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군사적 전술로써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의 전격전의 모태가 되었다.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대장이었던 오스카 폰 후티어의 이름을 붙인 후티어 전술이라고도 불린다.이러한 전술이 최초로 묘사되는 것은 1915년에 출간된 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Goals이다. 최초로 개발하고 사용한 것은 프랑스군이고 이 내용을 담은 문서가 번역되어 독일에 소개되긴 했지만 이것이 독일군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2. 방법
- 공세를 가할 참호를 선정해서 가장 약해보이는 곳을 선정한다. 공격 목표는 전 전선이 아니라 반드시 가장 약해 보이는 일점에 집중한다. 그곳을 목표로 공격 개시 2-3시간 동안, 매우 강렬하게 집중적인 포격을 한다.
- 1차 포격이 끝나면 야포들을 더 후방으로 보내 포사격을 함과 동시에 돌격대를 출발시킨다.[1]
- 돌격대가 포격이 찢어놓은 전선의 틈새로 신속히 침투하여 적의 방어 거점(예를 들어 요새화된 기관총 진지 등)을 고립시키고, 이후 중화기로 무장한 보병이 진격하여 고립된 적의 방어 진지를 무력화시킨다.
- 전선이 뚫리면 선발대와 후발대, 기타 예비대는 쉬지 않고 적을 추격하여 압박한다, 잔존 적 부대는 무시하고 후방부대에 인계한다.
- 뚫린 적 진지로 최대한 병력을 집중하여 전과를 확대한다. 야포 사거리 밖으로 나갈 때를 대비하여 다량의 박격포 부대 지원을 위해 후속한다.
-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여 적의 약점들이 하나하나 붕괴되었다 싶으면 최종적으로 적의 가장 강한 핵심 방어선을 공격한다.
3. 실전사례
대부분의 참전국들이 쓴 대가를 치른 1914년이 지나가고 나서 실제로 이런 전술을 널리 주 전술로 사용한 독일 제국군은 베르됭 전투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며, 러시아 제국과의 전투, 그리고 1916년 루마니아 왕국과의 전투에서도 활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17년 카포레토 전투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러 제국군이 파병나간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침투 전술을 아주 잘 써먹어 이탈리아 왕국군을 괴멸시킨다. 그리고 1918년 3월에 전개된 루덴도르프 공세 당시에도 이 전술 덕분에 프랑스군과 영국군, 미군을 몰아붙이며 마른 전투 이후 다시금 파리 인근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이론상으로는 기습적인 병력의 집중으로 적의 전선을 붕괴시킨 뒤에, 후퇴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적의 예비대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적의 전선을 돌파한 뒤 전과를 확대하는 데에는 수많은 애로사항이 꽃피었다.일단 이 전술을 몇번 당해본 연합군은 빠르게 대응 교리[2]를 개발하였고,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독일군의 포격이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다고 해도, 집중 포격은 땅에 수많은 구덩이를 만들고 도로를 파괴해버려서 후속 병력의 전진과 물자의 보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실제로 대전 막바지에 독일이 루덴도르프 공세를 퍼부었을 때 비교적 성공적으로 병력을 후퇴시킬 수 있었던 연합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서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1] 1918년 당시에는 MP18로 무장한 돌격대와 A7V 전차를 선발 공격대로 적극 활용했다.[2] 얇은 방어선을 여러 개 만들어서 적이 들어오며 소모하게 냅둔 뒤, 준비해둔 예비대로 카운터치는 것. 사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방어전술이지만 돌격대 자체가 병사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원을 가혹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낸 부대인 만큼, 독일 입장에서는 (후티어 전술 자체가 돌격대의 심각한 손실이 전제되는 전술이지만)정예부대가 이런 식으로 소모되면 빠르게 충원하는 게 불가능했다. 덕분에 춘계 공세에서도 독일군이 이런 식으로 참호선을 뚫고 진격하자 연합군은 그냥 중요 거점 이외에는 포기하거나 얇은 방어선만 연속해서 배치한 뒤 이후 공세종말점에 근접한 독일군을 카운터치는 방법을 썼고, 이렇게 독일군의 참호 돌파용 정예부대가 큰 피해를 입자 그대로 공세가 돈좌되고 이후 연합군의 반격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