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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29 침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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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몰2. 수색3. 노획품4. 훈훈한 마무리5. 왜 침몰했는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1. 침몰

파일:k-129.jpg

K-129 함의 승조원들

1968년 3월 8일 소련 해군골프급 전략 핵 미사일 탑재 디젤 잠수함 K-129가 하와이 북서쪽 1560여 마일 떨어진 해저에서 일으킨 폭발 사고. 문제는 이 지역은 원래 K-129 함의 작전 구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왜 그곳에 있었느냐는 의문이 수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미합중국 해군은 이를 감지하고 정밀 추적을 시작하여 1968년 4월 11일 K-129의 침몰을 확인하였다.

2. 수색

미 해군이 수색을 시작하기 전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가 수색 작전을 전개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에 따라 1968년 7월, 미 해군이 '샌드 달러 작전' 아래 본격적인 수색에 착수했다. 무려 3,100 평방km에 걸쳐 전개됐고 마침내 해저 3마일(4,800 m) 지점에서 K-129를 발견했다. 하지만 1968년은 린든 B. 존슨 미합중국 대통령의 재임 마지막 해였기 때문에 정권 교체에 따른 혼란을 막고자 이듬해인 1969년 1월 20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 취임 후 K-129 함에 핵미사일 3기가 장착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인양작업 추진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미 해군은 본격적인 인양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해저 3마일 지점[1]에 있는 무게 1,700톤의 잠수함을 어떻게 인양하느냐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태평양 해저에 유사한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는 가정을 내세워 괴짜 천재 부호 하워드 휴스에게 의뢰해 1만 7천 피트(5,182 m) 해저에서 최대 2천 톤까지 인양이 가능한 특수선박으로, 여객선으로 위장하기 위해 '휴스 글로머 익스플로러(HUGHES GLOMAR EXPLORER) 호라는 이름이 붙은 탐사선과 인양된 잔해를 소련 인공위성에 들키지 않고 보관 및 수송하기 위한 해저 광물 탐사선으로 위장된 거대 유개 바지선 Hughes Mining Barge를 건조했다. 당시 건조비용만 8억 달러였는데 오늘날 물가로 환산하면 3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1973년 9월 배가 진수되었고, 수심이 너무 깊어 기존 장비론 인양이 불가능했기에 새 인양장비를 제작해 1974년 5월 배를 완성했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4년 6월 7일 인양작전 개시를 승인해 1974년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닉슨 대통령의 소련 방문 동안 닉슨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돌아올 때까지 작전이 유보되었다가 닉슨 대통령이 돌아온 다음날이자 독립기념일인 1974년 7월 4일에 인양작업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배를 건조할 때처럼 인양작업을 위해 출항할 때도 소련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해저광물 탐사로 목적을 위장했다. 따라서 실제 암호명 PROJECT AZORIAN이 아닌 광물탐사 당시 위장암호였던 PROJECT JENNIFER로 알려졌다. 인양작전이 시작되자 KGB 혹은 소련 해군의 정보수집함으로 의심되는 소련 상선이 바로 옆에서 밀착 감시했고 인양작업이 한창이던 1974년 7월 18일에는 소련 선박에서 이선한 헬리콥터가 글로머 익스플로러 호에 착선을 시도해 CIA 요원들이 이를 막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었다.

8월 1일 마침내 5천m 해저에서 잠수함을 수면으로 부상시키는데 성공했고 8일에 걸쳐 잠수함을 수면에서 배 위로 끌어올렸다. 1974년 8월 8일 휴즈 글로머 익스플로러 호는 소련 잠수함 인양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양 도중 잠수함 선체의 2/3가 부러져 그 부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잠수함을 끌어올리던 강철 지지대 중 일부에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바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사임을 발표한 바로 그 날이었다.

3. 노획품

미 해군은 인양된 잠수함 내부를 조사하면서 예상했던 핵 미사일 이외에도 어뢰 3발과 암호 생성기[2]를 얻었다. 물론 이 작전이 비밀 작전이라고는 했지만 스케일이 너무 커 다 알려져서 소련은 암호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의 통신 보안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 외에도 각종 스펙 조사 등 미 해군이 소련 해군에 대항할 전술을 짜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다만 최근에 제작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파이 옵스:첩보공작의 세계>에 따르면 인양과정 도중에 끌어올리던 집게발이 파손되면서 선체 상당부분이 유실되었고 핵 미사일은 거의 확실히 다시 가라앉았다고 한다. 당시 미 정부가 정확히 뭘 얻었는지는 아직도 기밀 사항이지만 2차 작전이 수립되었다가 LA타임즈의 폭로 보도[3]로 소련이 군함을 보내 주변 해역을 차단하면서 취소된 것과 작전에 참여했던 정보요원의 미처 검열당하지 않은 자서전 불어판에서 언급된 '선체와 미사일은 가라앉았다'라는 언급을 보면 기존 서술의 노획품을 다 얻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4. 훈훈한 마무리

잠수함을 인양한 뒤 선내 조사 도중 소련 해군 6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 사망자들에게 예우를 다하여 장례를 치러 줬고[4] 이 장면은 동영상으로 촬영되어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5. 왜 침몰했는가?

정확한 이유는 언급된 적이 없으나 소련에서는 '허용심도'를 초과해서 침몰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는 상부의 명령 없이 미국을 독단적으로 핵공격하러 하와이에 접근했다가 함내 온건파의 저지로 내란이 발생해 침몰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에드 해리스, 데이비드 듀코브니 주연의 2013년 영화 '팬텀: 라스트 커맨더'가 이 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6. 대중매체

  • 2010년에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아조리안'이 제작되었다.#
  • 위에 언급된 것처럼 2013년 영화 '팬텀: 라스트 커맨더'가 이 사건을 영화화했다. 하지만 영화 속 잠수함은 퇴역을 앞둔 구형 잠수함으로 묘사된다.
  • 미국의 해양 모험 소설가 클라이브 커슬러는 1970년대에 "타이타닉을 인양하라"라는 소설을 썼다. 미국의 전략미사일 방위계획에 꼭 필요한 '비자니움'이라는 광석이 소련 영토에서만 채굴되는 것이라 구할 길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타이타닉 호의 화물 중에 다량의 비자니움이 있더라는 설정으로 미국은 타이타닉을 인양하려고 하고 소련은 방해하는 해양 첩보전을 다뤘다. 사건 전개 자체는 소련 헬기가 미국 함선에 착함 시도를 하는 등 이 사건을 많이 참고했다. 영화화도 되었는데 결말에서는 인양에 성공하여 위에 고스트버스터즈 2의 엔딩처럼 타이타닉을 무사히 뉴욕 항에 입항시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해도 타이타닉이 쪼개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으니 가능했던 장면. 그리고 망했다.(...) 전체 영상

7. 관련 문서



[1] 소련은 5마일이라고 주장했다.[2] 흔히 암호 발신기라고 생각하는데 엄연히 암호를 생성하기만 하는 암호 생성기로서 발신기는 따로 있었다. 오늘날은 위성통신을 이용한 다중 보안 통신망을 사용한다.[3] 하워드 휴스를 얼굴마담으로 세운 CIA의 인양작전의 전말[4] 방사능 오염이 예상되어 시신은 관에 넣어 수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