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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파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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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제4•6대 총리
세르비아 왕국 제9•25•28•31•34대 총리
니콜라 파시치
Nikola Pašić / Никола Пашић
파일:니콜라파시치.png
출생 1845년 12월 18일
세르비아 공국 자예카르
사망 1926년 12월 10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재임기간 세르비아 왕국 제9대 총리
1891년 2월 23일 ~ 1892년 8월 22일
세르비아 왕국 제25대 총리
1904년 12월 10일~1905년 5월 28일
세르비아 왕국 제28대 총리
1906년 4월 29일~1908년 7월 20일
세르비아 왕국 제31대 총리
1909년 10월 24일~1911년 7월 4일
세르비아 왕국 제34대 총리
1912년 9월 12일~1918년 12월 1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임시(de facto) 총리
1918년 12월 1일~1918년 12월 22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4대 총리
1921년 1월 1일~1924년 7월 28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6대 총리
1924년 11월 6일~1926년 4월 8일
정당 인민급진당
1. 개요2. 생애
2.1. 청년기2.2. 창당과 정계입문
2.2.1. 창당2.2.2. 티모크 반란2.2.3. 불가리아 망명
2.3. 고위정치기
2.3.1. 첫 총리 임기2.3.2. 알렉산다르 1세의 쿠데타2.3.3. 밀란 1세 암살 미수
2.4. 세르비아의 황금기
2.4.1. 5월 쿠데타2.4.2. 관세전쟁2.4.3. 발칸전쟁2.4.4. 개전
2.5. 대전쟁과 남슬라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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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거의 50년에 걸친 정치 경력 동안, 세르비아의 총리를 다섯 번, 유고슬라비아의 총리를 세 번 역임하여 22개의 정부를 이끌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세르비아의 20세기 역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12년의 재임 기간 동안, 니콜라 파시치는 세르비아의 최장기 재임 총리였다.

2. 생애

2.1. 청년기

파시치는 1845년 12월 18일 세르비아 공국의 자예차르에서 태어났다.
1867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철도 공학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파시치는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고 "전문 분야에서 필수적인 과목들을 뛰어넘는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파시치는 친독일 성향 교수들의 독일 역사나 현대사 수업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이후 그는 엔지니어로 졸업했지만 빈-부다페스트 철도 건설 외에는 전공 분야와 관련된 일은 하지 않았다.

2.2. 창당과 정계입문

2.2.1. 창당

취리히에서의 대학시절 때, 파시치는 다른 세르비아인 학생들과 모여 살았고, 그들과 함께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동료 학생들 중 일부는 나중에 세르비아의 사회주의 및 급진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세르비아에서 중요한 사회주의 이념가인 스베토자르 마르코비치(Svetozar Marković)이다. 파시치는 마르코비치, 페라 벨리미로비치(Petar Velimirović), 요반 우호비치(Jovan Žujović)등의 동료들과 함께 급진당에 입당하여 초기 당원이 되었다.

세르비아로 돌아온 파시치는 1875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반(反)오스만 봉기에 동참하기 위해 보스니아로 다시 떠난다.[1] 동료 마르코비치가 봉기 중 사망한 후 파시치는 봉기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이 형성되기도 전인 1878년 세르비아의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1880년 그는 의회에 야당 대표단을 구성하는 세르비아 정치계에서 전례 없는 행보를 보였다. 마침내 1881년 1월, 정당 계획이 완성되고, 최초의 조직적인 세르비아 정당인 인민급진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된다. 파시치는 이때 급진당의 초대 당수가 된다.

2.2.2. 티모크 반란

창당 후, 파시치와 급진당은 순식간에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1883년 9월 선거에서 급진당은 54 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밀란 1세[2]가 총애하던 진보당은 30 퍼센트의 득표율에 그쳤다. 급진파의 확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친러시아 성향이던 파시치와 급진당을 견제하던 친오스트리아 성향의 국왕은 무소속 강경파인 니콜라 흐리스티치(Nikola Hristić)를 임명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의회는 이에 협조를 거부했고, 회기는 연기된다.

