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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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 미겔 몬투오리 Miguel Montuori | |
| 본명 | 미겔 앙헬 몬투오리 Miguel Ángel Montuori | |
| 출생 | 1930년 9월 24일 | |
|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 ||
| 사망 | 1998년 6월 4일 (향년 67세) | |
| 이탈리아 피렌체 | ||
| 국적 | | | |
| 신체 | 키 미상|체중 미상 | |
| 직업 |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 |
| 소속 | <colbgcolor=#eee> 선수 |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53~1955) ACF 피오렌티나 (1955~1961) |
| 국가대표 | 12경기 2골 (이탈리아 / 1956~1960) | |
1. 개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현역 시절 센터포워드로 활약하며 피오렌티나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피오렌티나의 1955-56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이며, 1957 유러피언컵 결승전에도 출전했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최초로 주장 완장을 찬 귀화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세리에 A에서만 162경기 72골을 기록했으며, 뛰어난 골 감각과 기술력으로 1950년대 이탈리아 축구계를 대표하는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 선수 경력
2.1. 클럽
미겔 몬투오리는 1930년 9월 2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나폴리 출신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르헨티나에서 라싱 클루브에 입단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해 칠레로 이주했다. 산티아고의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에서 활약하며 1954년 칠레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6경기에서 24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득점력을 과시했다.1955년 ACF 피오렌티나 회장 엔리코 베파니가 칠레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신부 볼피의 추천을 받아 몬투오리를 영입했다. 그렇게 몬투오리가 피렌체에 도착한 첫 해인 1955-56 시즌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으며, 몬투오리는 32경기에서 13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피오렌티나는 4년 연속 세리에 A 준우승을 차지했다. 몬투오리는 1956-57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7경기 1골을 기록하며 팀의 결승 진출을 도왔지만, 1957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0-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몬투오리는 피오렌티나에서 뛰어난 활약을 지속했다. 1957년 코파 그라스호퍼스 우승, 1960-61 컵위너스컵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등 여러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1958년과 1959-60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는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1961년 봄 페루자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공에 맞아 망막 박리 부상을 당하며 시야 장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28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해야 했다. 피오렌티나에서만 총 162경기 72골을 기록했으며, 모든 대회를 합치면 184경기 79골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2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이자, 최초로 주장 완장을 찬 귀화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1959년 2월 28일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찼으며, 1960년 1월 6일 스위스와의 국제축구연맹컵 경기에서도 주장을 맡아 결승골을 넣으며 3-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는 그의 국가대표팀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다.
3. 은퇴 후
현역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이탈리아와 칠레에서 여러 팀을 지도했으며, 1971년 칠레로 돌아가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1988년 이탈리아로 완전히 돌아와 피렌체 시립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이솔로토와 빈고네 등 피렌체 지역의 작은 축구팀에서 유소년들을 지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