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1:55:59

볼프강 쇼이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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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13대 연방의회 의장
볼프강 쇼이블레
Wolfgang Schäuble
파일:4th_EPP_St_Géry_Dialogue;_Jan._2014_(12189287345)_(cropped).jpg
출생 1942년 9월 18일
독일국 프라이부르크[1]
사망 2023년 12월 26일 (향년 81세)
독일 오펜부르크
재임기간 제13대 연방의회 의장
2017년 11월 24일 ~ 2021년 10월 26일
서명
파일:Wolfgang_Schäuble_Signature.png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배우자 잉게보르크 헨슬(Ingeborg Hensle, 1969~)
자녀 아들 한스요르크
딸 크리스티네, 율리아네, 안나
학력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법학, 경제학/학사; 법학/박사)
함부르크 대학교(법학, 경제학/학사; 법학/박사)[2]
종교 개신교 (독일 개신교회)
신체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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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14 (하원)
지역구 오펜부르크(Offenburg)

1. 개요2. 생애
2.1. 정치 입문2.2. 연방의회 진출2.3. 헬무트 콜 내각2.4. 기독교민주연합 지도부2.5. 메르켈 내각2.6. 연방의회 의장
3.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정치인. 1972년에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연방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소속으로, 현재 제13대 독일연방의회 의장(제19대 독일연방의회)이다.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연방특임장관 겸 연방총리청장, 내무장관을 역임했으며, CDU/CSU 원내대표, 기독교민주연합 대표를 역임하다가 기부금 스캔들로 일선에서 후퇴했다. 후임 당 대표인 앙겔라 메르켈이 집권한 이후 2009년까지 다시 내무장관,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2017년부터 2021년 10월까지는 독일 연방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2023년 12월 26일 생을 마감하였다.

2. 생애

바덴뷔르템베르크프라이부르크에서 세무고문이자 정치인인 카를 쇼이블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1년에 아비투어 시험을 본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세무관료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2.1. 정치 입문

1961년 기민련의 청년 조직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1965년에는 기민련 당원이 되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는 남부 바덴 지역의 청년 조직을 이끌었다.

2.2. 연방의회 진출

1972년 총선에서 오펜부르크(Offenburg)[3] 선거구의 기민련 공천을 받아 당선되면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이후 2021년 현재까지 이 지역구에서 14선을 달성했고, 2017년에는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의 기록(1867~1881, 1883~1913)을 넘어서 연방의회 최장수 의원이 되었다.

2.3. 헬무트 콜 내각

쇼이블레는 1984년 특임장관 겸 연방총리청장에 임명되면서 입각했다. 입각한 이후에는 헬무트 콜의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에리히 호네커의 첫 공식 서독 국빈방문(1987)에 대한 준비를 맡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내각 개편으로 내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독일 재통일 당시 현직 내무장관이자 서독 대표로써 통일조약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재통일 직후인 1991년 1월의 4차 콜 내각에서도 일단 내무장관직에 잔류했다가 동년 11월 CDU/CSU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물러났다.

2.4. 기독교민주연합 지도부

1991년 11월 쇼이블레는 CDU/CSU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1998년 총선에서 기민련이 패배하자 헬무트 콜은 당 대표직을 사임했고, 원내대표였던 쇼이블레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여만에 1990년대 기민련이 불법으로 기부금을 모금했다는 스캔들이 터지면서 헬무트 콜과 같이 1선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당 대표직을 사임했다. 후임 대표로는 사무총장이던 앙겔라 메르켈이 선출되었고, 원내대표로는 쇼이블레 아래에서 그림자 내각에 참여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선출되었다.

2.5. 메르켈 내각

2005년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련은 선거에서 승리해 제1당 지위를 확보,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메르켈의 그림자 내각에 참여하여 선거 기간 동안 안보와 외교 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던 쇼이블레는 당초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다시 내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2009년 선거의 승리 이후 구성된 2차 메르켈 내각에서는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7년에 연방의회 의장에 선출될 때까지 재무장관직을 역임했다. 독일이 유럽 경제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다보니 그리스 경제위기를 포함한 유로존 위기 전반에서 독일 주도의 긴축정책을 주관했고, 2014년에는 독일 경제 상황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균형예산 방침을 고수하다가 해외 경제수장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2.6. 연방의회 의장

쇼이블레는 2017년 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메르켈 내각을 떠났다. 연방의회 의장에 선출된 이후에는 2018년 기민련 대표 선거에서 메르켈의 과거 라이벌이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에 대한 지지 선언 외에는 공개적인 정치 행보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14선에 성공했지만, 선거 전반의 기민련 득표율 감소 추세 속에서 원외 군소정당들이 10%를 득표하고 사민당과 녹색당, 자민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소폭 상승하면서 2017년 선거 대비 13.2% 감소한 34.9%[4]를 득표했고, 정당투표율도 11.2%나 감소한 상황.

새로 개원한 제20대 연방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베르벨 바스(Bärbel Bas)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연방의회 의장에서 퇴임했다.

2023년 12월 26일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가족들의 공개로 다음날인 12월 27일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3. 여담

  • 1942년생으로 주로 1950년대~1980년대생이 많은 독일 정치권에서는 꽤 고령인 편이다.[5]
  • 1990년 내무장관 시절 암살미수사건을 겪어 척추를 크게 다친 탓에 좌반신불수가 되었으며, 따라서 휠체어를 사용한다. 이 후유증 탓에 2010년 재무장관 근무 시절 브뤼셀에 EU 재무장관 회담 차 방문했다 예상치 못하게 타국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등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당시 쇼이블레 장관은 사직서를 메르켈 수상에게 2차례 냈지만 두 번 다 반려되고, 이후 연방의회 의장으로 당선되는 2017년까지 재무장관으로서 7년 동안 더 근무하였다.)
  •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대통령 후보군으로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사민당 소속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현 대통령(당시 외무장관)이 대연정 양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69년 잉게보르크 헨슬(Ingeborg Hensle)과 결혼해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장녀 크리스티네의 남편이자 첫째 사위인 토마스 스트로블(Thomas Strobl)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기민련의 지역당을 이끌고 있다.


[1]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프라이부르크[2] 박사학위 취득 사실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함부르크 대학교 모두가 모교인 것은 확실하나 박사학위를 어디에서 취득했는지는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함.[3]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도시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까지 통근열차로 연결될 정도로 가깝다.[4] 점차 기민련-사민당 양당 외 정당들의 득표율 비중이 높아지는 독일 정치 특성상 30%대를 득표하고도 지역구 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놀랄 일은 딱히 아니긴 하지만, 해당 지역구는 1949년 설립 이후 기민련 지역구 후보 득표율이 40% 후반대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기민련 우세 지역구였다. 빠진 표가 특정 정당에 몰리지 않아 2위와의 격차가 16.2%나 되긴 했지만...[5] 다만 1940~1942년생들이 의외로 있는 탓에 19대 연방의회 기준 최고령은 아니었다. 최고령은 1940년 3월생독일을 위한 대안빌헬름 폰 고트베르크(커르트 폰 고트베르크와 같은 가문 사람이다.)이며, 몇달 차이로 자민당의 Hermann Otto Solms가 뒤를 따른다. 20대 의회에서도 대안당 의원 2명이 앞서 최고령 의원 타이틀을 다는 데는 실패했다. 20대 의회 최고령은 1941년 2월 생인 독일을 위한 대안Alexander Gau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