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관현악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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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KNSO | |
정식 명칭 | 재단법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
영문 명칭 | Korean National Symphony Orchestra |
국가 | 대한민국 |
설립일 | 1985년 3월 30일 (사단법인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2001년 2월 1일 (재단법인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
2022년 3월 17일 (재단법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 |
대표자 | 최정숙 |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 다비트 라일란트 |
주무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
주요 주주 | 해당사항 없음 |
기업 분류 | 공직유관단체 |
미션 | 음악으로 국민 모두가 행복한 사회 조성 |
비전 | 장르와 계층을 넘어 소통하는 국민 대표 오케스트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예술의전당) |
관련 웹사이트 | |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공식 홈페이지 | |
관련 전화번호 | |
대표전화: 02-523-6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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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를 거점으로 하는 국립 교향악단2. 연혁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시절의 로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Korean Symphony Orchestra, 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1985년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출신 홍연택이 전직 국립교향악단 단원 등 여러 음악인들을 모아 창단한 국내 최초 순수 민간 교향악단이었다. 창단 당시 43명의 단원으로 출발했다. 1985년 3월 창단 연주회를 겸한 첫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당시 시나 도 등 지방자치단체에 속하지 않은 민간 교향악단은 사실상 코리안심포니가 유일했다. 순수 민간 교향악단이었기 때문에 첫 출발은 매우 열악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정기연주회도 그리 자주 열리지 못했지만 이후 연 평균 6~9회 가량의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정기연주회 이외에 청소년 음악회, 발레나 오페라, 합창곡 반주 등을 가급적 많이 소화하면서 재정적인 문제를 만회하려 했다. 특히 1987년부터 국립극장 전속 오케스트라로 계약 맺어 국립극장 산하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국립현대무용단 공연의 반주 단체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국립극장에 상주하게 되며 악단 운영의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이후 민간 오페라 반주 참여도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사실상 발레,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던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 코리안심포니가 참여하던 발레, 오페라 공연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코리안 심포니는 창단 5년이 가까워지도록 재정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1989년 초 쌍용그룹이 이 악단에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약속하면서 코리안 심포니는 일대 전화기를 맡게 되었다. 창단 4년째인 코리안 심포니는 여전히 재정난으로 골골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같은 시기 쌍용그룹의 야심찬 젊은 회장 김석원이 그룹 창사 50주년을 기념할 사업으로 오케스트라 창단을 고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알아보니 오케스트라 창단, 운용 비용이 어마어마했고, 이에 그룹 실무진들은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대신 기존 오케스트라를 지원하며 그룹을 홍보하자는 쪽으로 김석원 회장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룹 실무진들이 이에 적합하다고 찾아낸 악단인 민간 교향악단을 대표하던 코리안 심포니였다.
이에 쌍용그룹과 코리안 심포니가 컨텍하게 되었고, 홍연택은 쌍용에게 연 3억씩 3년간 9억원을 지원해주면 악단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제시했고, 쌍용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지원이 결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9년 코리안 심포니는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전환도 승인되었다.
1989년부터 쌍용그룹 협력업체와 고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한 「사은음악회」를 열었으며, 1989년 연말부터는 쌍용그룹 송년음악회도 매년 열렸다. 1989년 여름부터는 쌍용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용평리조트에서 개최하는 용평뮤직캠프페스티벌의 상주 악단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쌍용그룹이 한국의 아스펜 페스티벌을 표방하며 젊은 음악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용평뮤직캠프는 코리안 심포니의 재정에도 특히 도움이 되었다. 코리안 심포니는 매년 용평뮤직캠프 주관 단체로 참여하면서 여기서만 연 2~3억원 이상의 수익과 후원을 얻었다. 또 계열사 쌍용정유의 후원으로 「젊음과꿈이 있는 사랑의 음악여행」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방중소도시를 순회하는 음악회를 열어 지방 음악애호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1989년부터 예술의 전당 기획의 한국 관현악단 연속 연주회 시리즈인 교향악축제에 민간 악단으로는 유일하게 거의 매년 출연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에 잠실실내체육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과 함께 안익태의 한국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공연해 화제가 되었고, 이 5000명 합창 음악회는 이듬해 10월에도 개최되었다. 5000명 합창 음악회 역시 쌍용그룹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쌍용그룹의 직접 지원액 3억원은 코리안 심포니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조건 없는 무상 지원이었다. 1995년 재계약 이후에는 연 4억원으로 증가했다. 1996년에는 5억5천만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코리안 심포니가 용평뮤직캠프에 참여하면서 매년 2~3억원을 별도 지원받았고 그 외에도 각종 쌍용그룹 행사 관련 음악회에 참여하면서 추가로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쌍용그룹이 재정난에 처하며 2억원을 지원한 것을 끝으로 쌍용그룹은 코리안 심포니 지원 중단을 선언했고 얼마 후 쌍용그룹은 해체되었다.