흐리스티치가 농민 민병대의 화기를 압수하고[3] 정규군을 세우려 하자 분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세르비아 북동부 티모크 계곡에서 심각한 지방 봉기였던 티모크 반란이 촉발된다. 밀란 1세는 소요사태를 급진당[4] 탓으로 돌리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급진당원 734명이 체포됐고, 3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파시치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헝가리로 망명해 가까스로 체포를 면했다.

2.2.3. 불가리아 망명

반란 후 6년 동안 파시치는 불가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친척들과 함께 살았다. 파시치는 이 때 소피아에서 건물 계약자로 일했고 내무부에서도 잠시 일했다.

불가리아 정부의 파시치 지원은 1885년 밀란 1세가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밀란 1세는 티모크 반란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사면했지만, 불가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파시치는 사면해주지 않았다. 1889년 밀란 1세는 자유주의자들의 헌법 개정과 부부 불화로 그의 12살 아들 알렉산다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며칠 후 새로 구성된 급진당 내각의 사바 그루지치(Sava Grujić)는 파시치를 사면했다.

2.3. 고위정치기

2.3.1. 첫 총리 임기

1889년 10월 13일, 파시치는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890년 1월 11일부터 1891년 1월 26일까지 베오그라드 시장으로도 선출되었다. 그가 의회를 주도하는 동안 세르비아 의회는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법률이 투표된 반면, 베오그라드 시장으로서 그는 진흙투성이의 가도를 정비하는 일[5]을 맡았다. 그는 이후 1893년 6월 13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의장으로 두 차례 더 선출되었고,[6] 1897년 7월 12일부터 1898년 6월 29일까지 또 다시 의장직에, 1897년 1월 22일부터 11월 25일까지는 베오그라드 시장직에 선출되었다.

세르비아로 돌아온 직후 정부 수반직을 받아들이지 않은 니콜라 파시치는 1891년 2월 23일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밀란 1세[7] 전 국왕은 1890년 5월 세르비아로 돌아왔고 다시 파시치와 급진당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한다. 1892년 6월 16일 섭정위원회[8]의 3명의 섭정 중 한 명이었던 코스타 프로티치가 사망하고, 헌법상 의회는 새로운 섭정을 선출해야 했기에 파시치는 긴급 회의를 소집한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섭정이었던 요반 리스티치는 파시치가 공동 섭정으로 선출되어 자신의 지위가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시 회의를 거부했고, 파시치는 1892년 8월 22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1892년 4월 2일부터 외무장관을, 1891년 11월 3일부터 재무장관 대행을 맡기도 했다.

2.3.2. 알렉산다르 1세의 쿠데타

1893년, 아직 16살이었지만 알렉산다르 1세는 자신을 성인이라 선언하고 섭정들을 해임했다. 그는 온건한 급진당원이었던 라자 도키치를 수반으로 정부를 구성했다. 몇몇 급진당원들은 파시치에게 정부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파시치는 거절했다. 파시치를 세르비아 정계에서 고립시키기 위해, 알렉산다르는 파시치를 러시아에 대사로 보냈다. 1894년, 알렉산다르는 그의 아버지를 세르비아로 다시 데려왔고, 밀란은 파시치의 헌법개혁을 막는다. 그러나, 1897년 이후, 밀란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게 되었으나, 둘 다 파시치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은 파시치의 과거 밀란 1세에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문을 근거로 그를 9개월 간 투옥시킨다.

2.3.3. 밀란 1세 암살 미수

사형선고를 받은 전직 소방관, 두라 크라예비치는 1899년 6월 밀란 1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같은 날 저녁, 밀란은 급진당이 암살의 배후라 선언했고, 막 출소한 파시치를 포함한 급진당의 지도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급진당과 파시치가 암살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었다. 그럼에도 밀란은 니콜라 파시치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친러파인 파시치가 처형되면 러시아가 세르비아에 개입할 것을 우려하여 특사를 파견해 파시치의 처형을 막았다.

