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반 엑셀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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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9번 | ||||
짐 촌스 (1979~1981) | → | 닉 반 엑셀 (1993~1998) | → | 브라이언 러셀 (2003~2004) |
덴버 너기츠 등번호 31번 | ||||
안드레 무어 (1987) | → | 닉 반 엑셀 (1998~2002) | → | 네네 (2002~2012) |
댈러스 매버릭스 등번호 31번 | ||||
빌 커리 (2000) | → | 닉 반 엑셀 (2002~2003) | → | 제이슨 테리 (2004~2012) |
{{{#FFB300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등번호 37번}}} | ||||
팀 창단 | → | 닉 반 엑셀 (2003~2004) | → | 결번 |
{{{#fff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등번호 19번}}} | ||||
짐 잭슨 (1999) | → | 닉 반 엑셀 (2004~2005) | → | 조엘 프리랜드 (2012~2015) |
{{{#fff [[샌안토니오 스퍼스|샌안토니오 스퍼스]] 등번호 31번}}} | ||||
말릭 로즈 (1997~2005) | → | 닉 반 엑셀 (2005~2006) | → | 케이타 베이츠디옵 (2020~2023) |
니키 맥스웰 밴 엑셀 Nickey Maxwell Van Exel | |
출생 | 1971년 11월 27일 ([age(1971-11-27)]세) |
위스콘신주 커노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신시내티 대학교 |
신장 | 185cm (6' 1") |
체중 | 86kg (190 lbs) |
윙스팬 | 193cm (6' 4") |
후원사 | 리복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 |
드래프트 | 1993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7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지명 |
소속 팀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3~1998) 덴버 너기츠 (1998~2002) 댈러스 매버릭스 (2002~2003)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03~2004)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2004~2005)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5~2006) |
지도자 | 텍사스 서던 대학교 코치 (2009~2010) 밀워키 벅스 코치 (2013~2014) 텍사스 레전즈 코치 (2014~2015) 텍사스 레전즈 (2015~2016) 멤피스 그리즐리스 코치 (2016~2019) 애틀랜타 호크스 코치 (2021~2023) |
등번호 | 9번 - 레이커스 31번 - 덴버 / 댈러스 / 샌안토니오 37번 - 골든스테이트 19번 - 포틀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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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별명은 Nick The Quick. 이례적인 플레이로 디펜스를 농락시키고 폭발적인 퍼스트 스텝과 골 밑 돌파로 두둑한 배짱을 지녔지만 코칭스태프와 여러 차례 마찰을 일으킨 악동 중의 악동이자 반항아였다. 또한 빠르고 과감한 스타일로 퍼스트 스텝과 클러치 상황에서 흔들림 없는 3점슛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던 가드였다.2. 대학 시절
시험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트리니티 밸리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신시내티 대학교로 편입되었지만, 그때부터 그의 활약이 빛나기 시작했다.
3학년 때 밥 허긴스[1] 감독의 지도 하에 NCAA 남자농구 전국대회에서 크리스 웨버, 주완 하워드, 제일런 로즈가 이끈 미시간 대학교와 4강전에서 패했지만 역대 3점슛 성공률 35.8% 등을 기록하면서 올 아메리칸 서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기량과 인지도 덕분에 드래프트에서 상위권 지명을 얻었을 정도로 굉장한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이후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워크 아웃 캠프 때부터 나온 불성실한 태도와, 인터뷰 때도 다혈질 같은 성격으로 거만하게 일관하며 나쁜 인상만 심어주었다.
결국 로터리 픽 배제로 인해 2라운드 37순위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3. 선수 시절
3.1.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년차인 1993-94 시즌에는 주전으로 81경기를 출전해 80경기를 모두 선발로 나서며 13.6득점, 2.9리바운드, 5.8어시스트, 1.0스틸을 기록하며 올 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각광받았다. 또한 구단 역사상 1000점 이상을 넣은 선수는 5번째[2]였으며 3점슛 123개를 넣은 레이커스 신인 선수의 3점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1994-95 시즌에는 드래프트에서 10순위로 지명된 에디 존스의 합류와 피닉스 선즈에서 세드릭 세발로스가 들어왔고, 델 해리스 감독의 지도 아래 런앤건 공격을 주도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지 1년만에 다시 진출시키는데 성공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은 하이라이트는 라이벌이기도 한 보스턴 셀틱스와의 정규 리그 원정 경기가 진행된 보스턴 가든에서 극적인 3점 버저비터를 넣으며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즌 80경기를 모두 선발로 출전하면서 16.9득점 8.3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1995-96시즌 데뷔 후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1991년 HIV에 감염되어 파이널 무대를 끝으로 1번 은퇴했다가 시즌 중반 현역에 복귀한 매직 존슨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3][4] 여기에 4월 11일에 개최된 덴버 너기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경기 종료 3분 23초를 남기고 경기 내내 심판 판정에 불만을 느끼자 론 게럿슨 심판을 밀어트리는 사고를 치며 곧바로 퇴장당했고, 7경기 출전 정지와 동시에 19만 달러의 벌금 징계를 받았다.[5][6][7][8] 그러다가 플레이오프 1라운드 휴스턴 로키츠와의 원정 경기에 복귀했지만 징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플레이오프 평균은 고작 11.8득점에 그쳤다.
