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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전개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2024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1. 개요2. 서울특별시
2.1. 2024년
2.1.1. 12월 7일2.1.2. 12월 8일2.1.3. 12월 9일2.1.4. 12월 13일2.1.5. 12월 14일2.1.6. 12월 21일2.1.7. 12월 22일
2.1.7.1. 남태령 집회
2.2. 12월 28일2.3. 2025년
2.3.1. 1월 4일
2.3.1.1. 한남동 집회
2.3.2. 1월 11일2.3.3. 1월 18일2.3.4. 1월 25일
2.4. 2월 1일
3. 지역별 시위
3.1. 부산광역시3.2. 인천광역시
3.2.1. 남동구3.2.2. 부평구3.2.3. 중구
3.3. 대구광역시3.4. 광주광역시3.5. 대전광역시3.6. 세종특별자치시3.7. 충청북도3.8. 충청남도
3.8.1. 천안시
3.9. 경상북도
3.9.1. 포항시
3.10. 경상남도
3.10.1. 창원시
3.11. 강원특별자치도
3.11.1. 춘천시3.11.2. 강릉시
3.12. 전북특별자치도
3.12.1. 전주시3.12.2. 익산시
3.13. 제주특별자치도
3.13.1. 제주시3.13.2. 서귀포시

1. 개요

2024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의 전개를 다루는 문서.

2. 서울특별시

2.1. 2024년

2.1.1. 12월 7일

파일:윤석열퇴진_1.jpg
파일:국회의사당-집회-상황-2.jpg
파일:국회의사당-집회-상황-4.jpg
파일:국회앞윤석열퇴진.jpg
파일:윤석열탄핵집회.jpg
<rowcolor=#fff> 퇴진 집회를 위해 국회 인근에 밀집한 인파
(2024년 12월 7일 오후)
  • 2024년 12월 7일 오후 3시경부터 국회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시작되는 15시 주최 측 추산 30만여 명에서 시작해 국민의힘이 본격적으로 표결을 보이콧하기 시작하자 20시 즈음에는 주최 측 추산 약 100만 명, 경찰 추산 16만 명 규모의 시위대가 운집하였다.
  • 부산, 대구 등에서도 복수 집회가 진행되었다. #1 #2 #3 #4
  • 광화문, 여의도 일대에서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다. #
  • 광화문 일대에서는 "탄핵에 반대한다"며 보수단체가 윤석열 탄핵 반대 맞불시위를 벌였다.
  • 국회 인근에서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5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
  • 15시 10분부터 국회에 집회 인파가 몰려 9호선 국회의사당역 양방향 열차가 무정차 통과한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
  • 15시 24분경, 9호선 열차의 무정차 통과 대상 역이 여의도역까지로 확대되었다. #
  • 16시 42분, 9호선 열차의 여의도역 정차가 재개되었다. #
  • 17시부터 9호선 국회의사당역 전 출구가 폐쇄될 예정이라는 속보가 보도되었다. #
  • 17시부터 5호선 여의도역을 무정차했으나, 17분부터 정차가 재개되었다.
  • 21시 20분경에 탄핵 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폐기되자, 시민 대표들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집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월요일부터 매일 밤 촛불집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다.
  • 여의도 탄핵 집회에서는 20대 여성이 참가 인원의 18.9%를 차지해 모든 성별/연령대별 집단 중 가장 많았다. #

2.1.2. 12월 8일

  • 15시부터 촛불행동 등이 주최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회가 국회의사당역 주변에서 열렸고 19시경에 종료되었다. 주최추산 10만 여명이 결집하였다.
  • 국회의사당역부터 여의도공원 앞까지 300m 구간이 도로가 통제됐다.
  • 촛불행동은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매일 저녁 7시에 촛불 집회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2.1.3. 12월 9일

  • 주최 측 추산 3만 명, 경찰 비공식 추산 5,500명이 집회에 참여하였다.
  • 저녁 6시, 국회의사당역 5번 출구에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탄핵 촛불집회가 있었다.

