 중에 도시미치는 카즈코 공주가 두 여동생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생활하는 구레타케 기숙사를 자주 방문했다.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결혼 전에 신랑 될 사람을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어른들이 정한 상대에게 시집가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기에, 여동생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교제, 데이트 등을 거친 것이다. 특히 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러한 신식 행보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6]

4. 불행한 결혼생활 및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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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코와 도시미치 부부.

1950년 5월 20일, 카즈코 공주는 도시미치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녀는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다카츠카사 카즈코는 5년 후인 1955년에야 임신했지만 사산(死産)되었고, 이후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7]

1966년 1월에는, 사라졌던 도시미치가 이틀 만에 단골 바(bar)의 마담(당시 39세)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장소는 마담의 집이었고, 두 남녀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이 사건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고, 몹시 충격을 받은 카즈코와는 상관없이 언론은 정사(情死) 등의 선정적인 제목으로 신나게 보도했다. 남편의 간통에 이어 갑작스러운 사별과부가 된 카즈코는, 언론과 공공장소에 노출되는 것을 점점 피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68년에는 강도까지 당했다. 카즈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주방에 칼을 든 강도가 침입한 것. 입을 틀어 막힌 카즈코는 겨우 현관으로 도망쳤지만, 양손 가운데손가락에 전치 1주의 부상을 입었다.

5. 친정으로 돌아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카즈코는 친정인 황실로 돌아가서 살았다. 카즈코가 강도에게 부상을 입은 사실에 격분한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 및 작은아버지 노부히토 친왕과 다카히토 친왕은[8] 카즈코의 안전을 염려하여 황거에서 살 것을 권유했다. 카즈코는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으나, 이미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과부의 신세이기도 했고,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제안을 결국 수용했다.

황실에서는 아카사카(赤坂) 이궁에 카즈코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원래 이곳은 궁정 보모들을 위한 시설로 만들어진 곳이다. 하지만 '평민 출신의 비'로 화제를 모은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신의 품에서 손수 아이들을 길렀고, 그 때문에 아카사카 이궁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남동생 부부인 아키히토 황태자와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 마사히토 친왕과 작은올케 하나코(華子) 친왕비,[9] 작은어머니 키쿠코(喜久子) 친왕비유리코(百合子) 친왕비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쓸쓸해하던 카즈코를 많이 챙겨주었다. 가족 휴가나 만찬 등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리고, 같이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려울 때일수록 카즈코를 도와주기도 했다.

결혼 후 5년만에 생긴 출산에 실패하고, 남편을 떠나보내고, 강도에게 습격당하는 불행한 일들을 뒤로 한 채 친정인 일본 황실로 돌아가 1970~80년대 황거에서 생활하면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남동생, 올케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카즈코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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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황태자비였던) 큰올케 미치코 상황후와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여름 휴가에서.

1974년에는 고모할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10]의 뒤를 이어 이세신궁의 제관을 맡았다. 1988년 카즈코가 퇴임한 후로는 바로 아래 여동생인 이케다 아츠코가 뒤를 이어 제관이 되었고, 2012년부터는 조카인 구로다 사야코가 늙고 쇠약해진 고모 아츠코를 돕기 위해 보조 제관이 되었다. 아츠코는 2017년 제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사야코가 정식 제관으로 취임했다.

6. 사망

1987년과 1989년 작은아버지 노부히토 친왕과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남동생 아키히토가 아버지 히로히토의 뒤를 이어 새 덴노에 즉위한지 약 4개월 후인 1989년 5월 26일, 카즈코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듯 심부전증으로 사망하여 유산과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고, 고모 카즈코가 살던 아카사카 이궁에 신접살림을 차려 1997년 구 치치부노미야 저택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거주했다.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이 집에 살며 1991년 장녀 마코 공주, 1994년 차녀 카코 공주를 낳았다.

카즈코가 사망한 1989년은, 카즈코 본인은 물론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뿐만 아니라 이모 오오타니 사토코, 어머니 나가코 태후의 사촌언니이자 카즈코의 7촌 이모인 이방자 여사까지, 나가코 태후와 관련된 인물이 4명이나 사망했던 해다. 때문에 나가코 태후로써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 왔을 시기였다. 그리고 그걸 큰며느리인 미치코 황후에게 화풀이했지.
[1]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를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는 친왕/왕.[2] 신하들이 화족 규수 몇 명을 후궁 후보로 선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보고했지만,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3] 훗날 '평민 출신의 비(妃)'로 화제를 모았던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2남 1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길렀다.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자녀들을 친부모의 품에서 양육하기 시작했다.[4] 고준 황후의 여동생인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의 아들.[5]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이 됨.[6] 그러나 정작 자신이 시어머니 입장이 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서는 장소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더니 1959년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할 때 강하게 반대했고, 그 반대를 이기고 결혼이 이루어진 후에도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7] 끝내 자녀를 낳지 못하여, 시누이 마츠다이라 아키코(松平章子)의 아들인 나오다케(尙武)를 양자로 들였다.[8] 사실 격분할만도 했다. 자기 딸/조카가 부상을 당했는데 분노하지 않을 아버지와 숙부가 있을리가...[9] 아키히토마사히토는 셋째 누나 카즈코가 결혼하여 황거를 떠난 이후에 결혼했다. 아키히토는 1959년에, 마사히토는 1964년에 결혼했다.[10]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하고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그래서 후사코는 이세신궁에서 미치코 황태자비를 홀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