1996-97 시즌에는 드래프트에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고졸 출신 코비 브라이언트를 블라디 디박과 맞트레이드 시켰고 FA에서 공룡 센터 샤킬 오닐을 영입하면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공격적인 행보 변화보다 새로운 선수들을 향해 바라본 반 엑셀의 시선은 레이커스 팬들로부터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무리 없이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발되기도 했던 1997-98 시즌에는 샤크와 코비 등에게 밀렸고 득점보다 패스와 경기조율을 원한 델 해리스 감독과의 불화로 갈등이 이어지자 다음 시즌 토니 베티와 드래프트에 지명된 터란 루에 대한 권리를 양도함에 따라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 되었다.
3.2. 레이커스 이후
당시 너기츠는 최약체 팀이었던지라 플레이오프 진출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2001-02 시즌 중반에 팀 메이트였던 에이버리 존슨, 라예프 라프렌츠, 타릭 압둘-워하드와 함께 주완 하워드, 도넬 하비, 팀 하더웨이, 200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과 맞교환으로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9] 되어 LA 레이커스 시절 은사였던 델 해리스 어시스턴트 코치와 재회하였고, 주전인 스티브 내시와 함께 백코트라인을 구축하며 3점 슛 등의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2002-03 시즌에 기록한 성적은 평균 12.5득점, 4.3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37.8%였다.
2003-04 시즌에는 5:4 트레이드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옮겼으나 부상이 겹쳐져 39경기를 뛰는데 그쳤고, 이후 데일 데이비스, 댄 디카우와 트레이드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이적하였지만 불과 53경기를 출전해 11득점으로 그쳤다. 방출 뒤 마지막으로 계약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비록 벤치 멤버였어도 주전급 못지 않게 15분을 소화해 5.5득점을 기록하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댈러스에게 패한 것을 끝으로 쓸쓸히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4. 여담
-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눈썹에 상처가 있다.
- 유타 재즈와의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 경기 때 벤치에서 관객들이 외친 디펜스에 맞춰 상당히 못된 장난으로 당시 비시즌 때 레이커스 선수들과 관계자가 바캉스로 갔던 칸쿤[10]이라고 외치며 논란이 커지자, 이에 대해 LA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는 “나와 라커룸에 있던 모든 선수들은 이 팀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부당하게 잘못된 뜻으로 하지 않았다.”(Everyone who was in that locker room with me knows I’d never give up on the team. But finger-pointing happens. I never meant anything wrong.)고 말했다.[11] 이로 인해 1-2-3 칸쿤[12]은 NBA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우스개소리로 남게 되었으며, 레이커스 구단은 반 엑셀을 덴버로 트레이드 시켰다.
