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화학이 그 정의상 실용적인 학문이라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화학과 관련된 기술을 익혔다. 나무를 태우고 그 불로 고기를 굽는 것까지도 넓게 보면 의도적으로 유용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정말로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기원전 1000년 경에 이르면 세계 각지의 문명에서 여러 화학 관련 기술이 널리 활용되었으며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야금술 및 금속 제련, 도자기 굽기, 식품 발효, 의약품과 화장품 추출, 정제, 제조, 식품 가공 등등.
그 역사를 살펴보면 기원전 12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여류 향수 제조자 겸 화학자가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오행설이 서경(書經)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며 상생설, 상극설이 더해지고 음양설과 합쳐졌으며, 특히 한대 이후에는 음양오행설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과는 반대로 구체적이고 유물론적인 이론이 후대로 갈수록 신비주의적,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이집트와 서아시아 등지에서는 청동기 등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 때문인지 고대부터 값싼 금속을 금으로 변환하려는 시도, 즉 연금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바탕으로. 당시에는 물질을 정제하는 것과 물질을 변환하는 것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금술이 근현대 화학의 기초가 된 건 사실이다. 일단 다른 금속으로 금으로 만드는 뻘짓이었지만 그덕에 기본적인 실험도구들이 연금술에서 나왔으니 화학의 기초라고 할 만하다.
그 후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서도 물질의 근본 요소와 변환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어졌는데,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주장이 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그나마 의미있는 주장은 데모크리토스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다. 단, 물질의 근본 단위가 어떤 입자라는 생각은 그리스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고, 인도에서도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거의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일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주류 이론이 되었지만, 원자론도 결코 잊혀진 상태는 아니었다.
2. 중세
이후 8세기~13세기 이슬람 과학이 꽃필 시기에는 아랍, 페르시아의 화학자가 화학과 약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1] 그리스 과학을 단순히 이어받는 것을 넘어서 물질의 구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추가되었고 여러 실험 기법이 정리되었다. 예를 들어, 냉각 코일이 이 시기의 페르시아 화학자인 이븐 시나의 발명품이다.
한편, 12세기 이후 무역과 전쟁을 통해 이슬람 과학의 성과가 이탈리아 등지로 조금씩 확산되었고 점차 유럽이 화학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250년에는 분별 증류가 개발되었고, 16세기에는 파라켈수스가 의약 화학(iatrochemistry)를 발전시켰고 리바비우스가 최초의 화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같은 시기 바노치오 비링구치오와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는 야금술을 정리하여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3. 근대
17세기는 근대 화학의 태동기로, 화학 반응식이 쓰이기 시작했고 화학 실험이 더욱 정교해졌으며 많은 실험 결과가 축적되었다. 1661년에는 보일이 The Sceptical Chymist에서 화학과 연금술을 구분하고 원자, 분자, 화학 반응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 해로부터 근대 화학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17, 18, 19세기 내내 분리분석기술과 합성 방법, 화학 및 물리학 이론의 발전을 바탕으로 원소와 간단한 구조의 화합물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열화학과 기체에 대한 이론을 비롯해 이론적 배경도 비교적 튼실해졌다. 18세기 말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라부아지에는 정밀한 실험을 통해 연소가 산화 반응임을 증명하였고 질량 보존의 법칙과 원소의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분석 화학과 화학 명명법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803년, 돌턴이 근대적 원자설을 발표한 것 또한 화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돌턴이 최대 단순성의 법칙(rule of greatest simplicity)를 이용해 원자량을 추정하는 바람에 원자량을 결정하는 데 혼란이 많았다. 이어서 1811년에는 아보가드로가 아보가드로의 원리와 분자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는 동시에 전기화학이 막 등장하여 발전하던 시기였고, 여기서 영감을 받은 베르셀리우스가 화학결합은 서로 전하가 다른 '원자' 간의 전기적 결합이라는 이론을 발표한다. 이는 NaCl처럼 단순한 무기염의 경우에는 실험 결과와 잘 맞았지만, 유기화합물의 경우 어떻게 같은 원소가 언제는 전기적 음성이었다 다른 때는 양성이 되는지 설명하기 어려웠고, 또 오늘날 우리가 단일 원소의 원자로 이뤄진 분자성 물질이라고 알고 있는 물질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기적 성질이 같은 물질이 결합을 이룰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베르셀리우스와 소위 라디칼 이론가는 돌턴의 최대 단순성 법칙에 따라 사실 그런 물질의 분자는 단일 원자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베르셀리우스가 사망하고 나서야 분자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 외에도 19세기에는 이성질체가 발견되고 화학 평형의 개념이 탄생했으며 생화학과 유기화학, 배위화학이 발전하였으며 주기율표가 작성되는 등 화학이 동시대의 다른 분야처럼 빠르게 발전하였다. 또,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1855에는 석유의 크래킹이 개발되고 1859-60년에는 키르히호프와 분젠에 의해 분광학이 화학 연구에 쓰이기 시작하고, 1862년에는 최초의 인공 플라스틱이 선을 보이는 등 화학이 약제사를 위한 학문에서 오늘날과 같이 기술과 산업의 근간이 되는 학문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기간은 물리화학이 태동한 시기로서, 1876년 깁스에 의해 화학 평형의 물리적 근원이 해명되었고 아레니우스가 전리설을 제창했으며, 화학반응속도론이 발전하였다.
4. 현대
20세기 이후에는, 1903년 크로마토그래피 기법이 개발되었으며, 1927년 양자역학이 비로소 개발됨과 동시에 폴링 등에 의해 화학 결합과 분자의 전자기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놀라울 정도로 깊어졌다. 또, 자연에서 원소를 발견하는 것에서 원소를 인공적 합성하기 시작했다. 1945~6년에는 오늘날 화학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NMR이 발명되었으며, 1952년에는 페로센(ferrocene)의 구조가 밝혀지며 유기금속화학이 실질적으로 탄생하였다. 1953년에 DNA의 나선 구조 중 하나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Na/K-ATPase, 미오글로빈 등 생체고분자의 구조와 반응에 대한 연구도 빠르게 진행되었다(분자생물학). 1966년에는 거울상 이성질체의 선택적 합성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이후로는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계산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어났다.
[1] Chemistry as a science was almost created by the Muslims; for in this field, where the Greeks (so far as we know) were confined to industrial experience and vague hypothesis, the Saracens introduced precise observation, controlled experiment, and careful records. They invented and named the alembic (al-anbiq), chemically analyzed innumerable substances, composed lapidaries, distinguished alkalis and acids, investigated their affinities, studied and manufactured hundreds of drugs. Alchemy, which the Muslims inherited from Egypt, contributed to chemistry by a thousand incidental discoveries, and by its method, which was the most scientific of all medieval operations. (Will Durant, The Age of Faith, Simon & Schuster,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