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8:57:21

5.19 사건

파일:CHNHKG_19850519.png

1. 개요2. 배경3. 경기4. 경기 후 폭동5. 홍콩6. 이후7. 둘러보기

1. 개요

1985년 5월 19일, 중국 베이징 노동자 경기장에 열린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동아시아 1차예선에서 중국 대표팀이 홍콩 대표팀에게 수도 베이징에서 1-2로 패배하여 FIFA 월드컵 지역예선 1라운드에서 탈락한 사건. 중국에서도 五一九事件이라고 불리는 중국 축구 희대의 흑역사이며, 반대로 홍콩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도쿄 대첩에 맞먹는 최고의 경기이다.[1]

사실 중국(중공)은 70년대에도 홍콩과의 국대 경기에서 패한 적이 있기에 이 패배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덩샤오핑 집권 후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치로 내걸며 축구 발전에 사력을 기울였고, 약 5년간 삽질 후 1984 AFC 아시안컵 싱가포르에서 준우승을 거두었고, 이 결과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얻었다. 이 준우승은 80년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근자감을 심어주었다. 거기에다가 월드컵에서 아시아팀에게 주는 티켓도 한 장에서 두 장으로 늘어났기에 "아시안컵 준우승했네? 그럼 우리도 월드컵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김칫국을 마시면서 1986 월드컵 진출을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예선 1라운드에서 홍콩에게 패하자 중국인들이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고 결국 폭동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2. 배경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1978년 덩샤오핑이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젊은 시절 밥을 굶어가며 축구 경기를 보러갈 정도로 열성적인 축구광이었던 덩샤오핑은 정권을 잡자마자 축구굴기을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덩샤오핑 본인이 축구광이기도 했지만 축구의 전국적인 인기를 목격하고 중국이 축구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 인민들이 당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덩샤오핑은 집권 직후 당시 한창 개최 중이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중계권이 없음에도 위성 전파를 훔쳐 중국 전국에 생중계시켰다. 대만 인정 문제로 갈등을 빚던 FIFA와 서둘러 협상하여 1979년 FIFA에 재가입했다. 또 공산주의 국가로서 아마추어 리그였던 자국 리그를 개편하여 프로축구 리그를 출범시켰고, 이어 2부, 3부 리그를 계속해서 만들면서 중국 축구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심판을 육성해야 한다며 해외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2] (자세한 내용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축구굴기 문서 참고.)

이런 당의 대대적인 축구 지원들 바탕으로 1981년에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 참여했다. 중국은 지역예선에서 홍콩, 마카오 등 양민 학살은 물론, 난적 북한, 사우디까지 꺾으며 월드컵 진출의 2부 능선을 넘었지만 최종예선에서 쿠웨이트 다음으로 뉴질랜드와 승점 동률 공동 2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당시 룰에 의해 중립지 단판 플레이오프를 치러 뉴질랜드에게 패하며 월드컵 출전이 매우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3] 그리고 1984년에는 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며 중국 내 축구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중국에게 또 한번의 월드컵 기회가 찾아왔다. 86 월드컵부터 아시아 진출권이 2장으로 늘어나면서 중국인들은 본선 진출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며 흥분하고 있었다.

이 당시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나눠서 예선을 치렀다. 각 지역에서 1팀씩 본선진출을 해서 AFC 통틀어서 2팀이 본선진출을 하는 형식이었다. 중국은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와 한 조에 걸렸다. 인구 10억 국가와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무척 언밸런스한 조 구성이었는데, 1위만이 2라운드로 진출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나머지 3개국의 전력이 (그들 보기에는) 거의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라 중국의 무난한 1위가 예상되었다. 중국인들은 당연히 1라운드를 통과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미 2, 3라운드에 어떤 나라들이 올라올 것인가에 대해 경우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2월 열린 1차전 홍콩 원정경기에서 중국이 0-0으로 비겼다. 단독정부도 없는 식민지 게임 용어로는 멀티하나 못 이기냐며 온갖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당시 영국령이었다.) 이제 첫 경기였고 그 이후 중국은 마카오, 브루나이를 상대로 연승을 이어가며 그저 예선 첫경기에 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인 해프닝 정도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홍콩 역시 1차전을 제외하고 전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1라운드 마지막 경기는 중국과 홍콩이 대결하게 되었다. 둘 다 4승 1무였고 득실차에서 중국이 앞선 관계로 중국은 비기기만 해도 2라운드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중국 본토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의 경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의 승리만이 예측 가능했다.