2.1.4. 12월 13일

  • 가수 이승환[1]이 탄핵 촉구를 격려하는 의도로 집회 장에 등장했다.
  • 탄핵 시위에 동참하는 의미로 약 45분간 무료 공연의 의미를 담아 여의도 현장에서 PR과 몇 곡의 히트곡을 개사해서 콘서트를 진행 했다. 그리고 시위주최 측에 천만원을 쾌척했다. 그 날이 이승환 자신의 생일인데, 윤석열이 자신보다 5살 밖에 안 많다고 존대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한데서 압권. 시민들은 그것을 듣고 폭소했다.

2.1.5. 12월 14일

파일:1214범국민촛불대행진.jpg
파일:1214촛불2.jpg
파일:1214촛불3.jpg
파일:1214촛불.jpg
파일:여의도12월14일.jpg
<rowcolor=#fff> 여의도 서쪽 모든 길을 메운 인파
(2024년 12월 14일 오후)
  • 이 날 주최 측 추산 연인원 200만 명, 경찰 추산 순간최대인원 24만 5천 명으로[2] 집계되었으며 서울시와 KT의 공공 빅데이터와 통신데이터를 활용한 생활 인구 데이터를 보면 여의도에서 포착한 시민들의 수는 최고 51만 8천여 명, 여기에서 평범한 토요일을 즐겼을 9만 7천여 명을 제외해서 최소 42만 명이 모였다고 추정되었다. 이 정도 수치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 집회인 2016년 12월 3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촉구 촛불집회 다음가는 수치이다.
  • 1차 탄핵소추 표결 당시와 마찬가지로 2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정됨에 따라 국회의사당 근처 여의도와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탄핵소추 통과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 이날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오후 4시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오후 3시에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범국민촛불대행진"과 오후 6시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 두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
  • 채상병 특검을 거부하는 정부여당에 날선 대립각을 서오던 해병대예비역연대[3]도 이번 시위에도 동참했다. 이들은 탄핵안이 통과된 직후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 집회에 대비하여 여의도행 5호선 지하철, 9호선 지하철 등 대중교통이 증차되었다. #
  • 이번 집회에서는 꽃다지, 이한철 밴드, 이랑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
  • 이날 대규모 집회가 예정됨에 따라 여의도 근방 카페와 식당에 선결제가 계속되고 있다. 12월 12일 자녀 입시비리와 관련된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12월 16일 법정 구속될 예정인 조국 전 대표는 "작은 이별 선물"이라며 음료 333잔을 선결제하였다고 밝혔다. #
  • 가수 아이유의 소속사 이담엔터테인먼트는 13일 공식 팬카페에 "유애나들의 언 손이 조금이라고 따뜻해지길 바라며 먹거리들과 핫팩을 준비했다"며 빵 200개, 떡 100개, 국밥과 곰탕 총 200그릇, 음료 200잔을 선결제했다고 밝혔다. #
  • 소녀시대 유리는 탄핵 집회에 참석하는 팬들을 위해 김밥가게에 김밥을 선결제했다. 그리고 집회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떼창으로 나온 것에 대해 너무 잘 봤으며, 매일 함께 듣고 있다며 메시지를 전했다. #
  • NewJeans는 따뜻한 밥을 준비했다며 역시 탄핵 집회가 열리는 여의도 인근 식당을 통해 김밥 110인분, 음료 100잔, 커피와 청귤차 등 음료 150잔, 삼계탕 100그릇, 온반 50그릇과 만둣국 50그릇을 선결제하였다. #
  • 박찬욱 영화감독은 집회에 빵을 제공하였다. 빵에는 윤석열과 헤어질 결심이라는 스티커를 부착하여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
  • 배우 송선미가 탄핵 집회에 참석하는 시민들을 위해 커피 100잔을 선결제 하였다. #
  • 14시 55분 경, 지하철 9호선이 여의도역과 국회의사당역을 무정차 통과하기 시작했다. #
  • 15시 3분 경, 지하철 5호선도 여의도역을 무정차 통과하기 시작했다. #

2.1.6. 12월 21일

파일:1221촛불.jpg
파일:1221촛불2.jpg
<rowcolor=#fff> 경복궁 앞 대로에 모인 시민들
  • 집회는 오후 3~4시경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준비된 시민발언과 공연 등이 끝난 뒤에는 명동 인근으로 행진을 한 후에 19시경 해산했다.[4] 탄핵 찬성 집회와 반대 집회가 지근거리에서 동시에 열렸으나 다행히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2.1.7. 12월 22일

