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4:20:39

고창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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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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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qut
Uyghur Kingdom of Qocho

高昌回鹘
Karahoca Uygur Krallığ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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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843년 위구르 칸국 피난민에 의해 건국
1132년 카라 키타이에 종속
1209년 몽골 제국에 종속
14세기 중엽 차가타이 칸국에 흡수
국교 마니교, 불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
언어 중세 위구르어, 소그드어
수도 고창(카라호자)
베쉬발릭 (혹서기용 수도)
민족 토하라인, 소그드인, 위구르 유목민
→ 중세 위구르인
성립 이전 위구르 칸국, 토번 제국
멸망 이후 차가타이 칸국

1. 개요2. 성립과 발전3. 멸망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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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래 몽골 지역에 있던 위구르 제국키르기스인들에게 멸망한 뒤 흩어진 위구르족의 한 갈래가 지금의 투르판천산 산맥 방면에 세운 나라이다. 수도는 투르판 분지에 위치한 고창. 투르판 분지가 여름에는 기온이 지나치게 더워지는 이유로 혹서기에는 베쉬발릭이 수도 역할을 했다.[1]

서주회골(西州回鹘), 천산회골(天山回鹘), 북정회골(北廷回鹘) 또는 천산 위구르, 코초 위구르, 투르판 위구르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와 통치자를 이디쿠트란 이름으로 불렀다.

2. 성립과 발전

840년, 키르기스가 위구르 제국의 수도 오르두 발리크를 무너뜨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그 잔존세력 중 하나가 원래 살던 몽골 고원에서 서진하여 투르판 분지와 천산산맥에 나라를 건국했다. 876년에는 둔황의 한족 군벌 정권으로부터 하미(쿠물)을 점령하여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한편 무역 수입을 증대시켰다.

고창회골은 실크로드를 통해 얻는 무역 수입과 대 중국 방면으로의 면직물 수출을 기반으로 하여 국력을 끌어 올렸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자 주변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종교는 마니교를 대체적으로 신봉했다. 때문에 마니교가 원활하게 퍼지도록 이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2]

920년대부터는 서쪽에 이웃한 이슬람을 믿는 카라한 칸국과 잦은 전쟁을 벌였다. 카를룩의 후예인 카라한 칸국 역시 원래는 비무슬림 유목 제국으로 시작했으나 사투크 부그라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카라한 칸국 세력을 통일함으로서 무슬림 국가가 되었다. 고창회골이 카라한 칸국의 동진을 막아내면서 타림 분지 동부에는 마니교가 14세기까지 계속 융성할 수 있었다.

3.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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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 탑 유적

1132년, 요나라 황족 출신 야율대석북요를 수립했다가 곧바로 멸망하자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 세력을 펼친 끝에 서요를 건국했다. 야율대석은 고창회골의 왕 빌게에게 선대의 위구르족과 거란족은 우호관계였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카라한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빌게는 야율대석에 직접 찾아가 토산물을 바치고 길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비교적 강대국인 서요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비록 예속되는 신세가 되었지만, 국가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오르자 1209년, 고창회골은 몽골제국에 복속되었다.[3] 완전한 멸망은 1368년, 고창회골이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한 기년까지 포함시킨다.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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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교 벽화 유적

10세기 중반 송나라 사절이 남긴 기록 및 왕연덕의 서역사정기(西域使程記)와 왕연덕사고창기(王延德使高昌記)를 통해 고창회골의 문화만큼은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4] 고창회골은 남으로 토번, 서쪽으로 카를룩 동으로는 감주회골을 흡수한 서하와 마주하고 있다.

고창회골 주민은 몽골 고원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인 외에도 토하라인튀르크인,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소그드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노수호한족 상인들도 있었다. 고창회골의 주요 도시에서는 여러 언어가 통용되었으며, 평범한 노예조차 계약서를 직접 읽고 쓸 수 있을 만큼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았다. 몽골 제국 시대 위구르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중세 고창회골 도회지 주민의 상당수가 다중언어사용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주로 마니교, 불교가 융성하였으나 토하라인이 믿던 부파 불교는 마니교와 대승 불교에 밀려 교세가 위축된 끝에 사멸한 것으로 보인다. 마니교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채식을 장려하였으나 중국 기록을 보면 정작 주민 상당수가 고기를 즐겨 먹었던 듯하다.[5] 기독교 역시 번성했는데 당시 이슬람을 믿는 카라한 칸국과 마니교를 믿는 고창회골 양국 모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가 많았다고 전한다. 당시 카라한 칸국에서는 불교와 마니교 신자가 드물고 고창회골에서는 무슬림이 드물었으나, 기독교는 이슬람 및 마니교와 근연 관계였기 때문에 양국에서 동시에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 비슷하게 원나라 역시 여름 수도인 상도와 겨울 수도인 대도로 분리되어 있었다.[2] 이희수가 쓴 터키사엔 불교가 성행하고 오히려 마니교가 비호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위구르족의 후손인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3] 비록 고창회골은 몽골제국에 복속되었지만, 이들 위구르족은 몽골제국이 관료 조직이 정비된 국가를 건설하는데에 부분적 역할을 맡았다.[4] 두 사서는 위구르 문화사를 연구하는데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5] 유목생활을 하던 곳이었으니까 당연하다. 저 지역에서 채식만 하다간 굶어 죽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