수감 중이던 파시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간섭을 알지 못하였고, 급진당이 왕가에 불충했다고 진술했다. 정부는 파시치가 비겁하게 행동하고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도록 성명서를 발표했고, 파시치는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즉시 석방되었다. 이로 인해 파시치를 비겁한 배신자라고 생각한 젊은 당원들이 급진당 내에서 갈등을 일으켰고 당은 분열되었다. 이후 알렉산다르의 통치 기간 동안, 파시치는 정계를 은퇴했고, 한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2.4. 세르비아의 황금기

2.4.1. 5월 쿠데타

1903년 6월 10일 드라구틴 드미트리예비치[9]를 필두로 흑수단의 5월 쿠데타가 일어났다. 국왕 알렉산다르 1세와 왕비 드라가 마신은 물론 수상 디미트리예 신카르-마르코비치와 국방장관 밀로반 파블로비치도 살해당했다. 급진당은 쿠데타 이후 내각을 구성하지 않았지만, 1903년 10월 4일 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들은 그 후 15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처음에 급진당은 새로운 왕인 페타르 1세의 즉위을 불법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후 파시치는 서유럽에서 교육받은 페타르 1세가 과거의 두 전제적인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군주들과 달리 입헌적이고 온화한 통치자인 것을 보고는 입장을 바꾼다.

니콜라 파시치는 1904년 2월 8일 사바 그루지치 내각에서 외무장관이 되었고 1904년 12월 10일부터 1905년 5월 28일까지 그의 주도 아래 정부를 이끌었으며 외무장관도 계속 역임했다. 그 후 10년 동안 파시치와 급진당의 지도 아래 세르비아는 매우 번영하여 많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세르비아의 현대 황금기(the modern golden age of Serbia)라고 부른다. 세르비아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했고 재정적, 경제적 성장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도 커지게 되는데, 이는 당시 패권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한다.

2.4.2. 관세전쟁

20세기 초,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은 돼지고기였으며, 주요 고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안보적으로도 오브레노비치 왕조 시절에는 러시아 제국이 발칸 내에서의 파트너로 불가리아를 선택했기에 세르비아는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급진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르비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줄이기 위한 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존 세르비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유하고 있는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 지역을 해방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담론이 당대 세르비아 여론을 휘어잡은 것도 급진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06년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닌 프랑스의 차관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다른 방향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관세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소금에서 대포까지 모든 것을 오스트리아 회사들로부터 수입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파시치는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개인적으로 그렇게 할 것이지만, 의회는 이에 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처음에는 국경을 폐쇄하여 세르비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파시치가 1903년 쿠데타의 공모자들을 영국과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은퇴시키고, 프랑스로부터 대포를 사들이는 등, 서유럽 국가들로 무역상대를 빠르게 교체함에 따라 세르비아의 경제는 원래보다 훨씬 더 발전하게 되었다. 관세전쟁 와중에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합병하면서 세르비아 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었지만, 파시치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정시켰다.

2.4.3. 발칸전쟁

파시치는 두 개의 내각(1909년 10월 24일 ~ 1912년 9월 12일)을 이끌었고, 발칸 동맹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후 발칸동맹(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과 발칸전쟁을 일으킨다. 세르비아는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의 고토로 여겨지던 코소보, 메토히야, 북마케도니아 등을 5세기 만에 되찾았고, 이를 통해 세르비아의 영토는 기존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군부와 마찰을 빚기도 한다.[10]

2.4.4. 개전

2.5. 대전쟁과 남슬라브주의


[1] 파시치는 영토 회복주의 신문 '나로드노 오슬로보데네(민족해방)'의 통신원으로서 세르비아 민족투쟁의 최전선에서 그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2] 당시 세르비아 국왕[3] 이 당시 세르비아 인구의 대부분은 소규모 자작농이었고, 그들은 농민 민병대 체제를 지지했다.[4] 급진당은 정규군의 유지로 인한 재정부담 등을 이유로 정규군보다는 민병대 체제를 지지했고, 반란에서도 민병대를 지지하였다.[5] 조약돌로 거리를 포장하는 일[6] 1893년 9월 이후부터는 명목상 의장직이었고, 실제 의장직은 그의 대리인 이었던 디미트리예 카티치(Dimitrije Katić)가 수행하였다.[7] 퇴위 후 프랑스로 망명 중이었다.[8]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미성년인 알렉산다르 1세가 재위하고 있었고, 요반 리스티치의 주도로 섭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9] 일명 아피스[10] 왕립육군은 신규 영토를 군정 하에 두려 했던 반면, 파시치는 민주선거를 통해 세르비아에 정치적, 행정적으로 편입시키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