- 2013년 1월 31일, 자신의 아들인 니키 반 엑셀이 친구를 총으로 쏴 죽이고 차에 실은 시체를 레이 허버드 호에다 버린 혐의로 징역 60년을 선고받았다. 경찰에 의하면 시체를 발견했을 때 피살당한 친구의 상체에서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1] 1953년 9월 21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모건타운 출생. 오하이오 대학교와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를 거쳐 1977년 모교인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1978년부터 2년 동안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코치로서 엘든 밀러 감독을 모시다가 1980년 당시 NAIA급 대학이던 월시 대학교에서 감독으로 데뷔해 1981-82 및 1982-83 시즌 두 차례에 걸쳐 토너먼트 진출을 이뤄냈다. 이후 1983년부터 1년 남짓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 코치를 거쳐 1984년부터 5년 동안 애크런 대학교를 지휘하며 1985-86 시즌에 NCAA 전국대회 진출을 달성한 바 있고, 1989년부터 16년간 신시내티대 농구부를 지도하며 반 엑셀 외에 캐년 마틴, 대니 폿슨 등을 발굴/육성했다. 그러나 2004년 음주운전 행위로 체포된 후 당시 총장이던 낸시 L. 짐퍼와 여러모로 갈등이 생겨 2005년 8월 계약에 따라 300만 달러를 받고 사임했으며, 2006년부터 1년 간 캔자스 주립대학교를 거쳐 모교 웨스트버지니아대로 돌아와 2023년까지 지도해오며 조 마줄라(현 보스턴 셀틱스 감독), 데빈 이뱅크스, 케빈 존스, 제본 카터 등을 육성했다. 202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2] 첫번째는 제리 웨스트, 두번째는 놈 닉슨, 세번째는 제임스 워디, 네번째는 매직 존슨[3] 심지어 매직이 합류한 시점에서 팀이 우승까지 가능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다만 이는 희망섞인 관측으로, 매직이 합류한 이후 레이커스는 22승 10패로, 풀시즌 환산시 56승 페이스란 좋은 기록이었으나 서부 강팀들이었던 64승 소닉스, 59승 스퍼스만큼의 위용은 아니었다. 매직이 뛰던 구간의 레이커스는 시즌 최다인 8연승까지 내달렸으나, 무려 17연승을 달린 소닉스와 14연승을 달린 스퍼스(9연승을 한번 더 했다)가 같은 컨퍼런스에 있기 때문에(반대편엔 72승 불스와 60승 매직도 있었다) 우승을 예측하는 건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다만 우승을 어느 정도 노려볼 수 있다는(contender) 예측은 있었는데, 팀케미가 박살나며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도 휴스턴 로키츠에게 1라운드에 1승3패로 무너지고 만다.[4] 밴 악셀과 매직과의 갈등이 포지션 중복 때문이란 것은 국내에서 퍼진 낭설이다. 매직은 복귀 이후 무거워진 몸과 떨어진 기동력 때문에 포워드 포지션에 출전했고(물론 공격에서 플레이 자체는 기존과 비슷하게 포스트업 공격+리딩 위주였다), 반 액셀은 매직이 복귀한 이후에도 전 경기를 주전 PG로 출전했다. 출장시간이 1분, 야투 시도가 1개 남짓 줄긴 했지만 반 액셀이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긴 어려웠다. 매직이 포워드 스팟에 들어오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포워드이자 공동주장인 세드릭 세발로스로, 그 전까지 그는 1옵션으로 36.3분간 야투 16.9개로 23.4점을 올리고 있었으나 매직 복귀 이하 31분 야투 13.9개로 18.9점로 떨어지고, 38경기 중 31경기를 주전출장했다. 매직은 복귀 이후 주로 벤치에서 출장하며 3,4번을 오갔는데, 복귀 이후 센터인 디박과 파워포워드 엘든 켐벨은 계속 주전으로 나왔고 출장시간도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주전 스몰포워드이자 팀의 에이스 세발로스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세발로스가 시즌 중 무단으로 팀에서 이탈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팀내 역할이 줄어든 것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있었다. 다만 매직과 반 엑셀간의 갈등이 있긴 했는데, 반 엑셀이 심판을 밀쳐 7경기 징계를 받자 매직이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또한 위의 SI기사에 보이다시피 복귀 후 3달이 지난 4월 쯤에 앞으로 매직이 리딩 역할을 늘리면서 반 엑셀과 갈등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예측이 있었던 정도인데, 실제로 코트 내 역할 배분 때문에 둘이 문제를 겪은 적은 없었다.[5] 이는 레이커스 구단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수치였고, 그로 인해 선수 이미지가 크게 무너져 버렸다.[6] 경기가 끝나고 퇴장당한 반 엑셀은 인터뷰에서 "굿 콜(Good Call)이라고만 말했을 뿐인데 테크니컬 파울을 주었다며 게럿슨 심판에게 사과할 마음은 전혀 없다"고 분노했다.[7] 비슷한 사건은 1996년 3월 16일 시카고 불스의 데니스 로드맨이 뉴저니 네츠전에서 퇴장 명령을 받은 직후 테드 버하트 심판을 머리로 받으며 6경기 출전 정지와 2만 달러 벌금을 부과받았다.[8] 사건 발생 뒤, 당시 레이커스 사장이었던 제리 웨스트는 어리석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며 비판했다.[9] 당시 도움을 주었던 인물은 구단주 마크 큐반이었다.[10] 멕시코 남동부 킨타나로오 주의 북동부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WTO의 농업개방 협상 반대시위를 벌인 이경해가 할복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11] 샤킬 오닐은 반 엑셀의 경솔함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며 방출시키라고 프런트에게 거칠게 요구한 것이 트레이드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12] 참고로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감독이었던 앨빈 젠트리는 2018 NBA 플레이오프 회견장을 떠나기 전 “1-2-3 칸쿤이 뭔가요?”(What is it? 1, 2, 3 Cancun.)라고 기자들에게 발언하며 웃음바다로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