2.1.7.1. 남태령 집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해제 이후/2024년 12월 3주차 문서
번 문단을
경찰의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트랙터 행진 저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2. 12월 28일

파일:241228 4차 범시민대행진.jpg
파일:12월 28일 광화문 집회.jpg
<rowcolor=#fff> 경복궁 앞 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2.3. 2025년

2.3.1. 1월 4일

파일:250104 5차 범시민대행진.jpg
2.3.1.1. 한남동 집회
파일:2025년 1월 4일 대통령 관저 인근 지도.jpg

1월 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에서 집회가 예고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체포영장 1차 집행이 실패하면서 민주노총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이 집회에 참여하였고, 집회 참가자들이 도로 한쪽을 점거하면서 남산으로 향하는 상행선이 막히며 교통 혼잡이 일어났다. 이날 집회는 1박 2일로 철야 집회를 치른 뒤 다음날 1월 4일에는 더 많은 집회 참가자들이 모이면서 본격적으로 집회에 들어섰고, 오후 4시경부터 도로 양방향이 모두 막히며 양방향 통제가 되었다. 저녁부터는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등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하던 집회 참석자들이 한남동 일대에 합류하면서, 한남제1고가차도 앞 육교부터 한남제2고가차도 앞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날도 역시 철야 집회로 진행되었으며 다음날 1월 5일도 계속 집회를 이어가면서 철야 집회로 이어졌다. 결국 1월 3일부터 1월 6일까지 총 3박 4일간 집회가 진행되었다.

집회 당시 눈이 내리고 있어서 참석자들은 눈과 추위를 막기 위해 '은박 담요'로 알려진 스페이스 블랭킷을 덮어 몸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이 모습이 마치 허쉬 키세스 초콜릿과 닮았다고 해서 이른바 '키세스 시위'로 불리기도 했다. #

2.3.2. 1월 11일

  • 기존엔 한국은행 본점 앞까지만 행진을 진행하였으나, 이날의 행진은 남산한남동 방면으로 계속됐다. 회현 사거리에서 대기하던 경찰 기동대 및 차벽(경찰 버스)에 가로막혀 잠시 대치 상황이 있기도 했으나, 별다른 충돌 없이 7시 30분경 해산하였다.
  •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받은 영치금으로 커피트럭이 운영되기도 했다. #

2.3.3. 1월 18일

  •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시작된 뒤 열린 집회로, 신속한 구속 및 파면을 촉구하는 내용의 시민발언 및 공연 등이 진행되었다. 이날의 행진은 기존 집회 때보다 더 나아가 서울시청 방면으로 진행하였으며,[5] 소수의 경력이 철제 펜스를 치고있었으나 별다른 대치없이 7시경 집회 종료와 함께 해산하였다.
  • 여담으로 서울구치소 앞에서도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다음날인 19일 새벽에 이곳 탄핵 찬성 시위에서는 배달 온 와플을 현장 경찰들과 나눠먹는 훈훈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비슷한 시각에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는 탄핵 및 구속 반대파의 시위 도중 폭동 사태가 일어났었는데, 탄핵 찬성측과 반대측의 대비되는 모습으로 주목을 받았다.

2.3.4. 1월 25일

2.4. 2월 1일

3. 지역별 시위

3.1. 부산광역시

12월 7일 17시 서면 쥬디스 옆 대로에서 부산촛불행동의 주최로 집회를 열기로 했다. 뉴스1

12월 7일 기준으로 주최 측은 3천여명의 인파를 예상해서 진행하려 했지만, 주최 측 추산 약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모였기 때문에 시가 행진은 않고 비교적 일찍 (19시) 해산하였다.[6] 하지만 시민들이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계속 "윤석열을 체포하라" 구호를 외치자 약 1시간 가량의 뒤풀이 자유발언을 추가로 진행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8일은 증가한 인파를 감안해 시가 행진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진행하였으며, 동천로에서 양쪽이 만나 집회를 마무리했다.

12월 9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 일자 대로에서 20시 기준으로 인파가 약 420m 길이로 모여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같은 시간에 옆 쥬디스 태화 정면에 경찰 기동대가 약 50명 가량 대기 중이었다.