3. 경기


FIFA 공식 유튜브에서 이 경기를 다룬 영상을 제작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참고로 썸네일 사진은 본 경기가 아니라 중국과 뉴질랜드의 82년 월드컵 플레이오프 경기 장면이다.

전반 19분 홍콩의 프리킥 상황에서 홍콩의 라이트백 충치탁이 대포알 중거리슛으로 선제골을 넣는 파란을 일으켰다. 중국 선수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전개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빠른 시간에 동점골을 성공시키면서 다시 중국이 안정권에 들었다.

그러나 늘 넣어야 할 때 못 넣는 고질적인 결정력 부족이 문제였다. 골은 못 넣겠고 잠그기에는 시간이 애매하여 이도저도 아닌 경기를 하고 있던 후반 15분 홍콩의 오른쪽 뒤편에서 올라온 아무나 받아라 크로스를 중국 수비들이 걷어내지 못하고 공을 내주었고 홍콩의 쿠캄파이에게 다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중국은 홍콩 상대로 추가시간 세트피스에서 골키퍼까지 올리는 굴욕을 감행하고도 득점에 실패했다. 결국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서 홍콩에게, 그것도 홈에서 2:1로 패하면서 월드컵 본선진출은 커녕 2차예선 진출조차 하지 못 하고 광속으로 탈락했다.

4. 경기 후 폭동

8만 명에 달하는 베이징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분노와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미 경기가 끝날 무렵 경기장을 각종 오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중석 곳곳에서 방화가 일어났다. 관중들의 상당수는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기장에 남아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출했고, 또다른 성난 관중 무리들은 경기장 밖으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경기장 밖으로 몰려 나와 유리창 등 경기장 시설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매표소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군중들은 대표팀 버스를 뒤집었고 주차장에 있던 수십대의 차량을 파손시켰다. 수십대의 버스와 승용차 25대가 파손되었다.

일부 관중 무리는 대표팀 감독 및 중국축구협회 회장과의 면담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경찰들은 중국과 홍콩 대표팀 선수들을 경기장 2층에 머물게 하며 그들을 보호했다.

군중들의 분노는 외국인들을 향하기 시작했고 이에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절도, 갈취 등의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다. 피해를 입은 승용차는 대부분 외국인 주재원들의 차였다.

다른 무리들은 경기장 밖 거리로 뛰쳐 나와 주변 건물들과 시설물, 거리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마구 파괴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등의 공공시설물이 파괴되었다.

폭동은 밤을 넘겨 다음날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중국 경찰이 대규모로 출동해야 했다. 특히 중국 경찰은 외국인들의 피해가 잇달아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관중들의 폭동과 소요를 심각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총 127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20여 명이 형법에 따라 처벌받았다. (중국어)

비단 베이징에서만 이런 소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지방에서도 곳곳의 시설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중국 축구의 영웅이었던 중국축구협회 회장과 장쉐린 대표팀 감독은 하루 아침에 영웅에서 역적이 되었다. 특히 장쉐린 감독은 1년전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중국 축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아시안컵의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못할 때였지만 그럼에도 준우승은 분명한 성과였고, 장쉐린 감독은 중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이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84년 아시안컵 준우승은 월드컵 우승으로 가는 중국 축구굴기의 시작일 뿐이며, 이후 더욱 높은 성취를 이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중국 축구 대표팀은 84년 장쉐린 감독이 이룬 업적을 능가하지 못하며 패배 의식만 쌓이게 되었다.

