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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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 귀도 그라톤 Guido Gratton | |
| 출생 | 1932년 9월 23일 | |
| 이탈리아 왕국 몬팔코네 | ||
| 사망 | 1996년 11월 26일 (향년 64세) | |
| 이탈리아 피렌체 광역시 바뇨아리폴리 | ||
| 국적 | | |
| 신체 | 키 미상|체중 미상 |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 |
| 소속 | <colbgcolor=#eee> 선수 | 파르마 AS (1949~1950) 비첸차 칼초 (1950~1952) 칼초 코모 (1952~1953) ACF 피오렌티나 (1953~1960) SSC 나폴리 (1960~1961) 인테르나치오날레 (1961) SS 라치오 (1961~1962) |
| 감독 | US 살레르니타나 (1969~1970) 파가네세 (1970) | |
| 국가대표 | 11경기 3골 (이탈리아 / 1953~1959) | |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피오렌티나에서 7년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피오렌티나의 1955-56 시즌 세리에 A 우승 멤버로서 줄리뉴, 주세페 비르질리, 미겔 몬투오리와 함께 강력한 공격진을 이루었다. 1957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기도 했다. 1954년 FIFA 월드컵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가했으며, 국가대표 경기에서 11경기 3골을 기록했다. 1996년 자신이 운영하던 테니스 클럽에서 강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2. 선수 경력
2.1. 클럽
1932년 9월 23일 이탈리아 왕국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 몬팔코네에서 태어난 그라톤은 파르마 AS와 비첸차 칼초를 거쳐 1952년 칼초 코모에서 세리에 A 데뷔를 했다. 1952-53 시즌 30경기 3골을 기록하며 주목받았다.1953년에 그라톤은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감독의 부름을 받아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피오렌티나에서 그라톤은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으며, 줄리뉴, 주세페 비르질리, 미겔 몬투오리와 함께 강력한 공격진을 형성했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수비와 공격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뛰어난 체력과 투지로 팀의 중추 역할을 했다.
1955-56 시즌에는 피오렌티나의 첫 번째 세리에 A 우승을 견인했다. 피오렌티나는 이 시즌 28승 8무 2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그라톤은 시즌 내내 안정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듬해인 1957년에는 코파 그라스호퍼스를 우승했고, 유러피언컵에서는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0-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958년과 1959-60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피오렌티나에서 7년간 193경기 28골을 기록하며 클럽의 전설적인 선수로 남았다.
1960년 나폴리로 이적해 17경기 1골을 기록했다. 이후 1961년 인테르로 이적했지만 인터토토컵에서 1경기만 출전하는 데 그쳤고, 같은 해 11월 라치오로 임대되어 세리에 B에서 5경기 1골을 기록했다. 1962년 토스카나의 임프루네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국가대표
1953년 11월 13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1954년 월드컵 예선전 이집트전에서 국가대표 데뷔를 했다. 이탈리아가 5-1로 승리한 이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지만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다. 1956년에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957년에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했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총 11경기에 출전해 3골을 기록했다.
3. 은퇴 후
현역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69-70 시즌 살레르니타나의 감독을 맡았고, 1970년에는 파가네세를 지휘했다. 이후 폴리뇨 칼초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지도자 생활을 마친 후에는 바뇨 아 리폴리에서 작은 테니스 클럽을 운영했다. 1996년 11월 26일, 자신이 운영하던 테니스 클럽에서 강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범인들은 클럽의 수익금을 노리고 침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은 이탈리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장례식에는 5천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석했다. 장례식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치러졌으며, 피오렌티나는 다음 경기에서 검은 완장을 차고 묵념을 올렸다.
4. 플레이 스타일
그라톤은 중앙 미드필더로서 뛰어난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경기 내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수비와 공격을 연결하는 박스투박스 미드필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공격진에게 정확한 패스를 공급하는 능력이 뛰어났다.피지컬이 강했지만 기술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중거리 슈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피오렌티나에서는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공격적인 중앙 미드필더로서 현대 축구의 박스투박스 미드필더 역할을 선구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