12월 14일 쥬디스 태화 옆 젊음의 거리에서 17시 시작하기로 기존에 공지가 올라왔었지만, 시작 전에 부산촛불행동은 전포대로에서 15시부터 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집회를 열였다. 연합뉴스 35m 폭의 전포대로 약 400m 길이의 대열로 꽉 찬 인원이 모여서 집회 측 집계 기준 7만 명의 시민이 모여[7] 퇴진 및 탄핵 촉구 시위를 진행했다.[8] 집회는 17시 경 윤석열 탄핵 가결로 절정에 이르고, 이후 약 1시간 동안 집회를 한 후 18시를 기준으로 해산했다. SBS 윤석열 탄핵 국면 이후로 부산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인 시위였다.

부산촛불행동은 추후 매일 평일에는 19시, 주말에는 17시에 집회를 열기로 했다. 오마이뉴스 국회 탄핵이 가결된 이후로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판결을 내리는 날 까지 집회를 계속 열기로 했고, 이 날 참가한 시민들에게 주말에는 가급적이면 참가해 줄 것을 호소했다.

12월 28일 부산 남구 국회의원인 박수영 의원실에서 지역구 주민 상담에 찾아가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입장을 요구한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장시간 이어졌으며, 집회와 행진 등을 마친 시민들이 박수영 의원실 앞에 집결하여 항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3.2. 인천광역시

3.2.1. 남동구

12월 9일, 여러 시민단체 연합인 사회대전환·윤석열정권퇴진 인천운동본부의 주도로 구월동 인천터미널 및 롯데백화점 일대에서 2개 차선을 사용하는 것을 시작해 국민의힘 인천시당이 있는 유영빌딩[9][10]까지 약 1.2km 정도를 행진하였다.[11] 인천투데이

3.2.2. 부평구

12월 13일에는 부평역 광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 주관의 집회가 열렸다. # 부평역 광장에서 버스전용차로와 2개 차선을 활용해 집회가 열렸고 부평시장역까지 직진한 후 선회에서 다시 부평역까지 한 바퀴 도는 행진이 이루어졌다.

3.2.3. 중구

12월 12일, 영종도 버거킹 영종하늘도시DT점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중구의 배준영 의원을 비판하고 # 노래를 틀며 시위를 하였다.

3.3. 대구광역시

조선일보에 따르면 12월 6일 오후 5시 대구 동성로 한일CGV 앞에서 시국대회가 열렸다.

12월 4일부터 14일까지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7시[12] 대구 동성로 CGV 대구한일 앞에서 시국대회가 열렸다. # 특히 탄핵안 표결 당일인 12월 14일 집회 추산 5만명, 경찰 추산 2만명이 국채보상로 중앙로역 ~ 공평네거리 구간 전 차선을 꽉 채웠다.

탄핵안 통과 이후인 12월 17일부터는 평일 집회는 폐지하고 토요일에만 기존대로 오후 5시 한일극장 앞에서 여는 것으로 바뀌었다. #

3.4. 광주광역시

12월 4일 오후 7시부터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99개 단체로 구성된 '윤석열 정권 퇴진 광주비상행동' 주관으로 13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후 5.18 민주광장에서 매일 집회가 열리고 있다.

3.5. 대전광역시

12월 4일 오후 8시부터 서구 둔산동 은하수 네거리 일대에서 윤석열정권퇴진대전운동본부를 중심으로 31개 지역 시민단체, 70여 명이 운집했다. 이날부터 19시마다 이들 주도로 퇴진 시위가 열렸다. 12월 4일 기준, 경찰 측에 둔산동 은하수 네거리에 1500여 명이 집결할 것으로 신고된 가운데, 안전 관리를 위해 경력 150명이 동원됐다. 중도일보

3.6. 세종특별자치시

12월 9일 6시 30분부터 도담동 해뜨락 광장(먹자골목)에서 '불법 계엄 헌정 유린! 내란 사범 윤석열 퇴진! 나라 걱정 세종행진' 촛불집회를 열었다. 집회에는 200여 명(경찰 추산 150명)이 참여했고, 이어진 거리 행진에는 300여 명이 동참했다. 세종운동본부는 집회 후 나성동 국민의힘 세종시당까지 3.5km 거리를 행진하며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 뉴스1

윤석열 퇴진을 위한 나라걱정 세종행진이 12월 13일 18시 30분에 도담동 해뜨락 광장(시계탑)에서 진행된다.[13][14]

3.7. 충청북도

3.8. 충청남도

3.8.1. 천안시

12월 9일 '충남시민대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천안종합버스터미널에서 오후 6시부터 진행되었고, 12월 13일까지 매일 오후 6시마다 진행되었다. 뉴시스 뉴스 1

12월 14일 천안종합버스터미널 건너편에서 3시부터 진행되었고 천안, 아산 등 충남 시민 2000여명이 참여했다.