경기 직전까지 중국인들의 영웅이었던 대표팀 선수들은 전날까지 시민들과 마주칠 때마다 응원과 환영을 받았지만, 이날 패배 이후 대표팀 선수들은 팬들이 두려워 한동안 집밖으로 잘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5. 홍콩

한편 이날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홍콩은 2라운드로 진출하였지만 일본과의 홈앤어웨이 결전에서 합계 5-1로 패하며 탈락했다. 이후로 한 번도 월드컵 근처에 가보지 못한 것을 보면 홍콩 축구팬들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을 베이징에서 물먹였다는 점에서 분명 기분좋은 추억일 것이다.[4]

실제로 홍콩은 2015년 5월 19일, 5.19 승리 3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6. 이후

이후로 홍콩은 축구로 중국를 오랫동안 이기지 못했었다. 1995년 다이너스티컵 3위 결정전에서 1:1로 비겨 승부차기로 3:1로 이기긴 했지만, 승부차기는 공식적으로는 무승부 처리가 되기에 38년 동안 중국은 홍콩을 상대로 10승 6무로 압도적인 격차를 벌려왔다. 그러다가 2024년 1월 1일 새해 특선 평가전으로 아랍에미리트에서 치러진 비공개 평가전에서 푼푸이힌(Poon Pui Hin)이 2골을 터뜨리며 2:1로 역전한 홍콩이 중국을 약 38년 7개월 만에 이기게 되었다.[5] 홍콩에선 쾌거라고 하는 반면 중국에선 38년만의 굴욕이라고 분노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소후닷컴은 “정말 창피하다! 중국축구가 무려 38년 만에 3류도 아닌 4류 홍콩에게 패했다. 중국의 홍콩전 마지막 패배는 무려 1985년 5월 19일이었다”고 분노했다. 참고로 2023년 12월 피파 랭킹에서 중국은 79위, 홍콩은 150위였다.

여론과 언론의 포화 속에 알렉산다르 얀코비치 감독은 선수들 휴가도 박탈하고 맹훈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국 누리꾼들은 오만과 패배 원인을 지독한 훈련 탓이라고 변명하던 중국축구협회를 비웃으며 "홍콩에게도 그렇게 패하고는 또 훈련한다고? 훈련으로 체력이 떨어져 패했다고 계속 변명만 할 거냐?"라고 냉소적이다. 결국 이 냉소는 그대로 들어맞아 2달도 안 가 치러진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 조별리그 A조에서 중국은 2무 1패, 0득점으로 AFC 아시안컵 사상 처음으로 무득점 광탈을 당하고 만다. 무엇보다 중국은 2무 3패로 연이어 이기질 못하니 피파 랭킹도 더 하락하게 되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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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경기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198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홍콩 1:2 패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대한민국 3:0 승
파일:프랑스 국기.svg (2010)
對 프랑스 1:0 승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홍콩 0:0 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대한민국 0:2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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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대한민국 0:2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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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쿄 대첩은 그나마 피해자 일본이 재대결에서 한국에 복수했고 둘 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여기서 이긴 홍콩은 다음 경기에서 일본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나가리됐다는 점에서 중국에게 크나큰 굴욕이다.[2]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꼭 틀린 생각은 아니다. 다만... 단기적인 선수 풀 향상이 이루어진 후의 부차적인 것일 뿐..[3] 이 때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회 본선진출 이전 가장 월드컵 본선에 가까이 갔었던 시기다.[4] 아무리 천하의 중국이라도 스포츠 경기에서, 그것도 월드컵 예선에서의 결과를 가지고는 당연히 어떠한 탄압도 할 수 없다. 때문에 홍콩 입장에서는 후폭풍 걱정 없이 중국을 한방 먹인 흔치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5] 이 때 2골을 넣은 푼푸이힌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8강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