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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대학교 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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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제2 법학관에서 함부르크 대학교 본관을 바라본 모습.

1. 개요2. 역사
2.1. 초창기2.2. 1940~1990년대2.3. 2000년대 이후
3. 평가4. 시설5. 동문

1. 개요

소재지
20146 Hamburg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법과대학. 약 4,640명의 학생수에다 47명의 정교수 숫자를 자랑하는, 북독일 최대의 법과대학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제5대 수상이었던 헬무트 슈미트와 제9대 수상 올라프 숄츠,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그 외에 페터 슈투룩, 볼프강 쇼이블레, 오토 쉴리 등과 같은 유명한 정치가들이 모두 함부르크 법대 출신들이다. 독일 최고의 지성지 '짜이트'지를 발행한 언론인 게르트 부체리우스도 함부르크 법대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함부르크 법대 교수를 역임한 사람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은 한때 독일내에서 로마법의 최고권위자였던 막스 카저 교수, 지금도 독일 비교사법학계에서 최고봉으로 통하는 콘라드 쯔바이거트 교수와 그의 제자인 하인 쾻츠 교수, 회사법의 최고권위자였던 카스텐 슈미트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곽윤직 교수가 함부르크 법대에서 1년간 객원교수를 지낸 바 있고, 서울대 로스쿨의 윤진수 교수도 함부르크에서 공부를 한 바가 있다.

2. 역사

2.1. 초창기

함부르크 법대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것은 1919년이다. 초창기의 함부르크 법대는 해양법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거기엔 당시 독일 내에서 유일한 해양법전공 교수였던 한스 부어스텐도어퍼(Hans Wurstendorfer)교수가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한다.[1] 또한 그 당시의 함부르크법대는 명칭상으로도 법경대학이라 불리면서 그 시대의 독일 내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법학과 경제학을 통합해서 교육하는 방식을 취했으며,[2] 형법학에 있어서는 범죄학까지도 연구분야에 포함시켜 다른 지역의 형법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헌법학 역시도 국가학이란 이름으로 교육되었으며, 이로써 사실상 헌법학과 정치학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모두가 독일 내에서는 선구적인 시도들이었다.

그 밖에도 함부르크법대는 진보적인 학풍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소수의 함부르크 법대 창립멤버 가운데 하나였던 루돌프 라운(Rudolf Laun) 교수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서, 일찌감치 함부르크 법대는 독일 내에 몇 안 되는 좌파성향 법학자들의 요람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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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초창기 함부르크 법대 교수들 가운데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유대인 교수들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함부르크 법대 학장이었던 쿠어트 페렐스(Kurt Perels) 교수와 법대 교수들 가운데 2인자격이었던 에른스트 브룩(Ernst Bruck) 교수를 비롯해 7명의 교수들이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함부르크법대는 나치 정권 초기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아야 했으며, 많은 함부르크법대 교수들이 나치당이 집권한 동안 자살하거나 이민을 떠나거나 강제퇴직을 당해야 했다. 당시 나치에 의해 독일 대학 중 최고대학으로 육성되고 있던 이웃의 키일 대학교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운명이었다.

2.2. 1940~1990년대

함부르크법대의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다시 문을 연 함부르크 법대는 다시 예전의 체계를 회복하고, 차츰 나치 정권의 공백을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는 학생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의 법학관 건물들과 여러 연구소 건물들이 생긴 것도 대략 1950년대 시기이다. 이미 이러한 건설기부터 함부르크 시정은 좌파 사민당 정치가들이 철통같이 장악했기 때문에, 지금도 함부르크 법대 건물들은 독일 남부지역의 유서깊은 법대 건물들에 비해 매우 서민적이면서 실용적인 양식으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함부르크법대는 1968년의 대규모 학생시위사태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대학 중 하나였으므로,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함부르크법대의 모든 의사결정구조는 학생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뀌었고, 교수들의 독재적인 권한은 다른 어느 도시의 법대들보다도 약화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함부르크법대는 독일내 다른 법대들에 비해서 법리나 법조문 자체보다, 법학과 다른 인접 사회과학 간의 연결을 더욱더 강조하는 쪽으로 법학교육의 방향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 산물로서 나타난 것이 1974년 10월에 문을 연 함부르크 제2 법과대학이다.

함부르크 제2 법과대학은 법학이라는 학문이 현대의 가장 절박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모토를 갖고서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법학은 더이상 정신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어야 했으며, 이론교육과 실무교육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했다.

법사회학과 법경제학이 특히 강조되었으며, 사례위주의 교육이 기본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았고, 사법과 공법의 구분도 점점 사라져갔다. 민법은 법경제학과 결합했고,[3] 행정법행정학과 결합했고, 헌법정치학과 결합했고, 형법은 범죄학과 결합했다. 현대적인 법영역인 소비자보호법, 보험법, 경제법 등이 중요시되었으며, 함부르크 특유의 국제무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비교사법, 유럽법, 해상법, 동구권법 전공이 함부르크법대를 대표하는 연구주제로 떠올랐다.