3.9. 경상북도

3.9.1. 포항시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는 12월 8일부터 영일대해수욕장죽도시장에서 매일 정기적인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

3.10. 경상남도

3.10.1. 창원시

12월 8일부터 창원광장 일대에서 집회가 일어났다. 뉴스1

3.11. 강원특별자치도

3.11.1. 춘천시

12월 4일부터 거의 매일 춘천시 동내면 거두리 거두사거리 일대에서 정례집회가 열렸다.

또한 한기호 국회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 을)의 춘천시 동면 만천리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3.11.2. 강릉시

12월 4일부터 월화거리에서 정례집회가 열렸다.

3.12. 전북특별자치도

3.12.1. 전주시

12월 6일부터 전주 객사길에서 윤석열퇴진전북운동본부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이후 평일 오후 6시, 토요일 오후 4시마다 집회가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 이후에는 평일 집회를 그만두고 토요일마다 집회를 연다.

3.12.2. 익산시

12월 11일과 13일 윤석열퇴진 익산운동본부는 영등2동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윤석열 퇴진,구속 익산시민 촛불문화재가 진행 됐다.

3.13. 제주특별자치도

3.13.1. 제주시

윤석열정권퇴진 · 한국사회대전환 제주행동 주최로 제주시청 민원실 앞에서 평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5시부터 윤석열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제주도민대회를 열고 있다. #

3.13.2. 서귀포시

서귀포시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으로 구성된 ‘서귀포 시민행동’은 12월 11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옛 초원다방 사거리에서 윤석열 탄핵, 국민의힘 해체를 촉구하는 촛불 집회를 개최했다. #


[1]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탄핵 전문 가수'라고 소개해서 시민들에게 웃음을 줬다.[2] 여의도에서만 24만 5천 명#[3] 공교롭게도 이들이 국회에서 시국선언을 한 당일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는데, 분노한 이들은 계엄해제 이후 동이 트자마자 대통령실 앞에 몰려가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4] 동십자각 → 안국동 사거리 → 한국은행 본점 앞[5] 동십자각 → 안국동 사거리 → 한국은행 본점 앞 → 숭례문시청역 8번 출구 앞[6] 서면 쥬디스 옆 대로는 만 단위의 인파를 수용할 만한 공간은 아니며, 주최 측이 앰프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바람에 골목 뒤쪽 인원에게 주최 측의 공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했다.[7] 5만명으로 추산한 보도도 있다 오마이뉴스 오후 4시 기준으로 5만으로 추산했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7만 추산 기사는 6시 해산까지 기준을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8] 페르미 기법으로 군중 수를 추산하면 약 4만 2천 이상의 인파였다. 물론 중간에 돌아가거나, 혹은 시간 공지를 못 보고 늦게 유입된 인원들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늘어난다[9] 포드코리아 인천전시장이 있는 곳 6층에 위치해 있다.[10] 해당 건물 1층 유리문 및 주변 벽에는 국민의 짐/내란 동조당 해체, 인천 지역 국회의원인 윤상현, 배준영에 대한 심판이 적인 종이가 붙었고 당사 옆 벽에는 '국민의짐 인천시당 (내란공범)'이 붙게 되었다.[11] 여담으로, 시민들이 유영빌딩에 도착한 시간대에 포드코리아 전시장의 불이 바로 꺼졌다. 도착 시간이 아마도 오후 8시 정도였을 듯.[12]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첫 주인 12월 4~6일은 평일에도 오후 5시부터 시작했었다.[13] 올리브영 세종도담점을 검색하면 나오는 앞에 있는 공터[14] 18시 30분에는 거리공연 및 발언을, 19시에는 도담동 광장에서 국민의힘 세종시당까지 거리 행진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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