코리안 심포니는 쌍용그룹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대부분 별도의 연주회비를 받았고 이것 또한 코리안 심포니의 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쌍용그룹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한 코리안 심포니는 90년대에 들어 쌍용그룹과의 협력 이외에도 찬송가 전집 녹음 등 여러 음반 제작에 참여하는 등 여러 경로로 재정을 확충했고, 또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이 결실을 맺은 1990년대 한국 클래식 공연이 붐을 이루며 오페라, 발레 반주 공연수가 크게 증가했다. 1993년에는 악단 관악기 주자들이 결성한 목관 5중주단과 금관 5중주단을 필두로 한 실내악 공연도 시작되었다.
특히 1996년 쌍용그룹 지원액이 5억5천만으로 증가하자 홍연택은 늘어난 1억5천만으로 카를로 팔레스키를 수석 객원지휘자로 영입했고, 모스크바국립교향악단 등에서 부악장과 호른 수석 등을 영입했다.[1] 1997년 IMF 직전 코리안 심포니는 단원수가 83명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쌍용그룹과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어서 지원 중단설이 여러차례 돌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쌍용그룹이 쌍용자동차의 누적 적자 심화로 휘청이기 시작하면서 쌍용과 코리안 심포니의 관계도 삐걱대기 시작했다. 1995년말 재계약이 3차례나 연장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쌍용그룹과 코리안 심포니 모두 서로를 원했기에 진통 끝에 재계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국 1997년 쌍용그룹이 외환위기로 해체 수순을 밟는 바람에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쌍용그룹의 공중분해로 재정난에 처하며 창단 이래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고, 해단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단원들은 연주회가 있을 때만 수당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실제로 몇몇 단원이 사표를 내고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정명훈을 필두로 한 국내 유명 음악인들이 무상으로 악단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에 출연하는 등의 노력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0년 5월 31일 코리안 심포니는 예술의 전당과 협의해 전당 측 기획 공연에 정규 출연하는 대가로 상주단체 자격을 따내어 운영비와 출연비를 지원받게 되며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예술의 전당은 국내를 대표하는 공연장이었지만 상주 오케스트라가 없어 공연의 질적 수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심지어 국정감사에서도 이러한 지적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예술의 전당은 상주 오케스트라 창단을 추진했지만 역시나 돈이 문제였는데, 정부는 이에 대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다. 때문에 예술의 전당 측은 상설 오케스트라가 창단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당 기획 공연을 전담할 오케스트라를 찾았고, 코리안 심포니와 상주계약을 맺기로 한 것이었다. 이로써 해체 위기를 겪던 코리안 심포니는 안정화되었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내에 사무실도 마련하였다. 현재는 예술의 전당 내 오페라 하우스 4층에 위치하고 있다.
2001년 초까지 예술의 전당으로 완전 이전 입주를 마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2001년 3월 문화관광부의 인가를 받아 재단법인화 되며 예술의 전당 상주 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발했다. 초대 이사장과 단장에 각각 작곡가 이영조와 이운환이 부임했다. 같은 해 창단자였던 홍연택이 타계하면서 상임 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이후 몇 년 동안 객원 지휘에 의존해야 했다.
2004년 예술의전당은 문화관광부와 협의 하에 코리안 심포니와의 협력을 강화하여, 예술의 전당 상주 단체로서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기로 했다고 밝혔고, 이에 예술의 전당 김용배 사장이 코리안 심포니 이사장을 겸직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2003년부터 이사장을 맡아오던 김민이 퇴임했다. 예술의 전당과의 협력관계 강화에 따라 이듬해인 2005년부터 '11시 콘서트', '심포닉 시리즈' 등 예술의 전당 기획 프로그램의 연주를 맡게 되었다.
2006년 박태영이 단기 계약을 통해 전임지휘자로 악단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박은성이 3대 음악감독 겸 2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했다. 2010년에는 창단 25주년 기념으로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해외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0년 박은성이 퇴임하였고, 이듬해 최희준이 자리를 이어받아 2014년 1월 28일까지 재임했고, 후임으로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장기 재임했던 임헌정이 2017년 1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인천시향의 상임지휘자 정치용이 2017년 9월에 선임되었다. 2022년 1월에 프랑스 메츠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인 다비트 라일란트가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21년 6월부터 코리안 심포니는 “코리안심포니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립예술단체로의 역할 수행이란 의미를 내포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내걸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KBS교향악단 측이 '국립' 명칭 사용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22년 3월 22일자로 오케스트라 명칭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 변경하였다.