대규모강의는 가급적 지양되었고, 소규모의 세미나 중심으로 수업이 구성되었다.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필기시험을 치르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학점을 취득하기 보다, 소규모의 세미나에 참가하여 발표문을 작성하고 함께 토론하는 방식으로 학점을 취득하기 시작하였다. 교육연한 역시도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또한 함부르크법대는 워낙에 학제적인 접근방식을 즐겨 취했기 때문에, 법대생들 중에 유난히 타전공 출신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해지게 되었다.

함부르크법대의 이와 같은 법학교육개혁은 다른 도시의 법대들에게도 모범이 되었고, 학생들로부터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실무에 가까운 사례위주의 교육과 인접사회과학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학제적 교육, 1주일마다 실시하는 모의고사와 모의구술시험으로 인해 1차시험 성적과 2차시험 성적의 편차는 줄어들었고, 고시학원의 인기는 수그러들었다. 취업시장에서도 함부르크법대 졸업생들에 대해 큰 만족을 표시했다.

2.3. 2000년대 이후

1990년대 말에 함부르크 제2법대는 함부르크 제1법대와 통합하였고, 함부르크 법과대학으로 재편성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법학도서관이 문을 열었는데, 최첨단 시설을 완비한 데다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열어 다른 도시 법대생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3. 평가

독일은 기본적으로 모든 국립대학교들이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독일의 법과대학에 있어서도 그 순위를 매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함부르크의 법학교육은 독일 내에서도 거의 최고 수준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 막스플랑크 비교사법연구소의 지원을 받는 민법과 비교사법, 국제사법의 경우 독일 내에서 함부르크 법과대학이 매우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4. 시설

슐리터슈트라쎄에 있는 5층짜리 법학관은 무지막지하게 커서 무슨 고래등을 연상케 한다. 함부르크 대학 인문사회계 캠퍼스에서 그보다 더 큰 건물은 넓은 면적의 3층짜리 국립중앙도서관과 길다란 13층짜리 철학탑(Philosophenturm)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법학관 내에는 민법, 헌법, 형법, 상법, 경제법, 행정법, 법철학, 로마법, 노동법, 소송법, 청소년법 세미나가 모두 모여있고, 법학관 뒷편으로는 법률중앙도서관이라는 최신형 도서관이 붙어 있는데, 이 도서관의 장서는 37만권이며, 법률잡지는 900종이 구비되어 있고, 토, 일요일도 없이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문을 닫는다. 1000석이 넘는 좌석에는 인터넷선과 초현대식 조명이 설치되어 있으며, 공짜로 인터넷을 하거나 문헌을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는 75대가 비치되어 있다. "아, 선진국의 대학도서관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낄 수가 있다.

그 외에도 에드문트지머스알레에 있는 본관과 슐리터슈트라쎄에 있는 법학관, 로텐바움쇼쎄에 있는 법학별관(유럽법도서관), 법학관 옆에 있는 소법학관, 소법학관 건너편에 있는 강의동, 본관 옆에 있는 제2법학관 등 모두 13개의 건물이 법과대학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경제법연구소, 법경제학연구소, 세법도서관, 교회법도서관, 국제관계법도서관, 동유럽법도서관, 해양법도서관 등은 약간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유명한 막스플랑크 비교사법연구소는 대학에서 독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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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제2 법학관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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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법대도서관의 세미나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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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행정법도서관의 외부 모습

5. 동문

함부르크 법과대학에는 과거에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박사과정으로 입학하여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 중의 다수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법과대학의 교수들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지만,[4] 박사학위 취득에 실패하고 그냥 사라지신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함부르크법대의 한국인 박사과정 유학생들 숫자가 격감한 이유는 첫째 환율의 문제가 크고, 둘째로는 한국 법대 교수들의 실력수준이 많이 상승하여 독일유학이 점점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셋째로는 2000년대 이후 사법시험 합격정원이 큰 폭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사법시험 합격하는 것이 워낙 어려운 데다 (실력만 있다고 사법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것이 아니었음) 대학원 교육 역시 부실해서 독일유학으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한국에서 사법시험 합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워진 데다 대학원 교육 역시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굳이 독일까지 유학 나가서 고생하려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함부르크법대의 한국유학생 숫자는 더욱 감소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 지금도 함부르크 대학교는 해양법이 강한 대학이다. 함부르크는 국제해양재판소의 소재지로서도 유명하다.[2] 독일의 제5대 수상 헬무트 슈미트도 함부르크 대학교 법경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함께 공부했다.[3] 함부르크 대학교의 섀퍼 교수와 오트 교수가 집필한 법경제학 교과서는 독일 내에서 법경제학 교과서의 바이블로 통한다.[4] 대표적 예가 서울대 로스쿨의 이원우 교수, 한양대 로스쿨의 임미원 교수, 서울시립대 로스쿨의 장경원 교수, 건국대 로스쿨의 최윤철 교수, 전남대 로스쿨의 신창선 교수, 강원대 로스쿨의 김성은 교수, 국민대 법대의 남윤삼 교수, 조선대 법대의 권상로 교수, 숙명여대 법대의 백경일 교수 등. 사실 이 시기의 법과대학에 독일 유학파 출신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