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900년 5월 23일 |
함경남도 북청군 상거서면 엄동리[2] (現 함경남도 덕성군 엄동리) | |
사망 | 1950년 9월 (향년 50세)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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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0년 5월 23일 함경남도 북청군 상거서면 엄동리(現 덕성군 엄동리)에서 아버지 한도준(韓道俊, 1862 ~ ?)과 어머니 김해 김씨(1877 ~ ?)[3]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해 중화민국 봉천성 장백현(長白縣) 십오도구(十五道溝)[4] 군량동(軍糧洞)에 거주했으며, 이후 장백현 십육도구(十六道溝)[5] 소덕수리(小德水里)로 이주했다. 1922년 장백현에서 광정단(光正團)에 입단해 광정단원으로서 김서운(金瑞雲), 김창일(金昌鎰) 등과 함께 함경남도 삼수군 삼수경찰서 영성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후 체포되어 1923년 1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주거침입, 강도살인, 강도상인(强盜傷人),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23년 6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살인 혐의에 대해 공소가 취하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40년 11월 10일에서야 가출옥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경 별세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