3. 임원
3.1. 이사장
- 전봉초 (1989~)
- 이세중 (1995~)
- 이영조 (2001~)
- 김민 (2003~)
- 김용배 (2005~)
- 신현택 (2007~2008)
- 신홍순 (2008)
- 김장실 (2009)
- 김희근 (2010~)
- 승명호
- 김일호 (2023~현재)
3.2. 대표이사
- 이원철 (2015~2018)
- 박선희 (2019~2022)
- 최정숙 (2022~현재)
3.3. 상임지휘자
- 홍연택 (1985~2001)[음악감독]
- 박태영 (2006)[전임]
- 박은성 (2007~2010)[음악감독]
- 최희준 (2011~2014)[예술감독]
- 임헌정 (2014~2017)[예술감독]
- 정치용 (2017~2019)[예술감독]
- 다비드 라일란트 David Reiland (2022~현재)[예술감독]
박태영 전임지휘자 당시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이 음악감독을 맡았었다.(2003~2007)
4. 특징
한국에서 활동하는 국내 최초의 민간 교향악단으로 명성을 날렸다. 관립 오케스트라인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향 다음 가는 위상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성장했으며 대한민국에서 민간 교향악단의 지존으로 군림해 온 악단이다. 민간 단체로서 재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악단 자체 기획의 정기 연주회 같은 공연보다 오페라나 발레 등 무대 작품의 반주나 국내외 유명 성악가들의 가곡의 밤 혹은 리사이틀 무대 같은 외부 공연을 훤씬 더 많이 개최했었다. 코리안 심포니 역시 자신들을 발레,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로 홍보하곤 했다.코리안심포니는 3월 2일 문화체육관광부(당시 장관 황희)는 코리안심포니의 명칭을 변경하는 내용의 정관 변경을 승인했다. 그 이전인 2월 25일 코리안심포니 이사회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의 명칭 변경을 담은 정관 변경을 의결했다. 변경된 명칭은 3월 22일 정기연주회부터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국립’으로의 명칭 변경은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나, 본격적인 논의 및 절차는 지난해 6월부터 진행해왔다. 코리안심포니는 음악계 원로, 클래식 음악 관련 단체, 학계, 언론, 유관 국립단체 등으로 구성된 외부 전문가 40명의 의견을 총 2차에 걸쳐 수렴하고, 단체 내부 의견 역시 2차에 걸쳐 정리했다. 그 결과, 코리안심포니의 음악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립예술단체로의 역할 수행이란 의미를 내포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의 명칭 변경을 추진, 확정했다.
문체부 산하 예술단체인 코리안심포니는 2001년부터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과 함께 예술의전당 상주단체 및 국립예술단체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코리안심포니는 1985년에 창단된 이래 관현악은 물론 발레, 오페라를 아우르는 국내 유일의 극장오케스트라로 자리했다. 초대 음악감독 홍연택으로부터 7대 예술감독 다비트 라일란트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2017년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음반(레이블 데카)을 발매, 브루크너 협회로부터 ‘올해의 음반상(2017)’을 수상하며 한국 클래식의 위상을 높였다. 연 100회 공연으로 국민 문화 향유에 앞장섰고 영화, 게임, 온라인 공연 등 장르를 넘나들며 클래식 저변 확대를 꾀했다. 뉴미디어 시대에 맞춰 국내 오케스트라 중 첫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진출과 4K영상과 3차원 다면 입체 음향 녹음을 기반으로 한 고품질 아카이빙을 통해 새로운 감상 문화를 선도했다.
무엇보다 연주 중심의 예술단체에서 나아가 한국 클래식 음악 생태계의 상생 강화를 모색한 역할의 확대가 국립으로의 명칭 변경을 견인했다. 창단 초기의 음악캠프부터 오늘의 국제지휘콩쿠르에 이르기까지 ▲ 젊은 음악가 발굴, ▲ 오케스트라 단원 육성, ▲ 작곡가 양성, ▲ 지휘자 등용에 힘쓴 결과 미래세대를 위한 성장 플랫폼이란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이는 음악계의 총체적인 발전의 토대로서 코리안심포니의 국립으로의 위상 강화는 지속적인 한국 음악계의 성장 원동력이자 전 세계의 신한류 흐름 속 K-클래식의 산실로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1]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재정난으로 러시아 유수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단원들이 서방으로 많이 빠져나갔다. 당시 우리나라 교향악단도 고려인 후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명문 악단 단원들을 영입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KBS 교향악단의 경우 러시아 키로프 오케스트라 트럼펫 수석인 고려인 3세 바실리 강, 그리고 벨라루스 출신의 알렉산더 아키모프 등을 영입했다. 코리안 심포니 역시 1996년 쌍용그룹의 지원금 증액으로 모스크바국립교항악단의 고려인 2세 빅토르 천을 부악장으로 영입했다.[음악감독] 음악감독 겸임[전임] 전임지휘자[음악감독] 음악감독 겸임[예술감독] 예술감독 겸임[예술감독] 예술감독 겸임[예술감독] 예술감독 겸임[예술감독] 예술감독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