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영국 제5대 본토군사령관 해럴드 프랭클린 Harold Franklyn KCB, DSO, M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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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해럴드 에드먼드 프랭클린 경 Sir Harold Edmund Franklyn | |
출생 | 1885년 11월 28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아일랜드 코크 | ||
사망 | 1963년 3월 31일 (향년 77세) | |
영국 버크셔주 뉴베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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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럭비 스쿨 영국 육군사관학교 | |
복무 | 영국 육군 (1905~1945)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재임기간 | 제5대 본토군사령관 | |
1944년 ~ 1945년 |
1. 개요
영국의 군인.2. 생애
아일랜드 코크에서 중장까지 올라간 윌리엄 프랭클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0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오브웨일스요크셔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908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허버트 벨필드의 딸과 결혼하고 1910년 제3사단장으로 있던 아버지의 부관으로 일했다. 191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참모대학에 입교해 졸업 후 서부전선에 참모로 배치되었다.키치너 육군에 자원해 대위로 진급하고 이어 소령으로 진급했다. 제21사단 작전장교로 있었으며 솜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 참가했고 종전까지 서부전선을 지켰다. 전후 영구계급 소령으로 진급하고 이스트랭커스터연대에 배치되었다. 1930년 중령으로 진급하고 웨스트요크셔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부터 대령으로 진급해 수단방어군으로 배치되어 참모장을 지내다가 1935년 방어군사령관으로 영전했다.
1938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중동에 있는 제5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5사단은 영국으로 이동해 영국원정군 소속이 되었고 프랑스로 이동했다. 사단은 제13, 15, 17여단 3각 편제로 되어있었는데 15여단이 노르웨이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군으로 잠시 사단을 떠나있었다. 전쟁부에선 5사단을 본토로 철수시켜 채널제도방어를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독일군이 센강을 따라 진격했고 5사단은 퇴각 중 아라스에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게된다.(아라스 전차전) 이에 마틸다 전차가 중심이 된 제1기갑여단, 제50사단과 함께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1기갑여단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멸했고 5사단과 50사단은 벨기에군과 합류해 이프르에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벨기에군이 무너지며 전황은 다시 기울었다. 사단의 병력역시 2개여단을 합해 600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와해되어있던 영국,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키는 지연전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며 덩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으로 돌아오고 그와 5사단 전 인원은 스코틀랜드 사령부 소속이 되었으며 바스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 7월 중장으로 진급해 제8군단장으로 영전했다. 본토 방어에 힘쓰면서 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본토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종전까지 있었다.
종전 후 제대했으며 196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