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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B3861><colcolor=#522142,#522142> 한(韓)나라 4대 왕 환혜왕 桓惠王 | ||
성 | 희(姬) | |
씨 | 한(韓) | |
휘 | 연(然) | |
아버지 | 한희왕(韓僖王) 한구(韓咎)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39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10대 국군, 4대 왕. 한희왕의 아들. 한왕 안의 아버지다. 이 시기에 장평대전이 일어나 조나라가 쇠락했다. 34년의 긴 재위 기간에 비해 기록이 엄청나게 적은 왕이다.2. 생애
한환혜왕 원년(기원전 272년), 연(燕)나라를 공격하였다.한환혜왕 9년(기원전 264년),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형(陘)을 함락시키고 분수(汾水) 주변에 성을 쌓았다.[1]
한환혜왕 11년(기원전 262년), 야왕 땅은 황하 북쪽에 위치한 상당군과 황하 남쪽에 위치한 한나라 본토를 잇는 땅이었다. 진나라가 치니 야왕의 현령은 진나라에 투항했다. 그리하여 상당군과 한나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이에 상당 군수(上黨 郡守)[2]인 풍정이 조(趙)나라에 투항하자 조효성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3]
한환혜왕 12년(기원전 261년), 진나라가 구씨, 윤, 진을 치면서 왕흘에게 상당을 치게 하니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보내 막게 했다.
한환혜왕 14년(기원전 259년), 진나라가 계책으로 염파(廉頗) 대신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을 대장으로 세우게 하고 장평에서 싸웠는데,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에게 패배해 40여만 병사가 갱살당했다.[4]
한환혜왕 17년(기원전 256년), 진나라가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함락시켰다.
한환혜왕 22년(기원전 251년),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죽었다.[5][6]
한환혜왕 24년(기원전 249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성고와 형양(滎陽)을 차지했다.
한환혜왕 26년(기원전 247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군을 다시 차지했다.
한환혜왕 29년(기원전 244년), 진나라가 13개 성을 함락시켰다.
한환혜왕 34년(기원전 239년), 한 환혜왕이 승하하고, 그 아들인 한안(韓安)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한왕안이다.
[1] 이것은 한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가시화 되었음을 의미한다.[2] 당시에는 군의 수령을 태수가 아닌 군수라고 불렀다.[3] 참고로 재상인 평원군은 받아들이라 했다.[4] 이 일로 인해 조나라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백기는 진소양왕에게 자결을 명령받자, 그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 일을 뉘우치며 자결한다.[5] 진소양왕의 아들인 진효문왕(秦孝文王) 또한 같은 해에 죽었다.[6] 이 때 환혜왕은 굴욕적인 일을 겪는데 다른 나라들이 소양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 조문했을 때 본인만 본인이 직접 와서 조문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칠웅 최약체다 보니 진나라 눈치를 안 볼 수 없어서 그랬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