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3 10:08:04

권용두

파일:권용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필명 권용도(權容道)
자 / 호 성민(聖玟) / 남곡(南谷)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914년 6월 15일[2]
충청남도 대전군 산내면 무수리
(현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3][4]
사망 1992년 3월 30일 (향년 77세)
대전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6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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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14년 6월 15일 충청남도 대전군 산내면 무수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의 7대 종손인 아버지 권경채(權景采)와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보성 오씨 오연익(吳淵益)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그의 집안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로, 8대조 유회당 권이진이 1707년(숙종 33)경 본가가 있던 충청도 공주목 천내면 탄방리(현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6]로부터 분가하여 공주목 산내면 수철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 입향한 이후로 그 후손들이 무수동에 세거하면서 종중(宗中)을 이루었다.

한편, 8대조 권이진은 1693년(숙종 19) 생원시에 입격하여 이듬해인 1694년(숙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정2품 호조판서에 올랐고, 5대조 권상희(權尙熺)는 음서로 종4품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올랐으며, 조부 권영수(權永秀)는 1844년(헌종 10) 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호조 참판에 오르는 등 관직에 진출하였다. 다른 직계 조상들은 비록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증조부 권용전(權用銓)이 1822년(순조 22)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부친인 권경채가 1885년(고종 22) 진사시에 입격하는 등 학문적 재능을 지녔으며, 7대조 권형징(權泂徵)과 6대조 권세억(權世檍), 고조부 권감(權堪) 등은 정5품 통덕랑(通德郞)의 품관으로 향리에서 활동하며 종중을 이끌었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7세부터 한문을 수학, 『소학』·『통감절요』 등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무수동에서 세운 문흥강습소(文興講習所)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후 대전제일보통학교(현 대전삼성초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고,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5년에는 대전제일보통학교의 교사였던 권경득(權庚得)[7]의 주도하에 <보아라 소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전제일보통학교 6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 6월 6.10 만세 운동에 참가, 동급생들과 함께 손수 만든 태극기를 들고 대전역까지 만세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이후 대전읍 대흥정(현 중구 대흥동)으로 이주했다. 1929년 4월 대전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한국인 학생조직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여 일본인 학생에게는 아부를 하면서 한국인 상급생에게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는 한국인 2학년생들의 멸시태도를 제재하려고 구타를 가하여 징계를 당하였다.

대전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31년 1월에는 비밀결사인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의 소년부 학생반에 가입하여 일제 식민통치를 규탄하고 고향 무수동에 농민야학원을 개설하여 민족정신 고취 및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전군제제사공장(大田郡是製絲工場)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학생반을 동원하여 수 천매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제사공장의 파업은 그 해 12월말까지 1개월여 계속되었으며, 이 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인은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전중학교에서 퇴학조치를 당함과 동시에 그해 11월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전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이때 나카무라(中村)라는 일본인 고등계 주임에게 심한 고문을 당했다.

또 12월 8일 전주경찰서로 이송되어 전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고문으로 인하여 왼쪽 귀의 고막이 터졌으며, 이후로 영구적인 청각상실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노무라(野村)로부터의 고문 때문에 건성늑막염을 얻게 되어 상당 기간 결핵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요양생활을 지속하면서도 1940년부터 대전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보문산·식장산·서대산·대둔산·천호산·계룡산 등의 산천을 두루 살피면서 조국 광복과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제를 수차례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가을부터 식장산에서 지헌영·김영철·조보살·조태호 등과 함께 <조국광복 혈서 발원제(發願祭)>를 거행하는 것을 필두로, 1942년 10월 30일 보문산 시루봉에서 <일본함대격침 기원제(祈願祭)>를, 1945년 7월 15일에는 지헌영·김형철·조보살·오요한·조태호 등과 함께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과 중구 구완동 사이로 가는 보문산 줄기의 돌고개 위에서 <조국광복 예축제(豫祝祭)>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 곳 이사동에는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용두는 이를 안중에 두지 않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하여 게양하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 하여 이 행사를 감행했다. 또한 1945년 8월 7일 조보살·오요한·조태호·박광상 등과 더불어 중구 옥계동의 동구나무가 서있던 북쪽의 통묘에서 <일본제국의 타도제(打倒祭)>를 거행한 바도 있다.

8.15 광복 후에는 자진하여 '반공청년단'에 입단하여, 반공청년단 충남지부의 학술부장 겸 문화부장을 지내면서『새로운 세계관』을 간행하였으며, 이때 충청남도 일대를 순회·강연하면서 반공이념의 확대와 강화에 힘썼고, 해방 후에도 조국 통일을 기원하는 제사를 계속했다.

또 교육계에 투신하여 1947년에서 1950년 6월에 이르기까지 호서민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철학을 강의하였고, 1950년 9월부터 1958년 12월까지는 호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역사와 한문을 가르쳤다. 또한 유림회(儒林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효도교육에 진력한 바도 있었으며, 1985년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교육계에서 물러난 1958년 12월 이후에는 『호서신문(湖西新聞)』과 『중도일보(中都日報)』등 지방 언론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1992년 3월 30일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같은 해 4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2014년 5월 24일, 그를 기리기 위해 대전고등학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

[1] 추밀공파 만회공파 34세 용(容) 항렬. 족보명은 권용경(權容敬).출처.[2] 안동 권씨 대동세보에는 1912년 5월 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목달동·정생동과 함께 안동 권씨(安東 權氏) 추밀공파(樞密公派) 유(惟)2계 집성촌이다.[4] 출생지인 299번지에는 안동 권씨 유회당종가가 있다.[5] 아버지의 첫째 부인인 청송 심씨 심재승(沈在昇)의 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며, 셋째 부인 여흥 민씨와의 사이에 이복 형 권용설(權容卨)과 누이 하나를 두었다. 권용두의 생모 보성 오씨는 8대 종손인 형 권용한(權容漢)과 누이 하나를 두었다.[6] 현재도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7]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에 교원촉탁으로 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